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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47화 (47/191)

47화

“로즈안나를 불러야 하니 이만 나가주십시오.”

“로즈안나는 황후의 여동생을 사칭한 죄를 스스로 읊고는 감히 황제를 볼 면목이 없으니 나가서 바질이나 따겠다더군. 오늘 저녁 만찬에 바질 소스를 끼얹은 거위 구이가 나올 예정인 모양이지.”

아르사크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쳤다. 이 재수 없는 자식과 날 한 방에 몰아넣고 자기는 슬쩍 빠져나갔겠다.

로즈안나가 돌아오면 놀라 자빠질 만한 짓을 하고야 말리라 다짐하면서, 아르사크는 거침없이 윗옷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네페의 민간 여자들은 상의와 하의, 둘로 나누어진 옷을 입는다고 했다. 광업이 흥했을 무렵에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광부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옷이라는 설명이었다.

상의를 벗은 아르사크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 아래의 치마도 허리부터 풀어 벗어버렸다. 문제는 안에 남은 한 장의 얇은 드레스였다.

슈미즈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등 뒤에서 촘촘하게 작은 단추를 여미도록 되어 있는 그것은 먼지를 막을 수 있도록 견고한 천으로 짜 당겨 벗기도 힘들었다. 팔을 돌려 손이 닿는 단추까지는 풀었지만 아무리 해도 날개뼈 근처와 허리 위쪽으로는 단추를 풀 수가 없었다.

더듬거리며 엇나가던 아르사크의 손을 에리히가 밀어낸 것은 그때였다.

“부탁을 하면 그 혀가 꼬여 죽기라도 하나?”

에리히는 비웃는 투로 말하면서 아르사크가 풀지 못한 단추를 하나씩 천천히 풀었다. 아르사크는 흘러내린 머리를 한 가닥으로 잡아 앞쪽으로 끌어당기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는 폐하께서는 얌전히 아내의 시중을 들어주면 그 손이 비틀어지기라도 하시나요?”

“나날이 건방진 소리만 느는군.”

“이젠 혀를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은 못 하시겠지요.”

“아내가 되었으니까?”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직접 겪어보셨으니.”

그것은 여러 가지를 내포한 말이었다. 에리히는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콧잔등을 찡그리고는 마지막 단추를 풀었다. 몸에 알맞게 달라붙어 있던 뻣뻣한 옷이 그제야 풀어지며 맨 안쪽에 입은 슈미즈가 드러났다.

에리히는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얇은 슈미즈만을 걸친 아르사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찬 바람을 견디며 탄탄하게 자라난 몸은 허약한 데라고는 없었다.

목덜미에서부터 어깻죽지까지 강하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선을 내려다보던 에리히는 손에 든 옷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며 몸을 돌렸다.

“비터 자작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국의 여러 귀족들이 흥하고 망하는 과정 속에서 견고한 성처럼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 광산에서 난 은이나 광석을 거래하면서 수없이 많은 기록을 갖고 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누구를 먼저 추적해야 할지를 결정할 예정이다.”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다리가 긴 서랍 속에서 새 슈미즈를 꺼내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엇이죠? 곁에 두고 뻐근한 목이나 주물러 달라고 절 데려오신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사실 그대가 할 일은 이미 끝났어. 신행을 가장하는 게 이번 시찰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 모두가 그대와 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추측하느라 머리가 터져나가겠지.”

“그렇다는 말씀은?”

“너무 눈에 띄는 짓만 하지 않으면 여행이나 즐기도록 해. 그 뻣뻣한 옷을 입고 폐광 관광이라도 가든지.”

33장 신혼…여행 (4)

저녁 만찬에는 과연 거위 요리가 나왔다. 제법 살집이 붙고 크기가 큰 거위를 통째로 바싹 구운 뒤 그 안을 향신료와 볶은 견과류, 찐 곡물과 야채로 채우고 바질과 꿀, 후추를 섞은 소스를 듬뿍 끼얹었다.

황궁의 요리는 담백하다 못해 어딘가 밋밋한 데가 있었는데, 이곳의 음식은 대체로 간이 세고 맛이 다양했다.

자작 내외는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마치 자식들이나 되는 양 거리낌 없이 음식을 권했다. 황제나 황후에게 그토록 딱딱한 예법을 갖추는 것치고는 드문 일이었는데, 나중에야 아르사크는 로즈안나로부터 그것에 네페 특유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페가 번성했을 시절에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나그네나 떠돌이, 거지와 광대, 무희들, 심지어는 도적들까지도 영지 근처를 기웃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영지의 주민들은 그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싸움꾼들도 네페 안에서는 얌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평생 곡괭이와 삽을 지고 광산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득시글거리는 영지 안에서 말썽을 부렸다가는 뼈도 못 추리기 십상인 때문이다.

실제로 네페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광부들이 곡괭이와 삽만 가지고 무장한 도적 떼 수백 명을 쫓아냈다는 둥, 어느 광산을 너무 깊게 파 들어갔다가 그 안에서 잠자던 불을 뿜는 괴물을 마주쳤는데 그것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기어이 무찔렀다는 둥, 그 괴물이 쓰러진 자리가 저 바위 근처라는 둥,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해괴하고 웃긴 전설들이 넘쳐났다.

그것도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었고 네페의 경제는 이제 과거의 풍요로움에 비교한다면 겨울을 코앞에 둔 가랑잎처럼 불안한 지경이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 땅을 사랑했고 또 존중했다.

아르사크는 네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 오랜 전통을 가진 작은 영지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곳의 광산에서는 이제 더 이상 금이나 은 같은 비싼 광물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대지의 신은 네페를 아직 보살펴 주신답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아르사크와 마주 앉은 자작 부인은 손수 우려낸 차를 따라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유목민인 아르사크의 입맛이 맞추어 데운 말젖도 준비해 주었다.

아르사크는 아주 오랜만에 말젖으로 된 음료를 마실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오늘 밤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무슨 의미지요?”

아르사크가 물었다. 자작 부인은 주름진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앉았다.

“근처에 있던 광산 중 여러 곳은 이미 폐광이 되었지만, 몇몇 광산에서는 그래도 아직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광물이 채취된답니다. 물론 은이나 금처럼 단가가 비싸지는 않아도, 영주민들이 먹고살기에는 충분할 테지요. 저나 남편은 곧 클루이트에게 영지를 물려줄 계획이랍니다. 그 아이가 영지를 다스려 나가는 데 너무 어려움이 없도록, 광산을 새로이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네페의 광산은 여전히 건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군요.”

“물론입니다, 마마. 옛날의 영광에는 비할 바 못 된다고 하나, 비터 가문이 건재하고 영지의 주민들이 건재한 이상 네페도 또한 건재하는 것이지요. 이곳의 주민들은 강하고 굳셉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며 폐하와 마마와 그리고 제국에 충성할 것입니다. 저희도 물론, 생명이 다해 에레벤나 신의 품에 안길 날까지 그들과 함께할 것이고요.”

자작 부인이 말했다.

아르사크는 차마 자신은 2년 후에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말했듯 네페의 주민들은 강하고 비터 가문 또한 주민들을 위해 성심을 다한다면, 황후가 아니라 황제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제국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르사크는 네페의 주민들에게서 자신의 부족민들 볼 때와 비슷한 애정을 느꼈다.

“하온데 마마.”

차를 마시던 자작 부인의 목소리가 다소 낮아졌다. 아르사크는 데운 말젖으로 만든 차를 마시다 말고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늙은 여자의 말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들어주십시오.”

“말해보세요.”

“후사는 언제쯤 보실 계획이십니까?”

아르사크는 입에 물고 있던 차를 그대로 잔 속에 뱉어버릴 뻔했다. 겨우 삼키긴 했지만 입가에 흐른 것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로즈안나가 손수건을 내밀기도 전에 손등으로 차를 닦은 아르사크는 당황한 눈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 후사라니… 나와 그, 폐하는… 혼인한 지 아직 반년도 되지 않은…….”

“두 분 모두 육체 건강하시고 젊으시니 혼인한 기간 같은 것은 무의미하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후사는 어서 빨리 보셔야 합니다. 황실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그렇지요.”

“그 문제는…….”

“에레벤나께서는 제국에 수많은 축복을 내려주셨지만, 이상하게도 황실의 자손들에게는 그러지 않으셨어요. 선황께서도 슬하에 두 자녀밖에는 두지 못하셨지요. 에리히 폐하와 유레나 황녀님이셨습니다.”

유레나. 아르사크는 비로소 에리히의 죽은 여동생이라는 황녀의 이름을 알았다.

순간적으로 로즈안나 쪽을 바라본 아르사크는 눈에 띄게 가라앉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왠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유레나 황녀님은… 저도 살아 계실 때 몇 번 뵙지 못한 분이지만 참으로 총명하고 천진난만하신 분이었습니다. 웃으며 뛰어다니시는 것을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분이었지요. 그런 분께…….”

자작 부인의 표정도 로즈안나와 마찬가지로 가라앉았다. 아르사크는 로즈안나 쪽을 다시 한번 흘긋 쳐다보고는 부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가 듣기로… 황녀께선 어릴 적 병을 앓아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남편은 수도에 있지 않았으므로 소문만을 들었을 뿐이지만… 건강하시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더니 온몸에 알 수 없는 반점이 생기고 고열로 앓으셨다 하더군요. 사람들은 전염되는 병이 아닌가 하여 다가가기를 꺼려…….”

“마마.”

로즈안나가 말했다. 자작 부인과 아르사크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로즈안나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이마와 뺨이 하얗게 질린 채 핏기가 없었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

아르사크가 대답하자 로즈안나는 황급히 무릎을 굽히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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