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32장 신혼…여행 (3)
“아가씨의 성함이 로즈라 했습니까?”
클루이트의 말투는 어느 사이엔가 완전히 정중해져 있었다. 어쩌면 아르사크가 평범한 민간의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인지도 몰랐다.
로즈안나는 비터 자작에 대한 것을 잘 알지 못해, 그의 아들인 클루이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힘들었다. 하물며 아르사크야. 황궁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귀족들에게도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는데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 영지의 귀족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네, 그래요. 왜 그러시죠?”
“카툴라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분인지라.”
아르사크의 외모는 어딜 가든 눈에 띄었다. 카툴라의 사람들은 대부분 살성이 매우 희다. 머리색은 그보다 조금 다양한 편이지만 아르사크처럼 흑단처럼 검은 머리는 거의 드물었다.
이질적인 첫인상에서 벗어나 그녀를 꼼꼼히 뜯어보면 총기 있는 눈동자와 기개가 느껴지는 이목구비에 감탄할 수도 있었으나, 대체로 귀족들이란 편견이 심한 인물들이다. 잘해봐야 변방의 유목민치고는 봐줄 만한 모습이라 깎아내리는 정도가 다였다.
“마술이 아니고서야 똑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없는 법이죠. 쌍둥이라면 또 모를까.”
“옳은 말씀이군요. 무례하게 들렸다면 사과하지요.”
외성벽에서 굽어져 들어간 내성의 안쪽을 따라 빙 돌아가니 성의 후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담벼락과 거친 절벽이 바짝 붙어 있어, 마치 돌로 된 산을 깎아 그대로 성채를 지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곳이 후원입니다.”
클루이트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그의 정중한 태도보다도 후원이 마음에 들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목검 여러 자루가 벽에 기대어져 있었고, 검술 연습을 할 때 쓰는 목각 인형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대가 검술을 훈련하는 것인가요?”
아르사크의 질문에 클루이트는 머쓱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매만지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르사크는 다소 뜻밖이라는 시선으로 클루이트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어디로 보나 검술보다는 책이나 붙들고 있을 법한 인물인데. 그러나 목검도 목각 인형도 오랫동안 아껴 사용한 듯, 반들반들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훈련을 했지만 네페에는 검을 잘 다루는 사람이 없어 혼자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어릴 적에 저는 몸이 몹시 허약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남들보다 수십 배는 더 노력하고 싶었지만 건강이 따라주지 않더군요.”
“그대는 형제가 없습니까? 네페의 영주께선 연로하시던데.”
“저는 아버님의 친아들이 아닙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일찍 결혼하셨으나 끝내 자신들의 자손을 얻지 못하셨지요. 저는 세 살 때 양자의 신분으로 네페로 왔습니다.”
아르사크는 가지런히 정리해 둔 목검을 바라보고 있다가 클루이트를 쳐다보았다.
“나와 대련을 한번 해보지 않겠어요?”
아르사크의 말에 클루이트는 물론 로즈안나조차도 놀랐다. 클루이트의 입장에서는 웬 이름밖에 모르는 젊은 여자가 다짜고짜 검을 맞붙여 보자는 데에 놀랐지만, 로즈안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방금 이 성의 영주가 끝내 자손을 보지 못해 양자를 들였다는 것을 뻔히 들었으면서 대를 끊을 작정인가 싶었다.
“아르… 아니, 로즈… 로즈 언니.”
당황하면서도 일단 아르사크의 거짓말에 장단을 맞추고야 만다. 로즈안나는 허둥거리며 아르사크와 클루이트의 눈치를 번갈아 보았다.
“그… 도련님께서는 길을 떠나셨다 막 돌아오신 듯한데, 대련을 하시려면 많이… 피곤하시지 않을까? 언니도 참! 아직도 검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난 괜찮소. 분명 이제 막 돌아오긴 했지만, 아가씨와 대련할 정도의 기운은 남아있으니까.”
로즈안나는 클루이트가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운다고 생각해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본인 목숨을 살려주려고 자기가 얼마나 노력을―안 해도 되는―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클루이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벽 쪽으로 다가가 목검을 하나 집었다.
클루이트는 가죽으로 된 조끼를 벗고 튜닉의 소매를 걷어 단단히 조인 뒤 목검을 집었다.
“로… 로즈 언, 언니, 그만두는 게…….”
로즈안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아르사크를 쳐다봤다.
아르사크는 검의 손잡이를 쥔 채 자세를 잡고 클루이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따로 스승을 두지 못했다는 것이 정말이었는지, 그의 자세는 어딘가 어설퍼 보였다.
사실 검을 쓰는 데에 있어 정확한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황제나 왕을 호위하는 기사나 병사들, 또는 귀족의 자제들이 취미 삼아 배우는 검술은 공통적인 특징을 갖게 마련이지만 그 이외에는 저마다 단련해 나가기 나름이다. 기본적인 자세가 이론으로 정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체격이나 익숙한 움직임에 맞춰 길들여 나가기 나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루이트는 무척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말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작고 근육량은 많은 사람들에게나 잘 맞을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을 치켜든 각도나 높이를 맞추느라 어깨와 허리가 구부정했고 땅을 버티고 선 다리도 불안정했다.
아르사크는 목검의 손잡이를 쥔 손의 모양을 살짝 바꾸었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듯이 앞으로 나갔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목검의 날들이 서로 부딪친 순간 클루이트의 몸이 한 번 비틀거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충격과 놀라움이 뒤엉켜 있었다.
아르사크는 클루이트가 다시 자세를 잡기까지 시간을 주었다가, 그가 오른쪽으로 목검을 휘두른 순간 몸을 숙여 아래로 빠지며 무릎 뒤쪽과 옆구리를 차례로 쳤다.
클루이트의 한쪽 무릎이 땅바닥에 닿자, 아르사크는 검 끝으로 그의 목 뒤쪽을 겨누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비효율적으로 싸우는군요.”
“…아가씨는 대체… 뭡니까? 이야기책 같은 데에 나오는 여검사인가요?”
클루이트가 몸을 일으켰다. 아르사크보다 거의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키다.
병적으로 창백한 뺨이 상기되어 있는 것을 올려다보던 아르사크는 그의 옆으로 나란히 서면서 시범을 보이듯 목검을 쥐었다.
“당신처럼 키가 큰 사람들은 검을 쓸 때 너무 짧게 쥐면 안 돼요. 손과 손 사이를 좀 더 넓히도록 해요. 그리고 검날의 폭이 너무 좁은 것은 쓰지 않는 게 좋겠군요.”
클루이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르사크가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아르사크는 잠깐 사이에 클루이트에게 발을 내딛는 방법, 그의 큰 키를 활용해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 같은 것을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어정쩡하던 자세가 몇 번 반복하자 안정적인 자리를 찾고, 목각 인형과 목검이 부딪치며 딱!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을 때 클루이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때릴 때의 느낌이 다른 걸 알겠어요?”
아르사크가 물었다. 클루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로즈 아가씨, 당신이 내…….”
클루이트가 아르사크에게로 한 걸음 다가선 순간이었다. 그들이 지나왔던 내성의 모퉁이를 돌아 비터 자작과 에리히,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시종 일행의 모습이 나타났다.
“클루이트, 돌아왔느냐? 왜 알리지 않은 거냐?”
자작은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클루이트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수도나 황궁에 자주 드나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의 얼굴까지 모를 만큼 무지한 시골 귀족은 아니었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클루이트는 아버지의 눈치를 받고서야 황급히 에리히에게 인사를 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성으로 들어오던 도중 여기 이 아가씨를 만나…….”
“클루이트!”
자작이 황급히 외쳤다. 클루이트는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놔두시오, 자작. 자작의 아들이 무례하여 그런 것이 아니오.”
에리히가 말했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완고한 비터 자작은 이미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황후 마마께 무슨 무례냐!”
그제야 클루이트는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근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외견의 낯선 이방인, 심지어 능숙하게 검을 다루는 이 아가씨가 화제의 황후임을 비로소 알아챈 것이었다.
“에레벤나의 보호를 받으시고 모든 축복과 질서를 다스리시는 황후 마마께 인사를 드리나이다.”
클루이트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모처럼의 흥이 깨진 것이 불만인 것 같긴 했으나, 정중한 태도로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마마, 아들이 부족하여 결례하였으니 용서하십시오.”
“내가 대련을 청한 것이니 결례한 것도 없소.”
목검을 내려놓은 아르사크는 손등으로 이마께에 돋은 땀을 가볍게 훔쳤다. 황후가 아니라 끄트머리 귀족의 영애만 되어도 결코 하지 않을 짓이다.
엉겁결에 아르사크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려던 클루이트가 에리히와 눈을 마주치고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로즈안나는 클루이트의 오늘 밤 꿈자리가 몹시 뒤숭숭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잘하는 짓이군.”
황제 부처를 위해 따로 마련된 방은 호화롭지는 않아도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 별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주인의 섬세한 손길을 받았음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가구들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아르사크와 에리히 사이에 뭔가 낭만적인 기류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외마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내뱉은 에리히는 긴 소파의 끝에 걸터앉으며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며 머리를 묶고 있던 리본을 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이제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신행을 온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외간 남자와 웃고 떠들었으면서 남편 앞에서 옷 갈아입는 게 부끄럽다면 그거야말로 말이 웃을 일이지.”
“영지를 이어받을 후계자에게 마땅히 필요한 호신술을 가르치는 것이 순식간에 ‘웃고 떠든다’는 일로 전락하다니, 제국의 남자들은 참으로 질투가 흔하군요. 하긴 황궁을 드나드는 귀족들도 치졸함을 장신구처럼 걸고 다니긴 했지만.”
독설을 주고받으면서 아르사크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풀어 내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와 등 위로 폭포처럼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