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잘 오셨습니다, 폐하. 그리고 황후 마마.”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자작도, 그리고 부인도.”
“결혼식이 있다는 통지는 받았으나 늙은 몸이 지쳐 미처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됐소. 공연히 먼 길을 오가다 병이라도 나면 영지민들이 큰일이지. 아직은 자작의 관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들은?”
아들이 있었구나. 아르사크는 이 노인들에게도 자식이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안심이 되어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심부름을 보냈는데 저녁 중으로는 돌아올 것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자작의 안내를 받아 성으로 들어간 아르사크는 규모에 비해 단단하게 지어진 성의 모양에 조금 놀랐다. 주로 석재로 벽을 쌓고 기둥을 세웠고 장식을 최소한으로 한 듯싶었는데, 묵직하지만 잘 다듬어진 석벽을 보다 견고하게 보이게 해주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와 다른 별실로 안내를 받았다. 옷을 갈아입거나 단장을 할 수 있도록 따로 준비된 방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자작 부인이 집주인으로서, 또한 아랫사람으로서 아르사크의 첫 시중을 들어야 했지만 아르사크는 로즈안나로도 충분하다는 말을 완곡하게 전달했다.
“오늘 저녁에는 자작 부인의 시중을 물리치시면 안 됩니다.”
말을 타고 오느라 흐트러진 아르사크의 머리를 다시 빗겨주며 로즈안나가 말했다.
“로즈… 꼭 그래야 해? 나이가 많은 분이잖아. 토르갈에서는 절대로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의 시중을 들지 않아. 보살펴주기는 해도 말이야.”
“토르갈에서는 황족과 귀족, 그리고 평민이나 천민들이 각자 나뉘어 있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국에서는 계급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로즈안나는 매끄럽게 빗어 내린 아르사크의 머리를 움직이기 편하도록 틀어 올려 묶어주었다.
귀찮다고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것을 붙잡아 공을 들여놓은 머리카락은 이제 더 이상 처음 만났던 날의 그 뻣뻣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보기만 해도 탐스러운 윤기가 흘러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모래바람에 거칠어진 부분을 상당량 잘라내서 그런지도 몰랐다.
“계급처럼 의미가 없는 게 또 있을까.”
정리된 머리를 매만지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로즈안나가 애매한 미소만 띤 채 빗과 장신구를 치우는 사이, 아르사크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 그 인사는 뭐야? 그렇게 거창한 인사는 처음 들어보는데.”
“원래대로라면 귀족들이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배알할 때 그러한 인사를 올리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선황께서 딱딱한 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이셔서, 진심 어린 예의만 갖춘다면 인사의 형식은 자유롭게 해도 좋다고 명령하셨다고 해요. 비터 자작과 자작 부인께선 연로하신 분들이고 또 원리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라 그러신 것 같습니다.”
“에레벤나라는 건 또 뭐고?”
“제국에서 모시는 신의 이름 중 하나입니다. 아르사크 님, 옷은 갈아입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말을 타고 왔으니 땀을 흘렸을 법도 한데 아르사크는 상쾌해 보였다. 하긴 출발할 때 입었던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는 벌써 갈아입었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내내 튜닉 바람이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르사크가 더 이상 코르셋을 입지 않겠다고 내던진 이후, 로즈안나는 틈만 나면 아르사크에게 제발 옷을 갖춰 입으시라 부탁도 해보고 애걸도 해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자꾸 그런 소리를 하면 로즈, 너도 그 답답한 속옷을 입지 못하도록 할 거야. 넌 황후의 측근이니까, 당연히 황후의 차림을 같이 따라야지.”
그렇게 윽박지르는 시늉까지 했던 것이다. 차라리 맨발로 정원을 걸으면 걸었지 코르셋 없이는 절대로 남들 앞에 나갈 수 없다는 로즈안나의 단호한 태도 때문에 아르사크도 더는 밀어붙일 수 없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속옷에 뭘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핀잔하긴 했지만, 뼛속 깊이 자리 잡은 관습을 하루아침에 벗어던지기에 로즈안나는 너무나 보수적이었다.
간단한 단장을 마친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와 함께 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자작 부인은 무릎과 허리가 불편해 오래 걸을 수 없다고 하여 둘만 나가게 되었다.
아르사크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명색이 시찰이었으므로 아르사크 역시 궁에서나 입던 호화로운 복장보다는 움직이기 편하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좋은 옷을 입었다. 진짜 민간에서 입는 옷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옷감이었지만 모양만큼은 그럴싸했다. 게다가 편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뭘 해서 먹고사는 거지?”
마을 길을 둘러보며 아르사크가 묻자, 로즈안나는 사방을 휘 둘러 솟은 산봉우리들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네페 영지는 아주 옛날부터 은을 많이 채굴하였다고 합니다. 이 주변의 산맥을 따라 은을 캐는 광산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해요.”
“그런 것치고는 규모가 아주 작은데?”
“비터 가문은 오래전부터 굉장히 완고한 면이 있어서, 광산에서 채굴되는 양의 상당수를 황실에 바쳤을 뿐 본인들의 이익을 도모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지의 주민들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정도의 양이면 충분하다는 것이었겠죠.”
기후가 드센 곳은 사람들의 생활이 팍팍해지기 일쑤이므로 활기보다는 악착같은 생활력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네페 영지에 들어오면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매일을 겨우 살아내는 팍팍함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그 점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도 이곳은 광산에서 나는 은으로 먹고사는 건가?”
“이전에 비하면 규모는 크게 줄어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선황께서 살아계실 때 네페의 세금을 대폭 감면해 주셨는데, 그 후로 소규모의 은과 광석을 채굴해서 영지를 꾸려나가고 있지요.”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의 말을 듣고서야 처음으로 선대 황제와 에리히가 제국을 운영해 나가는 방식이 서로 무척 다르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드문드문한 정보를 종합해 보면, 선대 황제는 무척 온건하고 아량이 넓은 정책을 많이 펼친 인물이었다.
반면 현재 황제의 자리에 있는 에리히는 아버지와 달리 귀족들을 물 샐 틈 없이 쥐어짜며 냉정하고 가혹한 형태로 정치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왜?’
그러한 차이에서 오는 의문은 많았다. 선대가 어지간히 나라를 말아먹지 않는 이상, 그다음 세대의 황제는 대체로 선대가 닦아놓은 길 위를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에리히는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길도 없는 곳으로 새로 길을 트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귀찮고 힘든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처럼 귀족들과 척을 지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까딱 잘못하면 내란의 불씨를 당길 수도 있었다.
‘그자가 그런 것도 모르고 자존심만 세울 만큼 멍청하지는 않은데.’
아르사크가 속으로 생각했다. 더불어 그토록 온화한 정책을 많이 펼친 황제가 토르갈의 절박한 요청을 묵살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지금까지는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마차 안에서 에리히와 나눈 대화를 곱씹다 보니 뭔가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아르사크를 따라다녔다.
“아르사크 님?”
“왜?”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이셔서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아무것도 아냐. 광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로즈안나는 그 말을 쉬이 믿었다. 아르사크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뒤부터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안색을 살피며 다른 귀부인들을 대하듯 이중 삼중으로 그 속내를 간파하려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아르사크 앞에서 잔꾀를 부리는 것이 통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르사크 역시 고민거리나 불만을 꽁하게 숨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만약 아르사크가 뭔가를 숨기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손댈 수 없는 영역이라는 의미였으므로 캐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길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아르사크와 로즈안나는 그러지 않고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어린 듯, 젊은 듯,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청년이 말을 타고 오다가 길에 선 아르사크를 보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못 보던 얼굴인걸.”
다짜고짜 반말을 던지자 아르사크보다 로즈안나가 더 먼저 놀랐다. 황급히 앞으로 나서려는 로즈안나를 막은 아르사크는 왠지 흥미가 인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건 이쪽에서도 똑같이 할 말인데.”
아르사크가 대답했다. 청년은 눈썹을 찡그린 채 아르사크를 내려다보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그리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정성 들여 만들었다는 흔적이 엿보였다. 영주가 말했던 아들임이 분명했다. 그는 아르사크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외부에서 온 자인가?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그대는 아마 비터 자작의 아드님이시겠군요.”
남자의 갸름한 뺨이 살짝 움씰거렸다.
“그렇소. 이 영지를 다스리는 내 아버님이 바로 비터 가문의 수장이시며 나는 그분의 독자인 클루이트요.”
“나는…….”
아르사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황후라는 것을 여기서 밝혀버리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이다.
클루이트라는 이름의 청년은 얼핏 허약한 책상물림처럼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눈빛이 무척 신중했다. 어디로 보나 민간인처럼 차린 아르사크와 로즈안나를 보고서 갑자기 어투를 바꾼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눈치도 있었다.
“제 이름은 로즈입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인 안나이고요.”
아르사크의 말에 옆에 있던 로즈안나, 앞의 것은 떼어버리고 졸지에 ‘안나’가 된 로즈안나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입을 벌렸다.
그러나 클루이트는 아르사크와 로즈안나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었다.
“자매치고는 많이 닮지 않았군요.”
“족보가 좀 복잡하여.”
“재미있는 아가씨군. 그럼 네페에 온 것을 환영하며 성 주변을 안내해 주고 싶은데 어떻소? 성의 후원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으니 염려 말고.”
“그러지요.”
클루이트가 말고삐를 쥔 채 말을 끌고 앞장섰다.
로즈안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아르사크는 입 모양으로 ‘괜찮아’라고 말하고는 그를 뒤따랐다. 로즈안나는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