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제 위로는 오빠들이 둘 있었지만 둘 다 어려서 죽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 얼굴도 본 적 없죠. 어머니도 제가 네 살 때 돌아가셨고요. 제 아버님의 유일한 혈육은 저였고, 제게도 아버님이 전부였습니다.”
에리히는 문득 아르사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르사크가 다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대의 부친과 선황의 관계가 돈독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버지는 더욱더 좌절했을 것이다.
젊은 황제에게는 경쟁 상대가 될 만한 형제가 둘 있었다. 스무 살 남짓한 나이의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형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야합을 하여 내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지략가였지만, 기습을 당한 데다 사병들의 머릿수를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때까지 얼굴도 몇 번 본 적 없던 토르갈의 젊은 족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부족 내에서는 제국의 황위 다툼에 끼어들 의리까지는 없다는 의견도 많았으나 족장은 결국 오랫동안 명분뿐이었던 동맹의 이름을 지켰다. 당시만 해도 세력이 상당했던 토르갈의 기마대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사병들을 몰아냈고 황제는 무사히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대도 나도 태어나기 전의 일이지만.”
“압니다. 이후 선황이 몇 번이나 토르갈을 방문했었다는 사실도 들어 알고 있고요.”
“그래?”
“네, 하지만 제가 태어난 후로는 온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에리히의 눈빛이 묘하게 술렁였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데?”
“아버님께서요. 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오는 큰일이 있었다면 분명 기억을 하겠지요.”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지. 스스로의 기억력을 너무 맹신하는 건 아닌가?”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폐하?”
아르사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가 또다시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한담이나 나누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 타는 듯한 분노를 영원히 잊는 것은 불가능했다. 병에 걸리지 않았고 죽지 못했기 때문에, 죽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악착같이 살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아버지와 자신의 대에서 멸족하는 일이 없도록. 그랬기 때문에 아르사크는 살아가는 순간마다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새롭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는 모두 과거의 일이 되었고, 부족민이 새로운 살길을 도모해 다행히 정착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는 에리히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그 숱하던 죽음과 맞바꿀 수는 없었다.
토르갈은 사소한 배신이라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르사크가 제국을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눈동자가 맹렬한 불처럼 이글거리는 것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았다. 아르사크가 과거의 일로 난동을 피운다고 해도, 보상하지 않으면 심장에 단도를 박아버리겠다 협박해도 에리히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무척 복잡하고 명료하게 정의하기 힘든 감상이었다. 대체로 그의 성정이 오만하고,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다는 뻔뻔함에서 비롯되는 감상이지만 그 이외에 또 다른 것들이 있었다. 너무 희미해서 당사자인 에리히조차 확실히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이를테면 죄책감과 같은 감정이 그러했다.
“황제는 보통 시찰을 떠날 때 목적에 따라 잠행을 하기도 하지. 지금 그대와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요?”
“그러니 그대가 태어난 후에 선황이 토르갈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해도 그대는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단 이야기지. 잠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니까.”
에리히의 말은 아르사크를 자꾸만 과거로 끌고 갔다. 마치 어렸을 때, 말고삐에 잘못 매달렸다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 하염없이 끌려가던 그런 기분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발굽에 머리를 밟혀 죽을 뻔한,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한 사고였다. 다행히 지나가던 목동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돌아와서는 아버지에게 심하게 혼이 났다. 두 번 다시 말을 타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려졌지만 아르사크는 그다음 날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말을 탔다.
말을 타고 달리면 세상이 자신의 것인 양 신이 났다. 끝도 없이 아득한 지평선 너머를 보면서 머리 위를 휘도는 매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 어린 아르사크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일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전염병은 그만큼 끔찍한 기억이었다. 병이 돌기 시작한 이후, 토르갈에는 웃고 떠들기는커녕 숨을 크게 쉴 수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비옥하지는 않아도 충만하고 기상이 넘치던 땅이 병들어 막막히 스러지기까지, 평범하던 마을이 끝없는 통증과 죽음으로 침묵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부족에 병이 돌기 전, 제가 어떤 생활을 했으며 어떤 것들을 즐거워했는지도요. 그만큼 끔찍한 일이었으니까요.”
에리히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아르사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선황은 에리히가 어릴 때 그를 데리고 토르갈에 잠행을 갔었다. 그때가 아마 에리히가 열세 살쯤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선황은 이미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어쩌면 두 번 다시는 친구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무리를 하면서도 토르갈에 갔었는지 모른다.
아르사크는 열 살의 소녀였다. 또래의 소녀라고 해봐야 어른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얌전하고 우아한 귀족의 딸들만 보아 온 에리히에게 아르사크의 존재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머리는 다 풀어 헤친 채 안장도 없이 말을 달리고 동네 꼬마들을 죄다 몰고 다니며 대장 노릇을 했다.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였던 선황은 아르사크가 씩씩한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였더라면 제국으로 불러 최고위 기사직을 수여하고 장군으로 삼았을 거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에리히가 하필이면 아르사크를 선택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볼핀과 홀드빅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이 세력을 뻗칠 수 없는 곳의 사람을 골랐다는 것을 알고 있는 테오도르조차, 왜 하필 토르갈의 아르사크여야만 했는지는 끝내 알지 못했다. 단지 선황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명목상으로는 그랬지만, 에리히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아르사크가 그때 자신을 만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얄팍한 추억이나 친분을 발판 삼아서라도 계획의 성공을 앞당길 수 있으리라 계산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아르사크의 언행에 신경을 바짝 기울였지만, 아르사크에게서는 에리히를 기억하고 있다는 어떤 신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과거를 보상해 주겠다 해도 그대는 듣지 않겠지.”
“오만하시군요. 과거를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폐하.”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가 사술(邪術)이라도 배워 죽은 사람을 모두 살려내지 못하는 이상, 그리고 아르사크가 기억하는 끔찍한 일들을 모두 다 지워주지 못하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에리히는 굳이 아르사크에게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토르갈 부족민이 병으로 죽어 나갈 때, 자신은 도움을 요청했던 것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때는 숙부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고 말해봐야 그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평가대로 오만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순순히 머리를 숙일 그런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마차가 서서히 멈췄다. 아르사크는 의아한 표정으로 에리히를 보았다.
“왜 마차가 멈췄죠?”
에리히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문을 열며 말했다.
“말 타는 걸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숲의 경계였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서 미리 마차를 멈추라는 지시를 했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잠깐 에리히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마차를 나섰다. 바깥바람이 상쾌했다.
테오도르가 말을 두 필 끌고 왔다. 아르사크는 말 위에 훌쩍 올라타려다 말고 안장을 한번 쳐다보았다. 귀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그런 안장이 아닌, 기마대의 기수들이 사용하는 안장이었다. 그것을 좀 더 고급스럽게 마감했을 뿐이다.
아르사크는 부드러운 가죽을 한번 쓸어보다 픽 웃으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말에 올랐다.
“처음으로 가게 될 곳은 어디죠?”
“네페 영지다. 비터 자작이 다스리고 있지.”
“그곳도 세금이 착실하게 빠져나가는 물길인가요?”
“아니, 그 반대야. 비터 가문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한 황제의 간섭 같은 건 필요 없는 곳이지. 하지만 첫걸음에는 조언을 구해야 하니까.”
에리히가 말을 몰기 시작하자 멈췄던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아르사크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다 눈을 감고 바람을 만끽했다.
31장 신혼…여행 (2)
네페 영지는 사방이 험준한 골짜기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겹겹이 깊숙한 계곡이 한참이나 이어지는 길을 따라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다 보니 난데없이 우묵한 평지가 나타났다.
누군가 빵을 반죽하다가 그 가운데를 주먹으로 꾹 눌러놓은 것처럼 안으로 쑥 들어간 그곳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손톱을 세우고 달려든다 했다.
그러나 영지의 경계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르사크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은 것을 보았다. 살아가기 쉽지 않은 환경일 텐데도 불구하고 움직임에 활력이 넘쳤다. 비터 자작이 이곳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표였다.
“에레벤나의 은총을 받으시고 모든 법과 군중 위에 군림하시는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나이다.”
비터 자작 부처는 몹시 나이가 많았다. 아르사크는 황궁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던 낯선 인사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떤 귀족도 아르사크는 물론 에리히 앞에서도 이렇게 정중하고 긴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레벤나의 보호를 받으시고 모든 축복과 질서를 다스리시는 황후 마마께 인사를 드리나이다.”
황제에게 먼저 인사를 한 자작과 자작 부인이 이번에는 아르사크를 향해 인사했다.
아르사크는 얼떨떨했지만 그 거창한 첫 만남에 대답은 딱히 필요치 않았던 듯, 굽혔던 허리를 펴자마자 그들은 마치 평범한 노부부와 다를 바 없는 온화하고 밝은 표정으로 아르사크와 에리히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