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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43화 (43/191)

43화

***

그토록 무서워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루이제는 결국 마구간 향수 사건이 있은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시 아르사크를 찾아왔다.

솔직히 말해 루이제가 또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아르사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루이제는 방으로 들어왔을 때 아르사크의 차림새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황급히 감탄하는 척 목소리를 꾸며보았지만 그런 얄팍한 수가 통할 리 없었다.

“마, 마마……?”

귀족 가문의 사랑받는 막내딸로 태어나 평생 가문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본 적 없던 루이제에게 아르사크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루이제가 찾아오기 직전까지 훈련하는 기마대의 기수들 사이에서 한바탕 말을 달리고 온 아르사크의 꼴은 루이제의 기준에서는 처참할 지경이었다.

머리는 다 풀어져 산발인 데다 입고 있는 옷도 병사들이 잘 때나 입을 법한 것이다. 그런 몰골을 하고서도 아르사크가 너무나 태연자약한 바람에 오히려 루이제 쪽이 이상한 민망함을 느껴야 했다.

‘정신 나간 여자인가 봐! 저게 무슨 꼴이야, 민간의 농사꾼도 아니고!’

루이제는 이 소문을 퍼뜨려야겠다 단단히 작정을 했다. 황후가 저토록 흐트러진 꼴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분명히 큰 수치가 될 테지. 그녀는 아버지인 자작의 뜻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방인이 황궁의 가장 중요한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데에 적잖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이 증명된다면 아버지를 비롯한 중앙 귀족들은 폐하께 탄원을 올릴 것이고 아르사크는 쫓겨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알아낸 자신에 대해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루이제의 한계였다. 그녀가 힐데트로스의 반만큼만 교활하거나 영리했더라면 이미 아르사크에게 실질적으로 타격이 될 만한 수많은 가십거리들을 만들어내고도 남았으리라.

아르사크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루이제를 공들여 경계하지는 않았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루이제가 아버지의 큰 그림을 스스로 알아낸―그렇다고 믿는― 사실에 혼자 감탄하는 사이, 아르사크는 엉망이 된 머리를 다듬고 옷을 갈아입고 루이제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든 루이제는 썩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은 일이 있나 보지?”

흥얼거리듯 콧소리까지 내던 루이제는 아르사크의 말에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새침하게 헛기침을 했다.

“오늘은 마마께 드릴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가 선물을 주고받을 사이였던가? 몰랐는걸.”

“마마, 이렇게 표현하면 존귀하신 황후 마마의 심기가 언짢으실지 모르나 교양을 쌓고 예절을 갖추어 만나는 자리에서 그런 표현은 무척 실례가 된답니다.”

마치 일곱 살짜리가 다섯 살짜리에게 인사는 공손히 해야 한다고 뻐기며 가르치는 듯한 말투였다.

아르사크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는 시늉을 하고서 기지개를 쭉 켰다. 그 순간 아르사크를 힐끔 쳐다보았던 루이제는 또 한 번 경악했다. 아르사크가 드레스 밑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르셋만 입지 않은 것이고 슈미즈와 이너 드레스는 전부 갖춰 입었지만, 루이제에게 있어 속옷을 하나라도 빼먹었다는 것은 아예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물을 준다더니 표정은 왜 그렇지? 어디다 흘리고 오기라도 한 거야?”

“아, 아닙… 아닙니다. 그, 저기… 이것을…….”

루이제는 가지고 온 상자를 황급히 내밀며 아르사크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마치 그녀가 발가벗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아르사크는 루이제가 내민 상자의 외관에 가볍게 감탄했다. 넝쿨과 잎사귀를 섬세하게 조각해 테두리를 장식하고, 매끈하고 평평한 뚜껑의 맨 윗부분에는 매끄러운 돌을 댄 뒤 세 송이의 꽃을 그려 놓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꽃은 물감이나 염료로 그린 것이 아니라 색깔이 서로 다른 돌들을 교묘하게 꽃송이 모양으로 짜 맞춘 것이었다.

“아주 훌륭한 상자로군.”

“그… 그럼요. 그 상자는 바다 근처에 있는 디산티아에서 만들어진 최상품이라고요. 디산티아는 바위산이 많고 산 아래 광물이나 독특한 암석이 많기로 유명한데 한때 카툴라가 광산업으로 전성기를 이루었을 때도 디산티아에서 생산되는 아름다운 광물들 때문에 무역에서 불리할 때가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 그럼 이 상자를 내게 주는 건가?”

“열어보셔야죠. 마마도 참.”

이젠 아주 친구 사이나 되는 양 토를 단다. 아르사크는 이 종잡기 힘든 변덕쟁이 아가씨가 기가 막혔지만 또 무슨 짓을 꾸미는지 구경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상자를 연 아르사크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안에 든 것은 너무 요란하게 번쩍거려서 오히려 가짜가 아닌가 싶은 루비 브로치였다.

“이걸 왜 나에게 주는 거지?”

“그거야… 마마를 위한 제 성의입니다.”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지만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루이제만 모르는 듯했다.

아르사크는 물론이거니와 로즈안나까지도 그 말을 믿지 않는데 루이제는 진지했다. 누군가에게 접근하려면 일단 눈을 사로잡을 만큼 호화로운 물질을 건네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물론 루이제의 꿍꿍이를 어느 정도 알아채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르사크는 상자의 뚜껑을 도로 닫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제의 성의니 고맙게 받도록 하지.”

“영광입니다, 마마.”

“마침 폐하와 내가 한동안 여행을 갈 예정이었는데, 이 브로치를 달고 다녀야겠어.”

아르사크가 말했다. 루이제는 이거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리라는 듯이 파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여행을 가시다니요? 두 분이… 함께?”

“그래, 왜? 폐하와 나는 이제 부부가 되었는데, 함께 여행을 가지 못할 이유가 있나?”

부부라는 말이 심기에 거슬렸지만 루이제는 필사적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느닷없는 일이 아버님에게 기회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민간에서도 여윳돈이 조금 있는 사람들이라면 혼인을 한 후 의례적으로 여행을 가곤 했다.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일생 단 한 번인 신혼여행을 위해 별장까지 따로 짓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황제 부처가 신혼여행을 간 예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아버님은 폐하께서 이 여자를 싫어한다고 하셨는데…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몰라.’

“신혼여행을 가시는 거군요. 축하드려요, 마마.”

루이제가 말했다. 갑자기 지어낸 것치고는 무척이나 해맑은 표정이었다. 역시 요정같이 생긴 외모가 이럴 때는 빛을 발한다.

뭔가 꿍꿍이가 있음을 숨기지도 못하는 딱한 천진난만함을 빙긋이 웃어넘기면서, 아르사크는 그 신혼여행이 사실은 탈세범을 잡기 위한 지방 시찰이라는 것을 티 내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30장 신혼…여행 (1)

길을 떠나는 날은 썩 쾌청하지는 않아도 서늘해서, 여유롭게 말을 몰기에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하지만 신행을 가장한 여정인지라 아르사크는 에리히와 함께 마차에 타야 했다. 아르사크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짓자, 에리히는 삐뚜름하게 턱을 괸 채 비웃듯이 말했다.

“납치당해 실려 갈 때도 그런 표정은 안 지었을 것 같은데. 이 마차는 그것보다는 편할걸.”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폐하. 납치당해 실려 갈 땐 언제고 마부들을 두들겨 팰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싫을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말은 지금 날 두들겨 팰 수 없어서 그런 표정이라는 건가?”

아르사크는 대답하지 않고, 마치 조신하고 순종적인 아내처럼 방긋이 웃기만 했다. 그편이 훨씬 에리히를 열불 터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싫든 좋든 마차는 타야 했다. 황제와 황후의 신행도 민간의 신행과 마찬가지로 혼인을 치른 그 즉시 떠나게 되어 있긴 하지만 가든 말든 재량껏 결정할 수 있었다.

원래 에리히도 아르사크도 신혼여행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 여태까지 미뤄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후작이 추방됨으로써 혼란해진 귀족 세력들과 세금 문제, 새로 시작하는 개간 사업 같은 것을 조율하느라 실제로 여유가 없긴 했다.

황제 부처가 탄 마차가 출발하자 줄줄이 서 있던 어린 시동들이 관례대로 길 위에 파란 꽃을 뿌리기 시작했다. 아르사크는 정교하게 짠 레이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꽃을 뿌리고 있는 거죠?”

마치 커다란 빗방울이 내린 자리에 그대로 물이 고인 것처럼 동그랗고 파란 꽃송이를 보며 아르사크가 물었다. 에리히는 팔짱을 낀 채 반대쪽 창가를 내다보며 말했다.

“수레국화다. 황제와 황후가 신행을 떠날 때는 항상 저 꽃을 뿌리지.”

“왜죠?”

“저 꽃은 행복한 인생을 상징하니까.”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커튼을 닫았다.

“토르갈에서는 혼인을 할 때, 신랑이 아주 멀리서부터 손이 묶인 채 말을 타고 오죠.”

“그건 포로를 데려갈 때나 하는 것 같은데.”

“그렇기도 하고요.”

생각만 해도 괴상한 광경이었다. 에리히는 잠깐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다보다가 아르사크 쪽을 돌아보았다.

“이해가 안 되는 풍습이군. 그러는 이유가 뭐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죠. 신랑이 신부를 만나러 오면, 신랑은 그제야 묶였던 팔을 풀고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신부를 안아서 밖으로 나오지요. 이제부터 신랑의 팔은 신부를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해서만 쓰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팔이 묶인 채로도 말에서 휘청거리거나 떨어지지 않음으로써 튼튼하고 강인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유도 되고요.”

아르사크는 이따금 구경할 수 있었던 혼례 날을 떠올렸다. 혼례는 큰 행사였으므로 부족 전체가 며칠 동안 흥성거리고 들뜨는 일이었다.

가축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느라 신랑과 신부의 집에서는 며칠 내내 음식을 만드는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 어딜 가나 맛있는 것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종종 배탈이 나기도 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은 없었나?”

에리히의 질문에 아르사크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어째서지? 족장의 딸이라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정혼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경우도 있지만, 제 아버님은 너무 어린 나이에 정혼자를 정하는 걸 꺼리셨습니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겨 상대방이 죽거나 아프면 큰일이니까요.”

“금지옥엽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보군.”

이제야 알았냐는 듯, 아르사크는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곧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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