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다행히 소금 기둥 신세를 면한 로즈안나를 데리고 아르사크는 일전에 한 번 가본 일이 있는 동쪽 사냥터로 향했다. 에리히와 테오도르도 함께, 따르는 시종들은 소수였다.
말을 탄 아르사크의 어깨에 천연덕스럽게 올라앉은 소르흐는 날개를 접고서도 노란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무슨 수로 사냥 연습을 시킬 거지?”
에리히가 물었다. 아르사크는 뒤따르는 시종들을 흘긋 쳐다보고 말했다.
“저들이 숲에서 꿩을 찾아내어 놀라게 하면 됩니다.”
“매가 사냥하는 것은 본 일이 없군.”
“굉장히 빠릅니다. 본다면 놀랄걸요.”
“일전에 날려 보냈다 되돌아올 때도 꽤 빨랐지.”
“그건 걸음마 수준이고요.”
아르사크 일행은 나무들이 울창한 곳까지 다다라 말을 멈추었다. 아르사크는 시종들에게 조개껍데기처럼 생긴 나무 조각이 매달린 막대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숲 곳곳으로 흩어지도록 했다.
“꿩을 발견하면 막대를 세게 흔들어.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가 나면 꿩이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할 거야.”
시종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명령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허둥지둥 곳곳으로 흩어졌다.
사슴이나 다른 동물에 비해 꿩이나 토끼 같은 조그만 동물들은 비교적 그 수가 많았으므로 찾는 것이 별로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재미있어 보였는지, 로즈안나조차도 막대를 들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아르사크는 소르흐를 날려 보내어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앉도록 했다.
“대체 이건 어디서 난 거야?”
나무 조각이 달린 막대를 집어 들며 에리히가 물었다. 그가 막대를 흔들자 입을 벌린 조개껍데기처럼 생긴 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며 크게 딸깍대는 소리가 났다.
“직접 만들었습니다.”
아르사크가 나무 위에 앉은 소르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대답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막대 끝에 매달린 나무 조각을 바라보았다.
대단히 정교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 개도 아니고 몇 개씩이나 직접 만들었다기에는 손이 남아나기나 했을까 싶은 정도의 솜씨다.
“별걸 다 하는군. 어릴 적 꿈이 목수였던 건 아니겠지?”
“그러는 폐하는 어릴 적 꿈이 꿩 몰이꾼이셨나 보죠?”
에리히의 눈썹이 삐죽이 치솟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제게 사냥을 시키시려고 일을 벌이셨으니까요.”
그때,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첫 소리가 났다. 이윽고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죽은 듯이 앉아 있기만 하던 소르흐가 날개를 퍼덕이며 갑작스럽게 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공중으로 치솟았던 새의 몸뚱이가 재빠르게 활강하며 불규칙하게 자라난 숲 사이를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르사크는 에리히를 내버려 둔 채 소르흐가 날아간 곳을 향해 달렸다. 넝쿨과 가지가 부딪히는 소리,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 위협하듯 길게 우는 소리가 잡힐 듯 말 듯 멀어졌다.
소르흐와 함께 돌아온 아르사크의 손에는 죽은 꿩이 거꾸로 들려 있었다. 사냥을 마친 소르흐는 날카로운 부리를 연신 딸깍거리며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흥분을 표시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눈앞에 보란 듯이 꿩을 들어 보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에리히는 숨이 끊어져 늘어진 꿩과 아르사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작 꿩 몰이꾼이라니. 난 그대를 이용해 사냥을 했으니 말하자면 매의 주인이지. 그대가 사냥을 한 매라면 그걸 길들인 내가 그대의 주인인 셈이겠군.”
“착각이 심하시군요. 제가 폐하를 위해 기꺼이 사냥에 동참해 드린 것이겠죠. 폐하께서 나를 길들여 이용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하긴 난폭하니까.”
“알면 말씀을 좀 더 조심하시는 게 좋겠군요.”
얼굴을 안 보면 괜찮다가도 마주치면 반드시 싸운다. 소르흐에게 호되게 혼이 났던 적이 있는지라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이 대화하는 소리만 듣고 있던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29장 접근 (5)
사냥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안색이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아는 체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속에 담아둘 리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약간 짓궂은 심술도 있었다.
그러나 아르사크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듯하자 더는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뭐가요?”
눈에 띄게 질린 얼굴에 비해 되묻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에리히는 이상하다는 듯이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가 햇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얼굴이 창백한데. 말 못 할 용무가 급한 거라면 모른 척해주지.”
“이 망할 코르셋을 당신 머리에 뒤집어씌우기 전에 닥쳐요.”
누군가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아르사크와 에리히 둘 다 그 소리를 들었지만 양쪽 다 반응을 하지 못했다.
아르사크는 돌덩이로 만든 갑옷이 가슴부터 내장이 있는 데까지를 전부 짓누르는 것 같아 숨이 막히기 일보 직전이었고, 에리히는 태어나 처음으로 들은 노골적인 욕설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방금 뭐랬지?”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물으시는 건가요?”
아르사크는 그때까지도 얼떨떨한 에리히를 내버려 둔 채 궁 앞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렸다. 아까 에리히의 서재에 갔을 때부터 이상하게 속이 쑤시고 답답하다 싶더니 깊은숨을 쉬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이상을 감지한 로즈안나가 다급하게 아르사크의 뒤를 따라가는데, 에리히까지도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아르사크가 ‘닥치라’는 말을 한 순간 숨을 들이켠 장본인이었던 테오도르는 오늘이야말로 둘 사이에 유혈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폐하, 잠시 아르사크 님이 옷을 갈아입으시도록 도와드릴 것입니다. 기다리고 계십시오.”
아르사크가 먼저 옆방으로 건너가고, 로즈안나는 에리히와 테오도르를 완곡히 막으며 문을 닫았다. 아무리 혼인한 사이라고 해도 부인이 옷을 갈아입는 자리에 대낮부터 남편이 들락거리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서로 금슬이 좋다 못해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럴진대 하물며 아르사크와 에리히는. 보기 좋고 말고를 떠나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했다.
드디어 코르셋을 벗게 되자 아르사크는 당장에 숨을 몰아쉬며 옷장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로즈안나는 좀 더 부드러운 재질로 바꿔주겠다 말했지만 아르사크는 듣지 않았다.
“아르사크 님, 많이 아프시다면 조금 더 편한 드레스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문 열리는 소리임을 로즈안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자신의 손에 들린 아르사크의 드레스를 한번 내려다보고, 뒤늦게야 사태 파악을 한 로즈안나는 사색이 된 채 아르사크를 따라 뛰쳐나가려 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르사크가 슈미즈 바람으로 방을 뛰쳐나와 에리히가 있는 곳으로 왔을 때, 테오도르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고개를 돌리며 반대쪽 별실로 뛰쳐 들어갔다. 시종들은 문을 막고 돌아섰으며 로즈안나는 문간에서 곧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아르사크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난장판이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코르셋을 확 팽개쳤다.
“저딴 건 이제 못 입어요. 아니, 안 입어!”
“차라리 다 벗고 다닌다고 하지, 왜.”
“싫으시다면 앞으로 폐하께서도 이따위 것을 입고 생활하시든지요. 그럼 저도 입고 다녀드리죠.”
“그거나마 입지 않으면 더더욱 망나니처럼 활보하고 다니겠군.”
“그런 걸 입는다고 제가 얌전 빼고 있을 것 같은가요?”
아니지.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악다문 잇새를 바라보면서 무심히 생각했다. 조만간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예상했던 바다.
하루 종일 도자기 인형처럼 앉아만 있지 않는 아르사크에게 매일같이 드레스를 입는 일은 굉장한 고역이었다. 에리히가 직접 불평을 들은 것도 벌써 수십 번쯤 되었으니 언제 일어나도 일어났을 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황후가 그토록 파격적인 복장을 하고 돌아다닌다면 수도가 발칵 뒤집어지고도 남았다.
“복장은 일종의 전통이지. 이국에서 온 그대가 섣불리 전통을 깨려 하면 눈엣가시로 여길 사람들이 수도 없을 텐데.”
“누누이 말했지만 저는 제 의지로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 제게 도움을 요청하신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것은 에리히의 자존심을 긁기 위한 말이었지만 뜻밖에도 에리히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이제야 건강한 혈색이 되돌아온 얼굴을 한 채 귀 옆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그리고 폐하는 앞으로도 제가 필요하실 겁니다. 적어도 2년은 그렇겠지요. 그런데 이 웃기지도 않은 속옷 한 장 때문에 두 달도 못 되어 제가 숨 막혀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하실까요?”
아까처럼 터지기 직전의 화난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말투는 신랄했다. 설상가상 에리히가 낮은 소리로 웃음까지 터뜨리자 아르사크의 눈빛에 더욱 날이 섰다.
에리히가 말했다.
“죽여도 안 죽을 것 같은 주제에 되지도 않는 가련을 떨긴.”
“지금 저랑 한번 해보자는 건가요?”
“마음대로 해. 언젠 내 말을 들었던가? 잠잘 때도 입고 있으라 명령해도 입지 않을 걸 아는데, 쓸데없이 기운 뺄 필요 없지.”
에리히의 태도는 의외로 선선했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의기양양하게 코웃음을 치며 바닥에 널브러진 코르셋을 발로 휙 걷어찼다.
이 모든 사태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로즈안나는 충격 때문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저 흉물을 만든 자가 누구죠? 찾아내서 저걸로 목을 졸라야겠는데.”
“글쎄, 모르긴 몰라도 이미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을 테니 불경죄라도 저질러 목이 매달렸길 바라는 방법이 최선이겠군. 예를 들면 수틀린다고 황제 앞에서 ‘닥치라’는 말을 했다든가.”
“그 상황에서 그 정도로만 말한 것도 상을 받을 일이죠.”
“그렇게 생각하나? 그럼 상을 주지.”
마치 아르사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에리히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잠깐 떠올랐다.
“무슨 상을 주시겠습니까?”
아르사크가 물었다. 에리히는 슈미즈 위로 흘러내린 아르사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신혼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