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아버님!”
“아니, 루이제. 이게 무슨 꼴이냐? 눈은 또 왜 그렇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
홀드빅 자작은 딸의 몰골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루이제는 빨갛게 충혈된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응석을 부리듯이 그에게 매달렸다.
“아버님, 저 이제 황궁에 가지 않을래요.”
“뭐? 갑자기 무슨 소리냐? 황후가 네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거냐?”
루이제의 어깨를 꽉 붙잡은 자작의 얼굴에 한 가닥 기대와 희열이 번득였다. 그러나 루이제는 아버지의 태도에 놀라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그게… 무슨 짓을 하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섭단 말예요. 신관에게도 손찌검을 하신 분이에요.”
지금도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루이제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다. 태어나서 그렇게 무시무시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시녀를 바닥에 내던지다시피 내려놓던 아르사크의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악몽을 꿀 것 같았다. 혼 한 번 나지 않고 곱게 큰 루이제에게는 더없이 큰 충격이었다.
자작은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리는 막내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황후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러 구혼자들을 물리쳐 왔지만, 볼핀 후작의 딸과 달리 루이제는 아직 어리니 얼마든지 좋은 자리를 골라 혼인할 수 있었으므로 그는 비교적 관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아르사크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할 수는 없는 노릇, 루이제가 아무리 울고불고 빌어도 그는 이 문제에서 딸에게 물러서 줄 마음이 한 치도 없었다.
“그건 안 된다, 루이제.”
“아버님!”
“어허, 숙녀가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다.”
호통을 치는 것도 아니고 숫제 타이르는 목소리였지만 루이제는 대번에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자작은 다시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뾰로통해진 딸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루이제, 사랑하는 딸아. 다 너를 위한 일이니 아비의 말대로 하거라.”
“그렇지만…….”
“알겠느냐?”
“하지만 아버님…….”
“기껏해야 제대로 된 예절 교육조차 받지 못했을 여자 따위에게 네가 밀리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느냐.”
자작이 말했다. 어쩐지 무서워진 것 같은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던 루이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로서는 아버지가 정확히 아르사크의 무엇을 노리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28장 접근 (4)
누군가 에리히 클로츠가 어떤 황제냐고 묻는다면 의견이 꽤 분분할 것이다.
제멋대로이며 황제로서의 자질이 없는 폭군이라 평가하는 사람, 오랫동안 질질 끌던 개간 사업을 우격다짐으로라도 시작해 날로 어려워지던 백성들에게 새로이 먹고살 길을 터주었다 평가하는 사람, 일 잘하는 건 인정하지만 처세술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사람, 그러거나 말거나 설산의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우니 아무래도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 등등.
그런 여러 가지 평가가 훗날 그의 후손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전달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폭군이자 혁명가이자 처세술 없는 미남인 그는 현재 분노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어서, 당장의 숱한 평가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들을 하나씩 살펴보던 에리히가 더는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반쯤 비어있던 찻잔이 놀라서 뒤집어지며 차가 쏟아지자 테오도르는 황급히 시종을 시켜 닦을 것을 가져오게 했다.
이 소란통에 아르사크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리히는 노크도 없이 열린 문을 날카롭게 쏘아보다 아르사크의 얼굴을 보고는 집어 던지듯이 깃펜을 내려놓았다.
“웬일로 여기엘 다 왔지?”
“소르흐에게 사냥 연습을 시키러 갈까 하는데, 로즈안나가 꼭 폐하께 여쭤봐야만 한다고 우기다 울며 드러누웠기에 하는 수 없이 왔습니다.”
우긴 건 맞지만 멀쩡히 선 채 기다리고 있던 로즈안나가 들었더라면 억울했을 말을 태연하게 지어냈다.
에리히는 헛웃음을 치면서 널브러진 종잇조각들을 손으로 밀었다.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고 해도 어차피 로즈안나를 속여서 갈 거잖아.”
“그토록 잘 아시니 허락하신 걸로 알고 가보겠습니다.”
에리히는 돌아서는 아르사크를 막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르사크가 문 너머 모퉁이로 사라지기 직전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잠깐 기다려.”
그 순간 아르사크가 마뜩잖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본 시종장은 자기에게 무슨 불똥이라도 튈세라 얼른 자리를 피해버렸다.
“왜 그러시죠?”
“토르갈이 제국만큼 넓었다면 그대가 황제일 것이라고 내게 말했었지?”
아르사크는 잠시,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황후로 책봉되던 날의 연회장이 떠올랐다. 아르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그럼 그대에게 하나 묻지. 이걸 읽어보고 그대의 견해를 내게 얘기해 봐.”
에리히는 둘둘 말아 밀어놓았던 종이를 아르사크에게 내밀었다. 평소답지 않은 영문 모를 부탁을 하면서도 말투만은 여전히 고압적이다.
그러나 그까짓 일에 위축될 아르사크도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말없이 그것을 펼쳐보았다. 각 영지와 자치구, 그 외 제국에 소속된 외부 지역에서 보고된 납세 내역을 정리한 문서였다.
“어떻게 생각하지?”
목소리는 대수롭지 않았으나 에리히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르사크는 아무리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각 지역에서 바치는 세금의 액수가 결코 적지 않은데, 국고는 지속적으로 파산 직전이었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그간 대체 무슨 수로 모자라는 비용을 충당하셨던 건가요?”
아르사크의 질문에도 에리히는 곧장 대답을 하지 않고 미간을 문질렀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오만함이나 조소, 횡포를 부리기 직전의 불한당 같은 짜증스러움 대신 피로를 발견한 아르사크는 내심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드문 표정은 드러났던 그 즉시 흩어지듯 사라졌다.
에리히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몰라서 묻나? 귀족들에게서 몰수했다. 얼마 전 추방당한 볼핀의 재산이 제법 두둑했으니 아마 내년까지는 무리 없이 공사를 진행할 수 있겠지.”
“수도 귀족들이 모인 곳에 가면 술잔이 한 바퀴를 돌기도 전에 폐하를 욕하는 소리에 취하게 된다더니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요.”
“어떤 놈이 그런 소리를 지껄였는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군.”
“원성을 얻어가며 귀족들의 토지와 재산을 빼앗기만 하느니 물이 새는 곳을 틀어막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요?”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나? 지방에서 거둔 세금이 황궁으로 들어오기까지 수도 없이 많은 자들의 손을 거친다. 시체를 뜯어먹는 짐승들처럼 눈을 벌겋게 뜨고 있지. 그들을 하나하나 뒤져 찾아낼 수도 있지만 막상 심문해 보면 잔챙이들일 뿐이야. 문제는 놈들에게 미끼를 던져주고 있는 놈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새어 나간 물은 어디로 흘러가든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까.”
아르사크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빠져나간 물이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고이고 있다는 것이군요.”
“어딘가에 구덩이가 생겼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군. 겹겹이 교묘하게 숨겨놓은 거지. 볼핀을 털어보면 뭔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뻔히 알고 있던 것들뿐이었고.”
볼핀은 재산의 대부분을 몰수당했고 상당한 규모의 토지도 잃었다. 신관을 매수한 것치고는 가혹한 처벌이었고 설상가상 그는 에리히의 육촌이기도 했으므로, 볼핀이 추방당한 사건으로 하여금 황제와 귀족들 사이에는 또 하나의 깊은 골이 생긴 셈이다.
에리히가 뭔가를 노리고 일부러 귀족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아르사크는 생각했다. 그는 다만 타협을 모르고, 이익을 위해 남에게 적절히 숙여주는 짓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에리히는 말에게 가혹한 기수와도 같았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어 넘어질 때까지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다. 효율적이지만, 위험 부담이 큰 행동이다.
‘하지만, 내가 깊이 관여할 바는 아니지.’
아르사크는 무심히 생각했다. 에리히가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은 토르갈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건국된 지 벌써 육백 년의 세월도 더 지난 카툴라 제국의 전성기는 오래전에 지났다. 에리히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이미 서서히 쇠락해 가는 시기였던 것이다.
영원히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이 없듯 영원히 건재한 나라도 없으니 새삼스레 통탄하고 비관할 일은 아니었지만, 에리히는 자신이 건재한 이상 나라가 내리막길로 달려가는 것을 두 손 놓고 지켜볼 성미가 아니었다.
아르사크가 몰락 직전의 토르갈을 포기하지 않았듯 에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지도자의 천성을 타고난 둘은 서로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 매우 닮아있었다.
“물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아보려면, 우선 그 위에 뭔가를 띄워보면 되겠죠.”
아르사크가 말하자 에리히가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아르사크는 옷이 갑갑한 듯 허리를 살짝 꺾으면서 짧은 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물은 어디에선가 반드시 흐르고 있으니까요. 폐하께서 숲에 호수를 만들어두셨듯. 그 물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지 않나요? 흐르던 강물이 갑자기 말라 끊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실마리가 떠오를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의 눈빛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문을 먼저 연 것은 아르사크였다.
“이제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로즈안나가 울며 눕다 못해 절 기다리며 소금 기둥이 되었을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