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물론 마마께서는 더 값진 것들이 많으실 테니까.”
아르사크가 심드렁한 태도로 별 대꾸를 하지 않자 또 뾰로통해진 루이제가 말했다. 무릎 위로 새침하게 손을 모으고는 있어도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입술을 움츠리는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루이제는 일부러 아르사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루이제의 표현과는 달리 아르사크의 차림새는 별반 대단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저도 한 번쯤 마마께서 가지고 계신 걸 구경할 수 있게 해주세요.”
루이제의 말에 아르사크의 얼굴에 처음으로 심드렁함 이외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가진 것?”
“네. 원래 아가씨나 부인들이 모이면 장신구나 화장품, 향유나 옷감 같은 것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한답니다. 어떤 물건을 어떻게 구했는지도 이야기 나누고요. 마마께선 사람들을 초대하지 않으시니,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자주 마마를 찾아뵙고 말벗이 되어드리라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 깜찍한 수작의 배후에 자작이 있었군. 아르사크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으면서 되도록 천천히―로즈안나의 표현에 따르면 고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화제라면 확실히 차를 마시면서 부담 없이 하기에 좋겠군. 그런데 어쩌지? 난 이런 장신구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보여줄 만한 게 없거든.”
“그럴 리가요. 폐하께서 황후 마마를 위해 정해진 예물 이외에 혼수도 따로 준비해 주시지 않았나요? 그 정도면 틀림없이 다른 것들도…….”
“폐하께서 이국에서 온 황후를 위해 혈세를 얼마나 낭비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한 모양이네.”
아르사크의 말에 당황한 루이제는 하마터면 찻잔을 엎을 뻔했다. 아르사크는 창백하게 질린 루이제의 얼굴을 일부러 똑바로 쳐다보면서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루이제가 그토록 국사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폐하가 내게 진귀한 패물은 주지 않으시지만 그래도 명색이 황후인데, 제국을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 정도는 들어주실 거야. 루이제가 원한다면 그대가 아버님의 작위를 이어받아 백성과 폐하를 위해 충성할 기회를 주고 싶은데 어때?”
물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루이제는 아르사크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여부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가지고 왔던 상자를 허둥지둥 덮은 루이제는 아르사크가 자신의 손을 물기라도 할 것처럼 소스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군요, 마마. 결례가 될지 모르니 저… 저는 이만.”
“왜? 더 놀다 가도 돼. 아직 자랑하지 않은 게 하나 더 남았잖아.”
아르사크는 루이제가 가지고 왔던 다른 상자 하나를 더 가리켰다. 루이제는 품에 안다시피 한 상자와 아르사크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 이건 그냥,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보여줘.”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루이제는 도무지 그녀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황후인 아르사크의 주변을 꼼꼼히 염탐해 오라 일렀지만, 사실 루이제는 보호막이 되어줄 아버지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아르사크 가까이에 있고 싶지 않았다. 너무 무서웠다.
‘나 같은 건 소리 지를 시간도 없이 죽여버릴 거란 말이야!’
“마, 마마… 저기, 이건 제가 다음에…….”
“열어.”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야말로 늑대 앞에 던져진 새끼 양처럼 바들바들 떠는 꼴이 웃기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해서, 아르사크는 일부러 루이제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루이제는 가늘게 튀어나오는 비명을 애써 입술 밑으로 삼키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상자를 열었다.
“이게 뭐지?”
상자가 열리자, 아르사크는 그제야 처음으로 호기심다운 호기심을 보이며 그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루이제는 아르사크가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이제 반갑지 않았다. 아르사크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지, 또는 값비싼 것들을 탐내거나 여느 사람들처럼 노골적으로 시기하는지, 그런 흉들을 집어내서 입이 싼 귀족들 사이에 소문을 흘릴 생각이었건만 아르사크의 생활은 루이제의 생각과는 영 달랐다.
보석에도 옷감에도 아르사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루이제는 아르사크를 은근슬쩍 바보 취급하고 있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르사크가 자신의 속셈을 전부 다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루이제는 울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애초에 응석받이로 큰 루이제가 교묘하게 남의 속을 떠보는 방법 같은 걸 알 리 없었다.
“이게 뭔데?”
“네? 아, 이… 이건, 이건… 향수예요.”
“그런데 아주 독특하게 생겼는걸. 꼭 버터처럼 굳어 있네?”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동글납작한 유리 안에 뽀얀 크림색의 뭔가가 한 스푼 정도 들어 있었다. 루이제는 여전히 겁을 먹은 표정이면서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움찔거리면서 도로 새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최신 유행하는 물건이에요. 만드는 데만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제대로 만들기도 어려워서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어 모두들 줄을 섰답니다.”
“그런데 용케도 가졌네.”
“오라버니께서 구해주셨어요. 아버님이나 오라버니는 제가 원하는 건 뭐든 구해주시니까요.”
루이제가 말했다. 반듯하게 맞물린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본 아르사크는 괴상하다는 표정으로 콧잔등을 찡그렸다.
“안 치운 마구간 같은 냄새가 나는데?”
그러자 뒤쪽에 가만히 서 있던 로즈안나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금방 입술을 깨물며 참기는 했으나 턱에 너무 힘을 줘서 어깨 위쪽이 부들부들 떨렸다.
루이제는 아르사크의 가감 없는 평가에 교양 있는 태도도 잊고 입을 쩍 벌렸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 마구간 냄새라뇨! 아니에요! 이… 이건 그러니까……!”
“진짜 마구간 냄새 맞아. 지금 가서 확인해 볼래?”
루이제의 인내심은 그리 대단치 못했다. 아르사크의 손에서 향수를 낚아채다시피 해 도로 상자에 집어넣은 루이제는 쥐어박힌 어린애처럼 씨근거리면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방을 뛰쳐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르사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인데 로즈안나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로즈, 왜 웃어?”
“아르사크 님은 안 웃기세요? 루이제 아가씨가 이렇게 망신을 당한 건 아마 태어나서 처음일 거예요.”
“난 망신 주려고 한 소리가 아냐. 진짜 마구간 냄새가 난다니까. 정말 저걸 좋다고 돈을 주고 사서 몸에 바른단 말이야?”
아르사크의 말에 로즈안나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요란한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숨을 죽이고 웃느라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방금 루이제 아가씨가 가지고 있던 향수는 저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수도에 유명한 조향사가 한 명 있는데, 그 사람이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하더군요. 워낙 인기가 있고 콧대가 높아서 모두들 그 사람의 새 향수가 나오면 앞다퉈 사려고들 아우성인데, 이번에 몸에 바르는 향수를 새로 만들어냈다고 해 굉장히 화제가 되었어요.”
“너도 맡아봤어야 해. 난 돈을 준다고 해도 바르고 싶지 않아. 반나절만 마구간 청소를 하면 온몸에서 저 냄새가 날 텐데 뭐 하러 비싼 돈을 주고 사겠어?”
“어쩌면 그 조향사도 이제 재능이 다했는지 모를 일이죠. 하지만 오래전부터 유명한 사람이다 보니, 다들 아르사크 님처럼 생각하면서도 선뜻 입 밖에 내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 * *
마차 안에서 혼자 씩씩거리느라, 저택에 도착했을 때쯤의 루이제는 온몸의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황후를 만나러 간다더니 어디서 싸움박질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머리 꼴이 엉망이 된 막내 아가씨를 보며 하녀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아르사크 앞에서는 차마 못 한 분풀이를 자기 머리카락에다 하느라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루이제는 당황한 하녀들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뭘 우물쭈물거리고 있어! 빨리 와서 머리를 새로 빗기지 않고!”
“아, 네!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녀가 머리를 새로 다듬어주는 와중에도 루이제의 어깨는 바쁘게 들썩였다. 남 앞에서 이렇게 우스운 꼴이 된 것은 처음인데, 별달리 반박을 할 수도, 복수를 할 수도 없는 상대라서 더욱 신경질이 났다.
“아가씨, 이 상자는…….”
“갖다 버려!”
문제의 향수가 든 상자를 보자 또 속이 발칵 뒤집어진 루이제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 안에 든 향수의 값까지는 모르지만 루이제가 사람들이 올 때마다 그것을 얼마나 뽐내고 자랑했는지 아는 하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리다가 일단 상자를 가지고 나갔다.
새로 빗어 예쁘게 꾸며놓은 머리는 마음에 들었지만 루이제는 여전히 울상이었다.
새로 나온 것들이라면 꼭 다른 또래들보다 먼저 손에 넣어야 하는 루이제의 성화에 못 이긴 그녀의 오빠가, 콧대 높은 조향사를 어르고 달래 겨우 샀다는 그 향수는 루이제의 취향에 전혀 맞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 누구의 취향에도 맞지 않는 향수였다. 그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루이제를 포함해도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는데, 하나같이 오묘하고 독특한 향이라 찬탄을 아끼지 않았지만 루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저분하게 푹 삭은 흙이나 짚단, 그러니까 아르사크의 말대로 딱 마구간 정도의 냄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훌륭하다고 하는 향수인 데다, 그것을 만든 조향사는 다른 나라의 귀족들까지 찾아와 물건을 청하는 유명한 사람이다. 혹시 말을 잘못했다가는 훌륭한 물건도 분간할 줄 모른다는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사교계는 말이 많은 곳이다. 루이제를 아니꼬워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모두들 칭찬하는 것에 대해 루이제 혼자 다른 의견을 낸다면 언제든지 뒷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 이 얘길 흘리면…….”
반색을 하며 혼잣말을 하던 루이제는 그러나, 금방 화가 치민 얼굴로 발을 탕 굴렀다. 이런 얘기는 흘려봤자 별반 타격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르사크가 자신을 해코지할 빌미만 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알력 다툼을 벌이는 것이라면 루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아르사크와는 알력 다툼이 아니라 완력 다툼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최고 신관도 두들겨 팬 무지막지한 여자가 아닌가.
“난 버들가지처럼 연약하단 말이야! 한 대 맞으면 죽을 거라고!”
씩씩거리던 루이제는 그만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루이제 아가씨, 나리께서 돌아오셨어요.”
하녀가 문을 열며 들어와 말했다. 루이제는 눈물로 얼룩진 눈가를 추스를 생각도 않은 채 후다닥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