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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39화 (39/191)

39화

“이번엔 좀 더 멀리 날렸다가 돌아오게 해볼까?”

한쪽 팔에 두꺼운 가죽 장갑을 낀 아르사크가 매의 부리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는 그새 부쩍 자라서 아직 보송보송하던 속깃이 모두 빠져 힘차고 아름다운 성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갓 어린 티를 벗은지라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고 가끔 말을 잘 듣지 않을 때가 있어 툭하면 로즈안나를 겁먹게 만들었다.

“아르사크 님, 제발 맨손으로 부리를 만지지 마세요. 그러다 손이라도 다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몇 발자국 떨어져 멀찌감치 서 있던 로즈안나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콧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면서 손마디로 매의 날개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로즈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니까. 그렇지, 소르흐?”

소르흐는 매의 이름이다. 아르사크는 매에게 딱 맞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며칠 밤낮을 고민했다. 온갖 이름을 다 떠올려보았지만 이것이다 싶은 것이 없어 매는 한참 동안이나 그냥 ‘매야’라고 불렸다.

그러나 먹이를 주어 길들이는 것이 끝나고 처음으로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여 아르사크에게로 돌아왔을 때, 아르사크는 마치 예전부터 작정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 소르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람의 등에 오른 자’라는 뜻이다.

“로즈, 이리 와. 너도 소르흐를 한번 날려봐.”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아르사크 님. 아르사크 님은 익숙하실지 몰라도 저는 매가 무서워요. 부리는 너무 날카롭고 발톱은 칼날 같아서요.”

“네가 여우로 변해 달아나지 않는 이상 얘가 널 할퀼 일은 없을 테니까 빨리 이쪽으로 와. 어서! 황후가 말하는데 버티고 서 있을 거야?”

이럴 때만 황후라지. 로즈안나는 불만스레 쀼루퉁한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 아르사크를 이기지 못하고 주춤거리듯 다가섰다. 아르사크는 시종에게 새 장갑을 가져오게 해 로즈안나의 손에 끼웠다.

“자, 팔을 들고… 그렇지. 좀 더 얼굴에서 멀찍이 떨어트려. 됐다. 이제 소르흐가 네 팔에 앉을 거야. 좀 무겁겠지만 내가 잡아줄 테니까 휘청거리지 마. 갑자기 흔들리면 놀라서 퍼덕거릴지도 모르니까.”

“제발 부탁이니 절 겁주지 마세요, 아르사크 님.”

“겁을 주다니? 네가 진짜 겁내는 일이 생길까 봐 미리 말해주는 거잖아. 자, 이제 옮긴다.”

아르사크의 팔이 천천히 로즈안나의 팔과 가까워졌다. 아르사크가 깃을 쓸어주며 휘파람 소리를 내자 소르흐는 잠시 발을 콱콱 구르는가 싶더니 날개를 가볍게 퍼드덕거리며 로즈안나의 팔에 툭 내려앉았다.

그 잠깐의 퍼덕거림에도 기절할 것처럼 놀란 로즈안나는 팔뚝에 얹힌 매의 묵직한 무게에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아, 아르사크 님! 안 되겠어요! 너무 무거워요!”

“내가 받쳐줄 테니까 똑바로 서! 겁을 먹으면 얘가 널 얕본다니까.”

금방이라도 푹 꺼질 것 같은 로즈안나의 팔꿈치를 받쳐주며 아르사크가 재촉했다.

로즈안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부들부들 떨면서 최대한 소르흐의 부리로부터 멀어지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쭉 뺐다.

소르흐는 노란 눈동자로 로즈안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부리로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로즈안나의 입에서 대번에 비명이 터졌다.

“아르사크 님! 얘가 절 쪼려고 해요! 내려주세요, 얼른요!”

“괜찮다니까, 괜찮대도 그래! 그러다 넘어져, 로즈!”

“전 무섭다고 했잖아요! 내려주시라니까요!”

로즈안나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데 아르사크는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순간 소르흐가 갑자기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올라 아르사크의 팔로 옮겨갔다.

숨을 몰아쉬며 한바탕 원망을 퍼부으려던 로즈안나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마구간을 드나들면서 로즈안나를 괴롭히는 걸로는 부족해?”

허둥거리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한 로즈안나가 다급하게 허리를 숙이자, 테오도르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로즈안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네, 테오도르 님. 괜찮습니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테오도르는 소매에 흙이 묻었다는 것을 말해줄까 말까 하다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모두가 다 그대처럼 힘이 넘치는 줄 알아?”

“소르흐는 얌전합니다. 로즈안나를 해치지 않아요.”

“어차피 짐승인데 그걸 어떻게 장담해.”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긴 하지만 소르흐를 살펴보는 에리히의 눈빛에는 흡족함이 담겨있었다.

토르갈의 사람을 통해 어렵게 구한 이 매는, 가장 척박하고 추운 땅에서도 매 사냥으로 생계를 잇는 사냥꾼들로부터 온 매였다.

산독수리처럼 몸집이 크지는 않지만 날쌔고 영리해 한 번 눈에 띈 사냥감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부했다. 과연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는지 소르흐의 눈빛은 단순한 새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만치 깊은 총명함이 있었다.

“한번 해보지.”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휘파람을 불어 소르흐를 날려 보낸 뒤,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에리히의 팔에 끼워주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소르흐는 정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람을 타고 그들의 머리 위를 둥그렇게 선회하며 날고 있었다.

“팔을 뻗으세요. 힘을 단단히 주셔야 합니다. 꽤 무거우니, 휘청거리시면 놀랄 수 있거든요.”

“로즈안나도 할 수 있었는데 내가 못할 것 같아서 걱정하는 건가?”

“폐하의 팔이 꽤 연약하다는 걸 제게 직접 알려주셨으니.”

“틈만 나면 걸고넘어지는군. 관에도 새기겠어.”

“그 전에 폐하의 옥좌에 먼저 새겨드리지요. 이제 돌아오는군요.”

발끈한 표정을 지은 에리히는 높이 치솟았던 소르흐가 빠른 속도로 활강해 내려오는 것을 보며 팔과 어깨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장갑을 꽉 움키자 꽤 묵직한 충격이 몸에 전해졌다. 힘주어 버티고 있지 않았더라면 꼴사납게 휘청거릴 뻔했으나 다행히 아르사크에게 놀림거리 하나를 더해주는 것은 면했다.

“이 매의 이름이 소르흐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폐하.”

“어떤 뜻이지?”

“‘바람의 등에 오른 자’라는 뜻이죠.”

“새치고는 무척 거창한 이름이로군. 잘 길러서 조만간 사냥을 나가 보도록 하지.”

에리히가 말했다. 그러자 소르흐는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날개를 넓게 펼치더니 그의 팔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소르흐가 가는 쪽을 향해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아르사크와 에리히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 아르사크 님, 이… 이 매, 억! 매가… 제, 제 머리에! 악! 아르사크 님!”

졸지에 소르흐의 홰 같은 꼴이 된 테오도르가 무게 때문에 처지는 목을 어쩌지도 못하고 괴로운 신음만 뱉었다. 언제 발톱으로 움켜쥘지 몰라 차마 떨쳐내지도 못하고 움찔거리는 테오도르의 머리 위에서, 소르흐는 또렷한 눈을 반짝이며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었다.

테오도르를 실컷 괴롭히고서야 만족한 소르흐는 얌전히 홰 위로 올라가 앉았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조금 만져보다가 포기한 테오도르는 울적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폐하.”

장갑과 소르흐의 간식을 정리하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그제야 아르사크를 찾아온 용건을 떠올리고 아, 하며 입술을 벌렸다.

“홀드빅 자작이 나를 만나러 오면서 딸을 데리고 왔더군. 자작은 이미 돌아갔지만 그 딸은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선 김에 그것을 전해주려 했는데 그만 잊어버렸어.”

“그것부터 말씀을 하셨어야죠. 숙녀를 기다리게 만들었군요.”

“숙녀는 무슨.”

에리히가 코웃음을 치는 것을 못 들은 체, 아르사크는 흐트러진 드레스를 대충 매만지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요즘 자작의 딸이 무척 자주 그대를 만나러 들락거리는 것 같던데, 그새 친구라도 되었나?”

“찾아오니 거절하지 않을 뿐입니다. 토르갈은 언제든 손님을 환영하니까요.”

“루이제 홀드빅은 볼핀 후작의 딸만큼 영악하진 않지만 그다지 조신하지도, 소문대로 심성이 곱지도 않아.”

“제가 그걸 모를까 봐 경고해 주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루이제를 만나신 것보다 제가 루이제를 만난 횟수가 훨씬 많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그야 알 수 없는 일이지. 여러 번 본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가까운 사람이라면 더더욱이나.”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닙니다. 단지 루이제는 제게 뭔가 자랑하는 것을 좋아해서요. 그걸 들어주며 차나 마시는 정도입니다.”

아르사크의 말에 에리히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자랑이라니? 뭘 자랑한다는 거야, 대체?”

“여러 가지예요. 주로 장신구나 옷, 모자나 구두 자랑이 대다수고 그다음은 본인의 미모, 본인에게 목을 매는 남자들… 등등.”

“그런 시답잖은 한담도 들어줄 씀씀이로 내게도 좀 공손해지는 건 어때.”

“제 씀씀이에서 폐하는 순위가 좀 낮으시니, 원하시면 분발하셔야 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신랄한 말과는 딴판으로 인사만큼은 완벽한 궁정식 예법을 따르는 것이 에리히는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복장 사정 따위 알 바도 아니고 관심도 없었다.

아르사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치던 에리히는 한 번도 구부정하게 굽어진 모습을 본 적 없는 당당한 어깨와 등으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볼핀을 중심으로 했던 세력 중 금방 와해된 몇몇 귀족들이 이번에는 홀드빅에게 달라붙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딸이 아르사크를 무슨 이유로 계속 만나러 오는 것인지, 그리고 그 자랑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27장 접근 (3)

“이런 색깔의 보석은 제국 어디를 가더라도 쉽사리 볼 수 없는 거라고 해요. 그런데 아버님께서 저를 위해 특별히 구해다 주신 물건이지요.”

아르사크는 루이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차를 마시면서 루이제가 가지고 온 조그만 보석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보드라운 천으로 안을 댄 다음 네 귀퉁이에 딱 맞게 채운 쿠션에 화려하게 빛나는 귀걸이 두 쌍이 얌전히 꽂혀 있다.

루이제는 한껏 뻐기는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자랑을 재잘거리며 조그만 콧대를 거들먹거렸다.

요즘 들어 거의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책봉이 있던 날의 연회에서는 아르사크를 거들떠도 보지 않던 루이제가 무슨 바람이 불어 하루가 멀다 하고 아르사크를 만나러 궁을 들락거리는지, 정확한 이유는 아르사크도 알 수 없었다.

루이제는 항상 아버지인 홀드빅 자작이나 얼굴도 모른다는 구혼자들로부터 받았다는 값비싸고 진귀한 것들을 아르사크 앞에 늘어놓고 자랑했는데, 아르사크는 언제나 별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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