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런 한밤중에 어쩐 일이신가요?”
“남편이자 황제인 내가, 아내이며 황후인 그대의 방에 못 올 건 또 뭐지?”
태연자약하고 차가운,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다. 아르사크는 헛웃음을 치며 팔짱을 낀 채 에리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일이 꼬일 만한 걸 굳이 추가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던 입은 어디의 누구 것이었지요?”
“착각하지 마라. 설마 내가 그대를 겁탈이라도 할까 봐서?”
“그러실 작정으로 오셨으면 목은 미리 떼어놓고 오시는 편이 일 처리가 빨랐겠지요.”
“황궁에는 눈들이 많아. 입들은 그보다 더 많지. 황궁 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은 눈은 두 개, 입은 세 개씩 달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결혼한 첫날부터 각방자리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체면이 깎이는 건 내가 아니라 그대야.”
“그래서 지금 제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다.”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
저 입을 한 대만 패주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아르사크는 기도 안 찬다는 듯이 픽 웃으며 침대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저도 성의를 보여 소중히 아끼던 소파를 내어드리겠으니 거기서 주무시든 밤새 몸이 달아 뜬눈으로 지새우시든 부디 뜻대로 하세요.”
“황제인 나를 소파에서 재우시겠다? 대단히 현숙한 황후로군.”
“반했다는 고백은 됐습니다.”
경쾌한 대꾸를 남기고 침대에 누우려는 아르사크의 어깨를 에리히가 붙잡았다.
아르사크는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에리히를 올려다볼 뿐,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 무심함이 한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 에리히로서는 아르사크의 그런 반응이 또 놀랍지 않았다.
“침대를 누가 쓸지는 정당하게 승부하지?”
“폐하, 깜빡 잊으셨나 본데 여긴 제 침실입니다.”
“또한 이곳은 황제의 궁이기도 하지. 승부할 거야, 말 거야? 기권하겠다면 너그럽게 받아주겠다.”
아르사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벌떡 일어났다.
“좋습니다. 뭐로 승부하실래요?”
“…진심인가?”
“제가 언제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있나요?”
테이블 위에 떡하니 놓인 깃털 베개를 내려다보던 에리히는 황당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의자에 앉았다.
방 안에서, 시종이나 경비병이 놀라 달려올 만한 소음을 내지 않을 만한 승부로 낙찰된 것은 다름 아닌 팔씨름이었다.
에리히가 자리에 앉자마자 아르사크는 이미 베개 위에 팔꿈치를 댄 채 전투적인 자세로 한쪽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여느 아가씨들보다 튼튼하다고는 하나 아르사크는 당연히 에리히보다 손도 체격도 작다. 에리히가 눈앞에 내민 아르사크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자 아르사크가 말했다.
“기권하시겠다면 너그러이 받아드리겠습니다, 폐하.”
“말해두겠는데 안 봐줄 거다.”
“저도 말해두겠는데, 절대로 안 봐줄 겁니다.”
마침내 에리히가 아르사크의 손을 잡았다. 크기가 서로 다른, 그러나 체온은 엇비슷한 손바닥과 손바닥이 먼저 맞물리고, 잠시 어디에 놓여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손가락들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의 손을 감싸 쥐었다. 맞잡은 손 위로 시선이 오갔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얼굴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보다가 그녀의 손을 쥔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밤이 늦었으니 단판으로 끝내는 게 좋겠어.”
“바라던 바입니다.”
손바닥이 살짝 떨어졌다가 다시 맞물렸다. 사이에 고인 공기가 두 사람의 힘에 눌리며 얄팍하게 쪼그라들수록 살갗은 더욱 가까이 밀착했다.
동그랗게 도드라진 손마디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각축전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팽팽한 공방까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간 아르사크에 대해 들은 바가 없지는 않았고, 사소한 마찰이 있을 때마다 멱살부터 잡고 보는 그 급한 성미도 잘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심으로 덤벼든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게 버티리라곤 쉽사리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가까이에서 보니 자신에 비해 훨씬 가느다란 뼈대―튼튼하기는 해도―가 눈에 띄어 어깨의 힘을 풀어버릴 뻔했는데, 본격적으로 힘이 들어가자마자 에리히는 그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진짜로 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지금… 진심으로… 날 이기려는 거야?”
“그럼, 농담이었겠습니까?”
“어처구니가… 무슨, 뭘 먹고 커야, 힘이.”
“돌팔매질로, 늑대… 쫓아보셨어요? 그 정도로, 하다 보면, 팔 힘은 자연스럽게…….”
맞잡은 두 손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밀며 덜덜 떨렸다.
에리히는 순간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한밤중에, 남들의 눈 운운하는 답잖은 이야기까지 꺼내 가면서, 고작 이 망나니 방의 침대를 차지하려고 전력을 다해 팔씨름을? 왜 하는 거지?
그 찰나의 딴생각이 문제였다. 어떤 전쟁에서건, 집중력을 잃으면 끝장이다. 나라와 군사를 모두 이끄는 제왕으로서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늘 실천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 역시 사실이었다.
“…길러지거든요!”
아르사크의 외마디 함성이 끝나기도 전에 테이블을 받친 외다리가 휘청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에리히의 어깨가 한쪽으로 휙 기울었다.
에리히의 손등을 테이블 위에 꽉 누른 아르사크는 활짝 웃으면서 잡았던 손을 떼었다. 강하게 밀착했던 서로의 살갗에는 미진한 땀이 배어 나와 있었다.
“침대는 제 겁니다.”
“…….”
에리히는 테이블에 엎어진 손을 쳐다보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잠자코 일어나 구겨진 소매를 탁 쳐 주름을 펴면서 조그만 소리로 혀를 찼다.
아르사크는 그가 틀림없이 한두 마디 밉살스런 말을 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진짜로 소파에 등을 돌리고 누운 에리히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폐하, 담요라도 덮어드릴까요? 제가 좀 현숙한 황후인지라 폐하를 그리 두고는 마음이 아파 잠이 올 것 같지 않습니다.”
널찍한 침대에 활개라도 치듯 드러누우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면서 등을 웅크린 채 한 번 더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로즈안나의 말이 맞았다.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승리의 쾌감과 함께 몸 구석구석에서 스며 나오는 꽃향기에 취해 잠드는 것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잠을 푹 잔 덕분인지, 아니면 기어코 에리히를 정면 승부로 꺾어서인지 평소보다 일찍 깨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버릇대로―로즈안나의 눈에 띄면 정오까지 잔소리를 듣지만― 이불 속에서 사지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 아르사크는 즐거울 만치 가뿐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팔다리를 마구 버둥거렸다. 그런데 왼쪽에서 뻑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악!”
아르사크는 화들짝 소스라치며 몸을 일으켰다. 산처럼 둥글게 부푼 이불을 걷어낸 아르사크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렇게 커졌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본의 아니게 에리히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때려버린 아르사크가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러자 에리히는 뒤통수를 감싼 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감히 내 머리를 쳤겠다. 손목을 묶어놔야 좀 얌전한 잠버릇이 들 텐가?”
“한 대 더 맞기 전에 빨리 제 침대에서 내려가시지요. 남의 침대에서 뭘 하는 거예요? 분명 어젯밤에 당신이 졌잖아요?”
“난로의 불이 꺼져서 얼어 죽을 뻔했는데 그럼 그냥 누워있을까?”
“자기 방으로 가면 되지!”
“가까운 곳에 침대 놔두고 왜!”
에리히는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내려갔다. 주먹이 아니라 돌로 내리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방이 소란스러워지자 로즈안나가 바깥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마마, 침상 정리를 할까요?”
“내 옷을 먼저 가져와라.”
에리히가 말했다. 곧 문이 열리더니 옷을 든 시종이 앞서 들어오고, 그 뒤로 로즈안나가 따라 들어왔다.
험악하게 구겨진 에리히의 표정을 보자마자 로즈안나는 덜컥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리히가 침실 밖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로즈안나는 얼른 아르사크에게 다가가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아르사크 님,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고함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습니다.”
“별일 없었어. 투덜대기 좋아하는 누가 평소처럼 투덜댄 것뿐이니까.”
“별일 없으시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로즈안나가 말끝을 묘하게 끌었다. 아르사크는 하품을 쩍 하다 말고 왜 그러냐는 듯이 로즈안나를 쳐다보았다.
“…두 분, 한 침대에서 주무셨어요?”
“아니. 같이 안 잤어. 아니, 자긴 잤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제가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르사크 님.”
“아니라니까!”
새 황후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침부터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뒤흔들었다.
26장 접근 (2)
황후의 일과는 아르사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조로웠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참아보려 했으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점점 본격적으로 계절이 바뀌는 문턱에 접어들면서 아르사크는 이제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황후는, 황녀는, 그리고 그 숱한 귀족의 부인과 딸들은, 어떻게 일평생을 이토록 지루하게 보낼 수 있는지 하나하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아르사크가 찾아온 귀족 부인들과 하루 종일 담소를 나누거나, 차를 마시고 수를 놓으며 우아한 황후 노릇을 한 것은 아니다.
아르사크는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다 했다. 에리히가 혼수로 준 매를 길들이기도 하고, 말을 타고 달렸다. 테오도르에게 제국의 기사나 병사들이 훈련할 때 쓰는 과녁을 구해오라고 해 심심하면 활도 쏘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매일 똑같은 일만 반복하자면 지겹고 좀이 쑤셨다. 에리히와 몇 번의 격렬한 협상을 거친 끝에 별궁의 마구간에 있는 말들을 손수 돌보게 되었으며, 황궁의 사냥터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토르갈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끔은 나무를 가져다 깎기도 하고 정원의 수많은 나무와 꽃의 이름도 익혔다.
결국 황후가 하루 종일 오만 곳을 정신없이 쏘다닌다는 뒷말이 나올 때쯤이 되어서야, 아르사크는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매일을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