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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37화 (37/191)

37화

“아르사크 님, 홀드빅 자작과 루이제 아가씨입니다.”

아르사크가 뻣뻣하게 뭉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사이 로즈안나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며 자리를 비켰다.

아르사크는 정복을 차린 홀드빅 자작과 루이제를 바라보며 태연한 표정으로 미소를 띠었다.

자작은 아르사크의 앞에서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반지에 입술을 대었다. 아르사크는 사실 이런 방법으로 예의를 차리는 것도 질색이었지만, 로즈안나와 약속한 바가 있었으므로 눈에 띄게 진절머리를 내지는 않았다.

“반갑소, 자작. 그대를 이렇게 만나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로군.”

“그렇습니다, 황후 마마.”

루이제는 뾰로통한 표정인 채 아르사크를 새침하게 외면했다.

로즈안나는 그녀의 태도에 속으로 분개했지만 아르사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반가워요, 루이제.”

“…영광입니다, 황후 마마.”

“불빛이 눈부시죠?”

느닷없는 질문에 홀드빅은 물론 루이제도 눈을 깜빡거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아르사크는 싱긋이 웃으며 루이제를 향해 말했다.

“루이제처럼 아리따운 아가씨가 그토록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니 분명 불빛이 너무 밝은 것이겠죠. 저 샹들리에를 하나 끄라고 할까요?”

루이제의 안색이 삽시간에 바랬다. 홀드빅도 놀란 얼굴로 입을 달싹거리다 어색하게 웃었다.

“황후 마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 여식은 그저 아직 어려서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을 뿐…….”

“아버님, 저는 어리지 않아요. 저는…….”

루이제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끼어들자 자작이 그만하라는 듯이 입술을 실룩였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영문 모르게 즐거운 표정으로 루이제를 쳐다보았다.

“그럼, 어리지 않고말고.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루이제 양.”

대답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루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딸의 철없는 태도에 자작은 쩔쩔매는 시늉을 하다 인사도 없이 어영부영 물러나 버렸다.

연회에 모인 귀족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지만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아르사크는 진심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못 믿겠다는 얼굴로 서 있을 건가?”

인기척도 없이 곁으로 다가온 에리히가 말을 걸었다. 아르사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믿는 척이라도 해볼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폐하께서 통치를 어떻게 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첫날부터 황제인 날 책망하다니, 모르는 사이 제왕학이라도 들었나?”

“잊으셨나 본데 전 족장이었습니다. 토르갈이 제국만큼 넓었다면 제가 황제였겠죠.”

“토르갈 부족민들은 하나같이 황제 앞에서도 자유분방하기가 이를 데 없던데, 그것도 그대의 통치 방식이라고 할 텐가?”

“토르갈의 기상이 자유로운 것은 자연이 길러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지배를 받아 만들어진 것이 아니죠.”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잠시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금세 안색을 바꾸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 번은 춤을 춰야겠는데 지금이 적당한 때인 것 같군.”

음악이 바뀌며 사람들이 물러나는 자리를 보며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눈앞에 내민 손을 잡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춤을 못 춥니다.”

“그런 것치고는 어쩐 일로 순순하지?”

“로즈안나와 약속한 게 있어서요.”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중앙으로 나서자 다른 사람들은 뒤로 물러섰다. 합창하는 듯한 현악기의 음이 드높은 천장까지 물결치듯 울리자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이끌며 발을 떼었다.

그러나 미처 네 걸음을 딛기도 전에 아르사크의 발이 에리히의 발등을 걷어찼다. 여섯 걸음째에는 발등을 밟고, 한 바퀴 돌았을 때는 힐굽이 에리히의 발목을 툭 걷어찼다.

“지금 일부러 이러지?”

한 곡이 반도 지나기 전에 기어이 인내심이 바닥난 에리히가 아르사크의 허리에 얹힌 손에 힘을 주었다. 아르사크도 질세라 그의 어깨를 짓누르듯이 꽉 잡으면서 표정만 화사하게 웃었다.

“춤을 못 춘다는 말은 어디로 들으셨나요?”

“족장의 딸이 춤도 못 춰서 어떡해?”

“토르갈의 춤은 이렇지 않습니다. 훨씬 더 자유분방하죠.”

“아하, 그러시다.”

에리히의 입가에 별안간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아르사크는 자신의 허리를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악단의 연주를 멈추게 한 에리히가 손짓을 하자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문가를 둘러싸고 서 있던 귀족들이 웅성대며 물러나자 아르사크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아르사크는 이번에야말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입을 딱 벌렸다.

“어떻게……?”

화려하게 차린 귀족들 사이로 가장 먼저 모습을 내민 것은 티리야였다. 티리야만이 아니라 알린을 비롯한 토르갈의 부족민들이 아르사크를 보고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크게 축하를 할 때나 입는 것임을 알아차린 아르사크의 표정에 서서히 웃음이 떠올랐다.

“그 자유분방하다는 춤 좀 구경해 볼까 하는데. 그대의 춤 솜씨가 지금과 좀 다를지, 어떨지도.”

티리야로부터 건네받은 토르갈의 붉은 장식 천을 아르사크의 어깨에 둘러준 에리히가 말했다.

토르갈에서 가져온 악기를 든 이들이 연주를 시작하자 귀족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번개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고 있던 답답한 구두를 벗어 던진 아르사크는 맨발인 채로 드레스 자락을 쥔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쿵 울릴 만큼 빠르고 경쾌한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는 아르사크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공기마저도 쿵쿵거리면서 아르사크의 주변에 바람이 되어 모여드는 것 같다.

아르사크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익숙한 고향의 음악을 듣자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아무리 움직여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발끝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대체 저게 무슨 짓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에… 보는 제가 다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넋을 놓은 표정으로 둘러서 있던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에리히는 희미한, 아주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팔짱을 끼고 아르사크를 지켜보았다.

우아함도 없다. 조신하지도 않다. 그러나 토르갈의 춤은 변화무쌍했다. 어떤 움직임은 싸움을 치르기 전 사기를 북돋는 전사 같았다가, 또 어떤 순간에는 엄숙하고 자애로운 신 같기도 했다. 아르사크의 말마따나 자연을 닮은 자유로움이다.

고상하게 사뿐사뿐 움직이지 않는 아르사크의 모습은 그야말로 야생마처럼 생기가 넘쳤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한 동작, 한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춤을 멈춘 아르사크가 한쪽 팔을 척 들어 올렸다. 에리히가 짧게 박수를 치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귀족들도 덩달아 박수를 보냈다.

붉게 상기된 뺨과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 활짝 웃으며 걸어오는 아르사크를 내려다보던 에리히가 말했다.

“2년 후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내일 당장 그대를 쫓아내라는 탄원이 들어올지도 모르겠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약속을 깰 계획이시라면 일찌감치 포기하시지요.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치구를 받아낼 생각이니까요.”

“신발이나 신어.”

손끝에 걸린 구두를 보며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오랜만에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25장 접근 (1)

연회가 끝난 뒤에도 아르사크는 곧장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로즈안나는 미리 시녀들을 시켜 욕조 안에 따뜻한 물을 채워두라는 언질을 주었고, 아르사크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욕탕으로 밀어 넣다시피 해 몸을 씻겨주었다.

피로가 쌓인지라 제법 순순히 로즈안나의 시중을 받아 목욕을 하던 아르사크는, 로즈안나가 달차근한 꽃향기가 나는 향유를 목욕물에 떨어뜨리자마자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직감했다.

“로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향유가 들어간 물은 피부의 결을 따라 매끄럽게 감기며 좋은 향기를 풍겼다. 움직임을 따라 고요히 일렁거리는 물을 손바닥으로 퍼 주르르 흘리면서, 아르사크는 뭔가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로즈안나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런 게 필요할 일이 생길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람의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니까요.”

향유를 섞은 물을 꿋꿋하게 어깨에 끼얹어주며 로즈안나가 대답했다.

아르사크는 몇 마디를 더 하려다 말고 코웃음을 치며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마음을 동하게 할 만한 달콤함과 야릇한 분위기가 필요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향기는 무척 좋았다.

아르사크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로즈안나는 난로에 불을 지피고 침대를 정리한 후 인사를 하고 나갔다. 방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르사크는 창문을 통해 자신의 방 뒤쪽으로 펼쳐진 황궁의 드넓은 뜰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경비병들이 둘씩 짝을 지어 자리 교대를 하러 가는 모습이나, 등불 같은 것이 일렁이는 빛 그림자가 보였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쏟아지듯이 들이쳤다. 아르사크는 얇은 잠옷을 파고드는 찬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토르갈을 떠나올 때는 아직 어린 싹들이 움트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이제는 가지마다 제법 푸르게 싱싱한 잎들이 돋아나 있었고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 어디서든 각기 다른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초원이나 숲에 핀 들꽃이나, 사막의 척박한 바위틈에서 겨우 돋아난 풀줄기처럼 절박한 생명력은 없이 다만 화사하고 또한 화려하다. 성의 꼭대기에서부터 미끄럼을 타고 내려간 바람이 정원수를 흔들고 지나가자 연약한 꽃들이 나풀나풀 날려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으면 다들 그대가 뛰어내리는 줄 알 텐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르사크는 진짜로 놀라 떨어질 뻔했다. 앞으로 휙 기울어지려는 몸을 창틀을 붙잡은 힘으로 다시 젖혀 순식간에 창가에서 멀어진 아르사크는 당당하게도 자신의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에리히를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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