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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36화 (36/191)

36화

“아르사크 님은 참 다른 분이시죠. 지금까지 제가 보아 온 어떤 분들과도 다릅니다. 전 그분을 보고 있으면 왠지 안심이 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왜지?”

“그분은… 결코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날 갑자기 덧없이… 떠나실 분이 아니리라 믿기 때문에요.”

테오도르는 문득 들어 올릴 것처럼 움츠렸던 손을 천천히 폈다. 그리고 부드러운 웃음을 띤 채 농담하듯 말했다.

“그런 면에서는 아르사크 님을 따라갈 사람이 없긴 하지.”

“폐하께서도 아르사크 님께는 조금 다르게 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글쎄다. 만나기만 하면 싸우시기는 하지만 확실히 여태까지 진심으로 화를 내신 적이 없긴 하신 것 같구나. …아마도.”

“두 분이 조금이라도 사이가 좋아지신다면 좋겠습니다. 아르사크 님의 좋은 점을 폐하께 자주 말씀드려 주세요.”

로즈안나가 말했다. 썩 자신이 없긴 했지만, 테오도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르사크가 황후로 책봉되어 결혼하는 날은 무척이나 화창하고 맑았다. 맑고 푸르다 못해 환호성을 내지르며 반으로 죽 찢어질 것 같은 하늘 아래에서, 식이 치러지는 황궁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각기 저마다 들뜬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최종 예식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도 잠시, 사람들은 곧 새로운 황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수군거리며 각자의 방식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황후 마마, 좀 더 미소를 띠어보세요.”

“지금… 그르그… 잇즈너.”

이를 꽉 깨문 아르사크의 불분명한 발음에 로즈안나는 침통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마마, 외람되오나… 제 목을 물어뜯으시려는 것 같습니다.”

“로즈! 너 자꾸 날 못살게 굴 거야?”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일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작게 웃으며 소매를 매만져주었다.

“말 타실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때 마마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웃으시는데요.”

“마마라고 부르지 마. 그냥 부르던 대로 아르사크라고 불러.”

“하지만 그래서는 예법에…….”

“다들 날 황후 마마라고 부를 때마다 목덜미가 쭈뼛해진다니까. 날 제일 자주 부르는 건 넌데, 너까지 그러면 곧 목을 못 쓰게 되고 말 거야.”

“제가 황후 마마의 말씀을 따르면, 마마께서도 제 부탁을 들어주실 건가요?”

“무슨 부탁?”

“들어주신다고 약속해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얄밉다는 듯이 샐쭉하게 눈을 흘기고는 빡빡하게 눌린 배에 손을 얹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좋아, 무슨 부탁인지 말해봐.”

“오늘 식이 끝나고 나면 연회장에서 폐하께서 춤을 요청하실 겁니다. 제발 폐하의 다리를 걷어차거나 멱살을 잡지 말아주세요. 모든 귀족들이 모두 다 마마와 폐하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춤을 춘다는 사실은 몰랐다. 하지만 에리히가 갑자기 아르사크를 한복판으로 끌고 나가려고 했다면 로즈안나의 말마따나 이번에야말로 에리히의 정강이를 걷어찼을지도 모른다.

“…좋아, 그 정도는 약속할게.”

“아르사크 님은 어쩜 이렇게 훌륭하실까요? 제가 다 자랑스럽습니다.”

아르사크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로즈안나가 매만지고 있던 소매를 휙 걷었다.

예복을 입은 아르사크는 아름다웠다. 금과 불꽃이 뒤섞여 빛나는 것 같은 묘한 재질의 옷감이 아르사크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검은 머리카락은 굵직하게 굽이치도록 모양을 내어 하나로 고정한 다음 아래로 자연스레 늘어지도록 했다. 판에 박은 듯한 머리 모양을 한 귀족들 사이에서 아르사크가 훨씬 더 돋보이고 위엄 있게 보이도록 로즈안나는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시겠지만 좀 참으세요, 아르사크 님. 아셨죠?”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로즈. 토르갈의 사람들은 약속은 꼭 지키니까.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마지막 말에 가시가 돋쳐 있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로즈안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섬세하게 세공된 최고급의 장신구를 하나하나 아르사크에게 달아준 로즈안나는 어린 시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르사크 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물러서서 기다리고 있던 로즈안나는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로즈, 왜 그래?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아닙니다. 감탄하고 있었어요.”

“왜, 예뻐서?”

“그보다는… 처음 아르사크 님을 뵈었을 때, 저는 사실 아르사크 님께서 황후의 자리에 걸맞으신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가 만약 평범한 귀족 출신이었다면 감히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난 솔직하게 말해주는 편이 더 좋아. 네가 계속 내 시중을 들게 된다면, 그걸 명심해 줬으면 해.’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는 거야?”

“네, 바뀌었습니다. 아르사크 님은 누구보다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는 분이세요.”

“네가 인정할 정도면 날 황후답지 않다고 말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는걸.”

“제 기준이 그렇게 중요하신가요?”

“그럼. 황궁에서 제일 까다로운 사람이 너잖아. 그리고 네가 날 제일 많이 신경 쓰니까.”

툴툴거리는 것 같았지만 아르사크의 입가에는 느긋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드레스 자락이 반듯하게 끌리도록 펼치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24장 황후 (4)

황제가 황후를 맞아들이는 예식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엄숙하게 진행된다.

아르사크는 새로 최고 신관의 자리에 오른 신관의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선 채 그가 신을 대신해 내리는 축복을 받았다.

이번에도 그 어처구니없는 빛 같은 것이 번쩍거리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신관의 축복과 기도가 끝난 후에는 황제와 황후가 정해진 예물을 교환한다. 예물이라고는 하지만 황실의 결혼이라 귀족 가문이나 민간에서처럼 따로 혼수를 장만하지는 않았으므로 상징적인 일일 뿐이었다.

황제는 황후에게 한 쌍의 팔찌를, 그리고 황후는 황제의 예복에 고리 모양의 브로치를 달아 깃을 고정해 주면 끝나는 일이다.

아르사크는 예물을 교환하는 식의 과정을 줄줄 외고 있었다. 후녀로 교육을 받으면서도, 그리고 황후로 선택된 다음에도 혼인 과정에 대한 것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 중 하나였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쥔 채 팔찌를 끼워주었다. 양쪽 손목에 익숙지 않은 무게가 걸릴 때마다 아르사크는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깃 위에 브로치를 끼워준 후 그를 바라보자, 숨을 죽인 채 식을 지켜보던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그러면…….”

신관이 말했다. 그러나 에리히가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말을 막았다. 환호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르사크 역시도 의아한 얼굴로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내가 황후에게 줄 혼수가 아직 남아있으니 가져오도록 하라.”

그러자 신관이 당황하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식이 진행되는 내내 지루한 표정을 숨기려고만 애쓰고 있던 아르사크는 갑작스러운 일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누군가는 놀라 나직하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입을 벌렸다. 제각기 다른 반응들 사이에서 아르사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정말 예상치도 못했습니다, 폐하.”

“그대에게 딱 맞는 혼수가 아닌가?”

에리히가 눈짓을 하자, 시종장은 들고 있던 새장을 아르사크에게 건넸다.

튼튼하지만 정교하게 꾸며진 새장 안에는 어두운 황갈색의 매가 한 마리 있었다. 아직 어린 듯했으나 깃털은 윤기가 흐르고 눈동자는 총기 있게 빛났다. 매는 새장 안에서 아르사크를 빤히 마주 보고 있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새장에 가두어 길러도 좋으나, 듣자니 유목민들은 매를 가두어 기르지 않는다지?”

“그렇습니다. 길들이기는 해도 가두어 기르는 짐승은 아니죠.”

“그럼 그대가 좋을 대로 하라. 그리고 테오도르, 그걸 가져와.”

아르사크는 테오도르가 내민 물건의 천을 벗겼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천이 흘러내리자 아르사크의 키의 절반도 넘는 튼튼한 활이 모습을 드러냈다. 활줄 역시 나무랄 데 없이 질기고 튼튼했으며 활대는 매끄러웠다. 이만한 활이면 충분히 먼 거리에서 쏘아도 분명히 목표물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잘 만든 활은 토르갈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아르사크는 황홀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활줄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훌륭한 활이로군요, 폐하.”

“감사하다는 인사는 됐다.”

“그러죠.”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날름 대답하는 것을 보니 약이 올랐다.

테오도르는 속으로 기겁을 했지만 에리히는 픽 웃기만 하고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나가 더 있는데 그건 나중에 주지.”

“왜 지금 주지 않고요?”

말을 여기까지 끌고 올라올 수는 없지 않느냐고 대답하려던 에리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르사크를 눈 밑으로 슬금 내려다보며 말했다.

“몸 달으라고.”

아르사크는 환호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완벽한 미소를 띤 채 치맛자락 아래로 에리히의 발목을 퍽 걷어찼다.

식이 진행되는 내내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이 가장 힘들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연회가 최악이었다.

아르사크는 번쩍거리는 샹들리에 불빛과 호화로운 향, 끊이지 않는 음악과 그보다 더 번잡한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지만 이번에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숨을 돌릴 만하면 얼굴도 모르는 귀족이 찾아와 인사를 건네는 통해 한시도 입을 다물고 있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아르사크 님, 괜찮으신가요?”

“로즈, 지금 내가 괜찮아 보여?”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그 말만 벌써 다섯 번째다. 아르사크는 이를 꾹 깨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로즈안나가 그러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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