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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35화 (35/191)

35화

“폐하는… 냉혹하고 엄격한 데다 타협을 모르시는 분이 아닌가? 그러니 자네를 비롯한 중앙 귀족들도 폐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

“전하,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앞에서 변명하지 않아도 되네. 폐하께서도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셔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더욱더 황후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인데…….”

그것도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에리히에게 필요한 신붓감은 자유분방하고 말이나 잘 타는 사람이 아니라 막대한 재산과 기반을 가진 사람이다. 그처럼 명석한 인물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만무다.

홀드빅은 난데없이 원론적인 의문에 휩싸였다. 아르사크처럼 아무런 기반도 재산도 없는 인물을 굳이 후녀로 뽑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답은 하나뿐이었다.

“전하, 설마… 폐하께서는 그럼, 이번 예식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말해보게.”

위든이 말했다. 홀드빅은 무례하다는 것도 잊고 위든의 앞에서 헛웃음을 터뜨리듯 한숨을 쉬었다.

“전하,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황후를 맞을 계획이 없으셨던 게 아닌지요?”

후녀를 뽑은 것과 예식, 두 가지 모두가 꾸며낸 것이다. 에리히가 볼핀과 자신을 쳐내기 위해 준비한 한바탕의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홀드빅은 이제야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연극의 주연으로 뽑힌 것이 아르사크다. 수도의 그 누구와도, 어떤 귀족 가문과도 연관성이 없는 변방 유목민의 족장.

‘그래. 황제가 누구냐. 그런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실 리 없지.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예상치도 못한 일 말이야.’

홀드빅이 생각했다. 아르사크가 황후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에리히도 예상치 못한 사고였음이 분명했다.

하긴, 처음부터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반드시 황후의 자리에 앉히리라 결심했다는 것보다는 사고라는 점이 훨씬 더 그럴싸했다.

아르사크가 황후가 된 것은 에리히도 생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바라지도 않은 일일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바랐다고 하더라도 그게 목적이었다면 신관의 비리를 그런 방식으로 밝혀내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에리히가 따로 신탁을 받아 하필 그날 진짜로 신이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니고서야 말이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전하.”

“하게.”

“저에게 이러한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홀드빅이 말했다. 위든은 잠시 가만히 선 채 그를 쳐다보았다.

누군가를 똑바로 바라볼 때, 위든의 눈빛은 이따금 독수리처럼 매서울 때가 있었다. 아무리 온화하고 평화로운 표정이라도, 발톱을 숨기고 있는 듯한 그 날카로운 시선은 목덜미가 오싹해질 만큼 명확하게 번뜩이곤 했다.

“후작이 사라졌으니 이제 자네가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공연히 겸손은 떨지 않아도 되네.”

“…….”

“폐하와 황후 마마의 사이가 어긋난다면… 폐하께도 큰 타격이 될 걸세. 혹시나 폐하께서 황후를… 폐위시키기라도 하는 일이 생긴다면.”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홀드빅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아직 결혼식도 올리기 전인데 벌써부터 위든이 폐위를 걱정할 지경이라면, 아무리 바라지 않은 황후였다지만 에리히와의 관계가 상상 이상으로 나쁜 것이 분명하다.

‘하긴, 토르갈은… 황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법도 하지.’

홀드빅이 생각했다.

만약 황제가 아르사크를 폐위시켜 폐후로 만드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자신과 루이제에게 있어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미 패배하고 끝난 싸움터에서 느닷없이 한 번의 기회를 더 얻게 된 사람처럼, 홀드빅은 어리둥절한 놀람과 섣부른 기쁨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위든은 홀드빅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바라보다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폐하께서는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신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에게도 원성을 살 걸세. 그러니… 그런 일이 없도록 우리가 폐하를 지켜드려야 하지. 그렇지 않겠나? 자작의 생각은 어떻지?”

위든이 말했다. 순간 홀드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내 성마른 뺨이 움푹 꺼지도록 미소를 띠며 위든의 말에 동의했다.

“전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난 자네를 믿네, 자작.”

정원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마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그들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위든은 홀드빅의 마차가 남작가의 문을 쏜살같이 벗어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뜻 모를 웃음을 띠었다.

“난 정말 자네를 믿고 있어.”

23장 황후 (3)

아르사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로즈안나는 치수를 다시 재어 아르사크의 몸에 맞춘 드레스의 바느질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소매, 가슴과 허리까지, 풍성하고 넓은 아랫단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을 다시 짓다시피 해야 했다. 황궁의 직공들이 얼마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로즈안나 님, 테오도르 님이 찾아오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오도르의 모습이 나타났다. 로즈안나는 갑자기 찾아온 그를 보며 웬일이냐는 표정을 짓다가 드레스를 내려놓고 얼른 일어섰다.

시종이 나가자, 테오도르는 텅 빈 방을 한번 둘러보고는 로즈안나에게 물었다.

“로즈, 아르사크 님은 어딜 가셨기에 너만 혼자 있느냐?”

“잠시 산책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산책이라니… 너는 왜 따라가지 않고?”

“따라오면 말을 타고 그대로 시장까지 달려가시겠다는데, 제가 무슨 수로 따라가겠습니까? 가끔 갑갑해하실 땐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에요.”

로즈안나가 말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당황하고 난감해하며 어쩔 줄을 모르더니, 그간 로즈안나도 나름대로 아르사크를 다루는 방법을 익힌 모양이다.

‘아니지… 로즈안나가 아르사크 님을 다룰 줄 알게 된 게 아니라, 아르사크 님이 로즈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거겠지.’

테오도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픽 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와 달리 미적거리는 테오도르의 태도에 로즈안나는 단번에 그가 뭔가 할 말이 있어 찾아왔음을 알아차렸다.

“테오도르 님, 왜 그러시죠? 폐하께서 아르사크 님께 무슨 말이라도 전하라고 하셨나요?”

“아… 아니다. 그게 아니라 네게 줄 것이 있어서.”

테오도르가 말했다. 단추를 열고 재킷 안쪽을 뒤지던 그는 잠깐 만에 무언가 조그만 꾸러미를 꺼내어 로즈안나에게 건넸다. 빳빳하게 풀을 먹여 뭔가를 감싼 종이 꾸러미였다.

“이게 무엇인가요?”

로즈안나의 질문에, 테오도르는 잠시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내 방에서 찾은 것이다. 풀어봐.”

그러자 로즈안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꾸러미를 감싼 끈을 당겨 풀었다. 안에 든 것은 조그만 에메랄드가 박힌 머리핀이었다.

그리울 만치 눈에 익은 물건이다. 입술을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머리핀의 세공을 만져보던 로즈안나가 놀란 눈을 한 채 다시 테오도르를 쳐다봤다.

테오도르는 로즈안나의 시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며 희미하게 안타까운 미소를 띠었다.

“이게 어떻게 테오도르 님의 방에……?”

“언젠가 황녀님이 떨어트리신 것을, 돌려드려야지 하고 있다가 잊었던 모양이다. 나보다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낫지 않겠니.”

로즈안나는 여전히 떨리는 손끝으로 닳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핀을 매만졌다.

죽은 황녀가 가장 아꼈던 머리핀이다. 원래는 한 쌍으로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하나를 잃어버렸다며 무척 속상해하던 것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남은 머리핀 중 하나는 로즈안나가 가지고 있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테오도르 님.”

“황녀님의 일로… 네가 무척 마음이 다친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항상 네게 고마워하고 계신다. 다만, 폐하께선…….”

“알아요, 테오도르 님. 저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그때는… 나이가 어리셨죠. 그러니 어쩔 수 없으셨다는 것을 지금은 압니다.”

“하지만 로즈안나, 넌… 아직 폐하를 원망하고 있지 않니.”

테오도르가 말했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격식은 덜하고 좀 더 다정한 말투다.

로즈안나는 눈물이 고여 어른거리는 눈을 깜빡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도르 님,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생각?”

“만약, 황녀님이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폐하께서도 지금과는 조금 다른 분이셨을까 하는 생각을요. 옛날의 폐하는 지금처럼 냉혹하기만 한 분이 아니셨으니까요.”

“어렸을 땐 확실히 지금처럼 무섭진 않으셨지만… 그때는 나이가 어렸을 뿐, 원래 단호하고 빈틈없는 분이시다. 아마 비슷하셨을 거야.”

“그렇죠. 하지만 황녀님은 하나뿐인 오빠인 폐하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어요. 기억나세요?”

테오도르의 얼굴에 희미하게 그늘이 졌다. 로즈안나가 죽은 황녀를 그리워하는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황녀의 비극은 테오도르에게도 상처였다.

에리히는 여동생이 죽은 이후 그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도 역시 적잖은 상처를 받았음을 테오도르는 알 수 있었다.

“폐하께서도 황녀님을 무척 아껴주셨습니다. 제게도 잘해주셨고요. 그래서… 폐하를 계속 원망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테오도르 님, 지금도 황녀님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아무도… 아무도 황녀님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않았으니까요.”

황녀가 아팠을 때, 에리히와 테오도르는 그곳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로즈안나는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차피 로즈안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황녀를 간호하겠다 나서지 않았으므로 주변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로즈안나도 황녀와 똑같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로즈안나는 살았다. 그러나 황녀는 그러지 못했다.

“아르사크 님을 모시면서 네가 요즘 기운을 좀 차린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고, 폐하께서도.”

그러자 로즈안나는 눈물이 글썽한 얼굴인 채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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