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어째서 죽었지요?”
“갑자기 병에 걸려서. 원인도 몰랐고 치료할 방법도 없었지. 열 살이었다. 아직 몹시 어렸지.”
열 살에 죽었다면 황녀가 죽은 것은 10년 전의 일이다. 아르사크는 토르갈에 전염병이 돌았던 그해를 떠올렸다.
그때 토르갈에서도 수도 없이 많은 어린아이들이 손 쓸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황녀와 마찬가지로 열 살 남짓한 아이들도 있었고 그보다 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아르사크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에리히가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나는 그때 황태자였지만 고작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고, 아버님께서는 병중이긴 했으나 살아 계셨으니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 원인 모를 병이 자기들에게 옮을까 봐서 아무도 그 애의 시중을 들려 하지 않았어. 결국 그 애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 준 건 로즈안나 하나뿐이었지.”
“로즈안나라고요?”
“그래. 로즈는 내 동생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황녀와 가까운 사이라면 설마 로즈안나도 황실의 먼 일원이거나 귀족 출신이라는 말인가? 계급이 높은 황족의 최측근 시중을 드는 자는 귀족 중에서 선발하기도 한다는 것을 아르사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에리히가 말을 이었다.
“알았는지 모르지만 로즈안나도 귀족 가문의 딸이다. 다만 출생이 복잡한 서녀라 그 가문에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 사정을 아신 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로즈안나를 황궁으로 불러들여 나이가 같은 내 여동생 옆에서 시중을 들며 말벗도 하고 놀이 상대도 하도록 배려해 주신 거다. 여동생이 죽을 때 로즈안나도 고작 열 살이었지만 그 애는 매우 훌륭하게 자기 일을 해냈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로즈안나가 어떻게 혼자서도 그 많은 일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로즈안나는 그렇게 해왔던 것이다.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나와 테오도르는 내 여동생과 로즈안나를 다 같이 아꼈지만 여동생이 죽고 난 후에 로즈안나는 깊이 상심해서 단번에 거리를 두었다. 괜찮은 자리를 골라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려 했지만 황궁을 떠나려 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더군. 그런데 그런 아이더러 그대의 시중을 들라 했으니…….”
말을 하다 말고 에리히는 잠시 아르사크를 힐끔 바라보았다.
“했으니, 뭡니까?”
“내가 로즈안나에게 면목이 없다고.”
아르사크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조금 전만 해도 로즈안나의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놓고 온 장본인인지라 에리히의 말에 대놓고 반박을 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그런데 그대는 여기에 뭐 하러 온 거지? 지금쯤이면 예복 치수를 재고 있어야 할 텐데?”
‘감시라도 붙여놨나. 시시콜콜 잘도 아네.’
“치수를 재던 중에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일 뿐입니다.”
“입기 싫어서 도망 나온 거겠지.”
“아시면서 뭘 묻고 그러시나요?”
“정숙한 황후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예식에 속옷만 입고 나타나는 미치광이 짓까지 눈감아줄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
“자꾸 밉살스럽게 말씀하신다면 폐하가 속옷만 입고 나타나도록 만들어드릴 수도 있으니 말씀을 단정히 하십시오, 폐하.”
로즈안나에게 들었던 잔소리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들은 척도 않은 채 코웃음만 치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가지 끝에 달린 꽃송이를 살짝 따냈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알려줄 것이 있었는데 마침 잘됐군.”
“알려줄 것이라니요?”
흰 꽃송이를 손가락 사이로 잡은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잠시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고운 모래처럼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늘게 날렸다.
“혼인을 하면 초야를 치러야 할 것이 아닌가?”
에리히가 말했다.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오를 듯 말 듯, 희미하게 들썩이는 것을 보며 아르사크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절대 안 됩니다.”
“뭘 그렇게 정색을 하지? 설마 내가 그대를 안고 싶어서 수작이라도 부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면 굳이 내게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난 또 그대가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여.”
“이 구두가 생각보다 굽이 단단하답니다, 폐하. 제가 폐하의 정강이를 이대로 걷어찬다면 뼈에 금이 갈지 안 갈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으신가요?”
“걱정하지 않아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어차피 2년 후면 그대는 폐후가 되어 명목상 수도에서 추방된 셈이 될 테니, 일이 꼬일 만한 요소를 굳이 추가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에리히는 무표정한 얼굴에 눈빛만 미소를 띤 것처럼 가늘어진 채로 아르사크의 귀 옆에 꽃송이를 꽂았다. 이번에는 아르사크가 진저리를 쳤다.
22장 황후 (2)
볼핀 후작이 수도 밖으로 쫓겨나자 수도 귀족들은 우왕좌왕하며 서로 수군거리기에 바빴다. 누군가는 그가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도 했고, 누군가는 황제가 작정을 한 것 같으니 쉽사리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어찌 됐든 대부분 귀족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 중심 역할을 해온 후작의 자리가 난데없이 비게 되었으니 다소의 혼란은 예상된 바였고, 그 자리에 누가 치고 들어올 것인가에 관해 의견이 분분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남작과의 식사를 마친 홀드빅은 둘러앉은 사람들의 입에서 이번 예식에 대한 말이 나올 기미가 보이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자신이 자리를 뜬 후에 뒤에서 뭐라고들 떠들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자리에 앉아 웃기지도 않는 장단을 맞추는 것보다는 낫다.
그들은 원래 후작을 따르던 무리들이었지만 후작이 추방되자마자 가장 빨리 그를 모른 체했다. 그들에게 큰 가치가 없는 이상 홀드빅으로서는 굳이 욕심을 낼 만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제기랄. 꼴이 우스워진 것도 유분수지.’
얇삭한 눈이 모멸감으로 푸들푸들 떨렸다. 젊었을 때는 꽤 가느다란 선의 미남이었을 것 같지만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 그는 곱상하다기보다는 간사한 인상이다.
볼핀이 밀려 나간 것은 언제나 그보다 세력이 약했던 그에게 더없는 호재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아르사크와 그놈의 예식이었다.
‘도대체 신 따위가 어디 있느냔 말이야! 이런 일이……!’
그는 신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 신이 있다면 어째서 자신의 딸이 아니라 변방에서 온 흙투성이 여자 따위를 황후로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씨근거리며 남작가를 나선 홀드빅은 마차에 올라타려다 말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차 한 대가 남작가의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그 마차의 문에 새겨진 문양이 누구의 것인지 금세 알아보았다.
“잠시 기다려라.”
홀드빅은 자신의 마차를 등진 채 허겁지겁 달려갔다. 이윽고 새로 들어온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위든이 모습을 내밀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홀드빅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자 위든은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자작이군. 이렇게 만나는 것도 오랜만일세.”
“진작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다망하신 듯하여 결례가 되지 않을까 조심하느라 그러지 못했습니다.”
“알고 있네. 그런데 자네가 여긴 어쩐 일로?”
“아,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른 일이 생겨…….”
“그렇군.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인데 잠시 걷지 않겠나? 나도 초대를 받아 온 손님이긴 하네만, 안에 있는 손님들이 술에 좀 취한 뒤에나 들어가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군.”
위든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로 말했다.
홀드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남작 부인이 조경에 취미가 있다더니 규모는 작아도 과연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었다.
“루이제의 일은 아쉽게 되었네. 그러나 훌륭한 아가씨임에는 틀림없으니 곧 걸맞는 상대가 나타나겠지.”
그러면서 위든은 홀드빅의 안색을 힐끔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순간적으로 불만이 가득한 채 딱딱하게 얼굴이 굳었다. 홀드빅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 아니었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애지중지 기른 딸이긴 합니다만 아직 철부지 같은 부분이 있어 제국을 짊어지고 폐하를 보필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소리 말게. 루이제는 총명하고 또 아름답지. 황후가 되기에도 충분한 재목이었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러나 물론 신께서 현재 황후 마마를 선택하신 데에도 어떤 뜻이 있으시지 않겠는가?”
위든이 말했다. 홀드빅은 먼발치에서 한번 보았을 뿐인 아르사크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어금니를 꾹 다물었다.
흙먼지가 날리는 척박한 땅에서 말이나 다루던 것치고는 과히 촌스럽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외모였으나 위든의 말마따나 황후의 자리란 외모만으로 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홀드빅이 진정으로 모멸감을 느끼는 것은 어릴 때부터 수많은 교육을 받아 온 자신의 딸이 고작 그런 천방지축에게 밀렸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다 보는 앞에서 말이다.
“…그렇지요. 신이 선택하신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황후께서 폐하를 잘 보필하여 제국의 안녕을 도모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래서 걱정이야.”
위든이 혀를 가볍게 차면서 말하자 홀드빅은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전하, 걱정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홀드빅이 물었다. 위든은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이 난감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가 흠,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와 황후 마마의 관계가 그리 원활하지만은 못한 것 같아서 말일세.”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은……?”
“자네도 알다시피 황후 마마께서는 어릴 때부터 제국의 법도와 예절에 익숙한 분이 아니시네. 귀족 가문의 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무엇을 보고 들으며 자라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으시지. 그 점을 탓하지는 않네. 그러나 마마께서 너무나 자유분방한 행동을 하시는 것이 폐하께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 같더군.”
홀드빅은 위든의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현재 에리히에게 가장 가까운 친인척이고 또 신임도 받고 있었다. 볼핀 후작도 사라진 지금, 굳이 자신의 앞에서 그가 없는 말을 지어낼 것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