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로즈안나는 삽시간에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눈치를 보며 아르사크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태연했다.
“폐하께서 무엇을 찾고 계셨는지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이 사건을 조사하실 수 없습니다.”
“숙부님, 후작은 이미 이전에도 황후를 해치려 시도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벌써 죽어 어딘가에 파묻혔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 누차 말씀드렸듯 볼핀 후작은 폐하의 육촌이기도 합니다. 증거도 없고, 심지어 신관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언까지 나온 판에 억지로 후작을 끌어내리고자 하신다면 도리어 폐하께서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 혐의에서는 벗어났으나, 후작은 신관을 매수하여 신의 이름을 부정하게 행사했지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에서 추방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큰 타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에리히는 납득할 수 없었다. 볼핀 후작이 어떤 자인지는 그가 가장 잘 알았다.
고작 재산을 빼앗고 몇 년 내쫓는 것만으로 완전히 눌러버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볼핀 후작은 에리히의 적이 될 만한 귀족 대부분을 제 휘하에 두고 뒤흔드는 인물이다.
그를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니나가 죽어버림으로써 에리히는 삽시간에 가지고 있던 패를 잃고 말았다.
“확실한 다른 증거가 없이 후작을 처단하시면 후환을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이제 갓 황후를 책봉하신 이때야말로 귀족들의 신임을 보다 두텁게 하셔야 합니다.”
위든이 말했다. 에리히는 주먹을 움켜쥔 채 빠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니나의 죽음으로 분위기가 엉망이 되긴 했지만 아르사크와 에리히 사이의 계약은 무사히 완료되었다.
아르사크는 밀봉한 토지 계약서를 티리야와 알린에게 나누어준 뒤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했다.
“돌아가더라도 일단 이 계약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누가 묻거든 내가 곧 소식을 전하겠다고 해. 알았지?”
“아르사크, 정말 괜찮겠어요? 만약, 만약 황제가 또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요?”
“그렇게 되면 그때야말로 둘 중 하나는 확실히 죽는 거지. 염려 마, 티리야.”
“책봉식이 있고 난 후 연회에 나랑 티리야도 참석해도 좋다고 했는데… 우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그러니까 돌아갈게.”
알린이 말했다.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정한 표정을 짓고 티리야와 알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프지 마. 잘 먹고, 잘 자고, 가끔 말도 몰면서 건강해야 해.”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아르사크. 돌아올 거잖아요.”
“그래, 돌아갈게. 돌아갈 거야.”
그리고 아르사크는 티리야를 꼭 안았다 놓았다. 알린에게 티리야를 잘 데려갈 것을 당부한 아르사크는 그들을 태운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정원에 서 있었다.
“아르사크 님, 폐하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로즈안나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뒤숭숭하고 심란하게 반짝이던 아르사크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얘기해.”
“비리를 저지른 신관은 국법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후작가는 토지와 재산의 상당수를 몰수당했으며, 앞으로 5년간 수도에 출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딸도?”
“후작 가문의 사람이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에리히는 위든의 말대로 후작에게 추방령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신관의 증언은 결정적이었으므로 그들은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다.
후작이 추방되면서 그를 따르던 많은 귀족들도 한꺼번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수도 귀족들의 알력 다툼에 대해 잘 모르는 아르사크도 황궁의 분위기가 다소 변화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겠지?”
“…후작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리고 그 딸도. 사실 후작과 그 딸 중 누구를 더 경계해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
“그런 것이 걱정되신다면 아르사크 님도 귀족들과 관계를 쌓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아르사크 님이 필요할 때 기꺼이 도움이 되어줄 사람들을 만드셔야 합니다.”
“난 그런 건 질색인데. 둘러앉아서 눈치 싸움하는 건 영 취미가 없거든.”
“하지만 꼭 필요한 일입니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들릴 듯 말 듯 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또야? 뭔데?”
“오늘부터 거처를 옮기셔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를 하셔야죠.”
“준비? 무슨 준비?”
아르사크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로즈안나는 진심으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혼식 준비요.”
21장 황후 (1)
식 당일에 입을 드레스를 가지고 온 시종은 아르사크의 험악한 눈빛에 기가 질려 고개를 숙인 채 쩔쩔매기만 했다.
로즈안나는 기가 죽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로 꼬드겨야 이 고집 센 황후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돌려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말이 없었다.
그리고 문제의 아르사크는 아까 전부터 팔짱을 낀 채 단정하게 걸린 드레스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마, 마마… 저…….”
“꼭 이걸 입어야만 해?”
아르사크의 말에 시종이 얼른 로즈안나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로즈안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아르사크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귀엣말을 했다.
“황후 마마, 황실 예복입니다. 마음에 안 드셔도 꼭 입으셔야 합니다.”
“너무 치렁치렁하다고. 움직이다가 발에 걸려 넘어지겠어.”
“배우신 대로 천천히 기품을 갖추어 걸으신다면 결코 그럴 일은 없습니다.”
로즈안나가 눈짓을 하자 시종은 아르사크에게서 다른 말이 떨어질까 덜덜 떨며 황급히 그녀의 치수를 재었다.
입는 사람의 체격에 맞추어 치수를 조금씩 바꿀 수는 있지만 장식을 떼거나 붙이거나, 다른 옷을 입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단단한 나무 막대가 자신의 팔과 다리에 닿을 때마다 벌에 쏘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볼을 실룩거리다 로즈안나를 향해 툴툴거렸다.
“옷깃의 저 펄럭거리는 레이스라도 몇 장 떼어내면 안 돼?”
“안 됩니다, 황후 마마.”
“못된 계집애.”
“말씀을 단정히 하십시오, 마마.”
심술로 뺨을 부풀린 아르사크가 치맛자락을 확 휘두르자 무릎을 꿇은 채 치수를 재고 있던 시종이 어이쿠!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로즈안나가 곧 잔소리를 퍼부을 기세로 깐깐한 표정을 지은 순간, 아르사크는 냅다 몸을 내빼며 방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아르사크 님!”
“바람 좀 쐬고 올 거야!”
문이 벌컥 열리자 놀란 시녀들이 가늘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즈안나는 바닥에 나뒹군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종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찮아 죽겠네, 정말!’
치맛단을 들어 올린 채 복도를 내달린 아르사크는 드넓은 뜰을 가로질렀다.
아직 황궁 안의 복잡한 구조를 다 둘러보지 못해 눈에 익은 길로 가다 보니 도착한 곳이 별궁이었다. 썩 기분 전환이 될 만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사람은 적어서 숨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책봉까지의 기간 동안 수도 안에서는 떠들썩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아르사크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로즈안나는 한층 더 깐깐해진 태도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아르사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잔소리를 해댔다. 조금 있으면 잠들어 있을 때도 황후다운 자세로 자라고 잔소리를 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짓을 어떻게 2년 동안 하느냔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토지 계약이고 뭐고 당장 뛰쳐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계약서에 서명을 했거니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만한 조건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늘은 쾌청하고 맑았다. 바람이 불자 별궁의 후원 생각이 났다. 아르사크는 코르셋 때문에 잘 움직이기조차 힘든 허리를 약간 젖히며 한숨을 내쉰 뒤 후원 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처음 아르사크의 눈에 들었던 그 말은 안타깝게도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죽고 말았지만 나머지 말들은 아직 남아있었다.
로즈안나가 있었더라면 기겁을 하고 말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심술궂게 기분이 좋아진 아르사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구간 쪽으로 향했다.
‘응?’
마구간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려던 아르사크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후원에 덩그러니 서 있던 에리히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여긴 웬일이지? 이젠 이곳에 올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런 폐하께서는 어쩐 일로 여기에 계신가요?”
“황제의 좋은 점은 아무 일이 없어도 아무 데나 갈 수 있다는 점인데 몰랐나 보군.”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희고 작은 꽃이 구름처럼 무성하게 핀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꽃을 다 구경하시고. 예상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셨군요.”
“그대가 감수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놀라운데, 나는.”
“이건 무슨 나무인가요? 내가 살던 곳에서는 본 적 없는 나무인데.”
아르사크는 드높게 솟은 단단한 나무둥치와 길게 뻗은 가지를 감탄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초원이나 사막에도 나무가 자라긴 하지만 이토록 시원스럽게 풍성한 나무는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이건 자두나무다. 여름에 열매가 잔뜩 열리지.”
“이 나무를 좋아하시나요?”
아르사크가 묻자 에리히의 표정이 잠시 알 수 없는 빛으로 누그러졌다. 그러나 금세 평소대로의 표정으로 되돌아온 그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여동생이 좋아했지.”
에리히가 대답했다. 아르사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동생이 있었나요?”
“있었지. 몰랐던 모양이군.”
당연히 몰랐다. 아무도 그에게 다른 혈육이 있다는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으니까.
아르사크는 위든이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에리히는 사냥 실력이 좋지만 형제가 없어 겨룰 사람도 없었다고 했다.
“그럼, 지금 황녀님은?”
“죽었다. 살았으면 올해로 스무 살이겠군. 로즈안나와 나이가 같지.”
아르사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나뿐인―아마도― 여동생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에리히의 태도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무심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죽음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사실에 대해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고자 철저하게 속을 닫아버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