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내가 지금 여기서 네 손가락을 부러뜨릴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벌써 자백을 받아낸 적이 있어서 말이야.”
“손가락이 아니라 팔다리를 다 부러뜨려도 제게서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겁니다.”
아르사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타일러도 듣지 않고 협박도 먹히지 않았다. 이런 자들은 그야말로 죽으면 죽었지 이쪽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가능성이 없었다.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배후를 밝혀낼 거야.”
“재미있군요, 아르사크 님. 벌써 황제를 뒷배로 두고 절 겁박하시나요?”
“날 긁으려 해봐야 소용없는 짓이야, 니나. 지금 여기서 널 죽이는 것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황제는 쉽사리 널 죽이지도 않을걸.”
“제 눈을 뽑으려 들겠죠. 상관없습니다.”
니나는 더 이상 말을 잇기가 어려운 듯 마른기침을 했다. 어깨를 숙인 채 콜록거리는 니나를 내려다보던 아르사크는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들통에서 물을 떠 가져다주었다.
물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떠 놓은 것인지, 도무지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역한 색깔을 띠고 있었지만 니나는 물컵이 입술에 닿자마자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게걸스럽게 그 물을 마셨다.
“넌 살기를 바라지 않느냐?”
“제 목숨은 이제 가치가 없어요.”
“네 배후를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살려주겠어.”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것은 진심이었지만, 니나는 서글픈 듯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가세요, 시간 낭비입니다.”
니나의 고개가 앞으로 푹 꺾어졌다. 지쳐서 기절을 한 것 같았다. 한숨을 쉰 아르사크는 결국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밖에 서 있던 테오도르는 아르사크를 보자마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으려 했으나, 아르사크의 표정을 보고서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르사크 님, 어째서 이런 곳에…….”
“뭔가 알아낼 수 있을까 해서 왔지만 아무래도 글렀어.”
“폐하께서 좀 더 심문해 보라 하셨습니다.”
“글쎄. 뭘 어떻게 하건 입을 열지 않을 거야. 저런 자들은 입을 여느니 차라리 달게 죽거든.”
굳게 닫힌 문을 돌아보는 아르사크의 표정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눈을 감은 니나는 오락가락하는 의식 속에서 몇 번이고 힐데트로스의 얼굴을 보았다.
어디서도 떳떳하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신분이었던 자신을 거둬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준 것이 힐데트로스였다. 따뜻한 온정은 없었다 할지언정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미처 두 발로 일어나 걸을 나이가 되기도 전에 길거리 어딘가에 버려져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힐데트로스에게 한 번 목숨을 빚졌으니 그것을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가씨를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그 텅 빈 복도에서 제가 맹세했지요. 저는 그것을 지킬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요…….”
비몽사몽한 채 신음처럼 헛소리를 하면서, 니나는 정말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20장 추가 협상 (4)
아르사크가 결심한 이상 에리히가 내건 조건을 협상하는 데에 굳이 시간을 더 끌 필요는 없었다.
개간이 진행 중인 토지의 양도 계약서를 놓고 곧장 협상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에리히와 위든, 아르사크, 그리고 티리야와 알린이 참석한 자리였다.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는 멀찌감치 물러선 채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를 지켜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위든이 참석한 이유는 아르사크가 에리히 이외의 증인을 한 명 더 원했기 때문이다.
위든은 온화하기는 했지만 지긋한 연배답게 보수적이었으므로 마치 담보를 걸고 거래를 하는 듯한 이 상황이 딱히 마뜩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로서도 달리 아르사크를 설득할 재간은 없었으므로 결국 이것이 최선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도 읽어봐.”
에리히가 내민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확인한 아르사크는 티리야와 알린에게도 그것을 읽도록 했다.
잔뜩 주눅이 든 알린에 비해 티리야는 눈빛으로 종이에 불이라도 지를 기세였다. 아르사크가 글자를 가르쳐 줄 때는 이런 것 배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며 종알종알 불평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무척이나 쓸모가 있었다.
“이… ‘그 외 토지를 포함한’이라는 부분… 말인데요. 아니, 말입니다.”
눈치를 살피던 알린이 말했다. 에리히는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 토지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티리야도 그것이 궁금했다는 듯이 에리히 쪽을 쳐다봤다. 에리히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더니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개간이 완료되면 자치구 영토의 대부분은 농경지로서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지를 제외한 다른 구역, 이를테면 숲과 산맥도 영토 안에 어느 정도 포함이 된다. 그 숲까지도 너희들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너희들은 사냥을 주로 하는 민족이 아니냐. 숲이 있으면 사냥을 할 수도 있겠지. 농사를 짓다가 지겨워지면 사슴이라도 잡으면 되잖아.”
에리히가 말했다.
티리야는 그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삐딱한 표정을 지었지만 알린은 어영부영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이제 세금 문제인데.”
계약서의 내용을 얼추 확인했을 무렵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위든이 입을 열었다.
자치구는 행정과 경제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자치구가 아닌 다른 영지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세금을 황실에 바치는 것이 원칙이었다.
“액수는 다른 자치구와 마찬가지로 하되, 첫 3년 동안은 정해진 액수의 7할만을 걷는 것은 어떤가?”
티리야와 알린은 입을 다문 채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그들로서는 제국 내의 자치구에서 어느 정도의 세금을 내는지 몰랐으므로 섣불리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테이블 위로 몸을 약간 기울였다.
“이 계약은 저희가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
“무슨 뜻인가?”
“자치구의 세금은 기존의 토르갈에서 제국에 바치던 것과 동일하게 해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제국에 정착하게 된 이상 자네들도 법을 거스를 수는 없네. 토르갈이 이전처럼 제국 바깥에서 독자적인 생활을 할 때와는…….”
“다른 자치구의 7할로 해주겠다.”
에리히가 위든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위든은 당황한 표정으로 에리히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르사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사크도 마찬가지로 에리히를 마주 보면서 흥정이라도 하듯 느긋하게 눈을 깜빡였다.
“2할로 해주십시오.”
“5할 반.”
“2할 반.”
“4할. 더 이상은 줄여줄 수 없다. 이 조건을 못 받아들이겠다면…….”
“좋습니다, 4할로 하지요.”
아르사크가 경쾌하게 말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러자 위든이 테이블을 탕 내리치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곳이 민간에서 흥정하는 자리인 줄 아는가? 억지 부리지 마시게. 4할이라니, 다른 귀족들이 이 일을 알면……!”
“제가 결정한 일입니다, 숙부님. 그리고 이제는 후녀가 아니라 엄연한 황후가 되었으니, 마땅한 예를 갖추어 말씀해 주십시오.”
아무리 황제의 친인척이라 하더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예의를 갖추어 존대를 해야 한다. 에리히가 그 점을 콕 집어 지적하자 위든은 다소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으나 이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그리고 황후 마마.”
아르사크는 별다른 대꾸 없이 마땅한 일이라는 듯 눈을 살짝 깜빡였다.
티리야는 위든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계약서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토지 계약서는 나와 황후, 토르갈의 대표인 두 사람이 가지고 있도록 하지.”
“그리고 2년 후까지라는 약속도 문서로 만들어주십시오.”
“좋아, 그러지.”
“2년 후라니요?”
미간을 찡그린 위든이 의아한 표정으로 에리히를 쳐다보며 물었다.
“황후는 개간이 완료되는 즉시 폐후되어 자치구로 갈 것입니다.”
그의 말에 놀란 것은 위든뿐만이 아니었다.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테오도르와 로즈안나가 동시에 숨을 삼키다 말고 딸꾹질을 했다.
위든은 자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폐후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혼인은 나의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원래대로라면 황후를 맞이할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은 숙부님도 아셨던 사실이 아닙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2년 후에는 제가 책임지고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위든은 그야말로 기가 막혀 뒤로 넘어갈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아르사크가 고집을 부리리라는 사실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일, 그러나 에리히가 뭔가 해결할 방도를 찾아낼 것이라 생각은 했으면서도 이런 방식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문서는 나중에 따로 만들어 그대에게 주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르사크가 다시금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하자 에리히가 입맛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문이 덜컥 열리더니 사색이 된 병사가 구르듯이 뛰어 들어왔다. 놀란 테오도르가 얼른 그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에리히는 무슨 일인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웬 소란이냐.”
“폐하, 그… 그, 황후 마마를 시살하려 했던 죄인이, 그 시녀가…….”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죽었습니다. 자신은 신관의 사주를 받았다고 증언한 뒤에 그대로…….”
병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런 와중에 아르사크만은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에리히는 금방이라도 병사의 목을 쳐버릴 것 같은 기세로 테이블을 돌아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신관의 사주를 받았다?”
“…예, 폐하. 분명…….”
“그리고 지금은 죽었다고?”
“그, 그렇… 그렇습니다. 보고를 드리기 위해 잠시 가두어놓은 사이, 그만…….”
“테오도르, 이놈을 끌고 나가 목을 쳐라. 그리고 지하에서 감시하던 병사들도 전부 다 죽여라.”
“폐하!”
위든과 테오도르가 동시에 소리쳤다. 병사는 차마 변명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후들후들 떨면서 에리히의 발치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폐하, 무고한 병사들입니다. 함부로 죽이실 수 없습니다.”
“무고라니요? 주어진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병사를 군법으로 다스릴 뿐입니다, 숙부님.”
“테오도르, 병사를 데리고 나가게. 폐하,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위든이 눈짓하자 테오도르는 다리가 풀린 병사를 질질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