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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31화 (31/191)

31화

19장 추가 협상 (3)

“야밤에 제 발로 황제의 침실까지 들어오다니 배짱이 좋은데.”

문을 닫은 에리히가 잠이 다 깬 목소리로 말했다. 널찍한 침실의 중앙에 선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폐하야말로, 호위기사도 없이 괜찮으시겠습니까? 맨몸으로 절 상대하시기는 버거울 텐데요.”

“난 너무 적극적인 건 취향이 아니니까 적당히 해둬.”

의자라도 걷어차서 저놈의 입을 좀 다물게 해버릴까. 아르사크는 발끝에 걸리는 의자 다리를 툭, 툭 건드리다가 겨우 화를 삭였다.

에리히는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을 문지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야기는 나눴나?”

“조건에 대해 더 정확히 설명해 주시지요. 어떤 땅인지, 모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이 확실한지, 왜 하필 2년인지.”

아르사크의 목소리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심문이라도 하는 듯이 살기등등했지만 에리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에리히라고 해서 아르사크를 반드시 황후로 맞아들이고 싶을 만큼 그녀가 마음에 드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그녀가 황후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이미 충분했으므로 에리히의 입장에서도 어차피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더 내려간 지역에서 대규모 개간 사업이 진행 중이다. 제국의 땅은 산지와 숲이 많아서 목재와 광산에서 나오는 광물을 이용해 무역을 해왔지만 수십 년 전부터 슬슬 쓸 만한 것들은 바닥이 나고 있던 참이라. 그래서 불필요해진 숲을 개간하여 농경지를 만드는 중이다. 이미 한두 해 전부터 제법 수확을 내고 있는 곳들도 있지.”

“그래서요?”

“지금 진행 중인 개간이 완료되려면 2년 정도가 걸린다. 개간이 끝나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면 그 땅을 토르갈의 자치구로 주지.”

자치구라는 말에 아르사크의 눈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똑같은 규모의 땅이라고 해도 자치구와 자치구가 아닌 곳의 차이는 크다. 자치구로 지정된 영지는 일정한 액수의 세금만 낸다면 기본적으로 황제나 중앙 귀족들의 자잘한 간섭 없이 운영이 가능하다. 지역 내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이용해 따로 무역을 하거나 상업 지구를 건설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대에게 그만큼의 시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럼 그 이후에는? 날 어떻게 내보낼 건가요?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신의 선택을 무시할 수 있게 되기라도 하나요?”

“폐후로 만들어주겠다.”

“폐후?”

“그래. 그러니 엄숙하고 자애로운 황후 노릇을 할 필요도 없어. 그대가 지금까지처럼 날뛰어서 귀족들의 눈 밖에 난다면 좀 더 일이 쉽겠지.”

“그때 가서 또 당신이 말을 바꾼다면?”

“그래야만 하는 일이 생긴다면.”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에리히가 몸을 일으켰다. 아르사크는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가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인 에리히의 옆얼굴에 비친 촛불이 타는 노을처럼 붉게 빛났다.

“그때야말로 날 죽여도 원망하지 않겠다.”

아르사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에리히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것이 약속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폐하의 목숨은 제게 별 가치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대가 떠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는 되겠지. 어차피 그럴 작정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러니 이 야밤에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겠지. 내 말이 틀렸어?”

누군가 듣기라도 했다면 당장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말을 참으로 덤덤하게도 했다.

아르사크는 잠시 미간을 좁히며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계산해 보았다. 사냥을 할 수도 가축을 기를 수도 없게 되었지만 부족민들은 그 사실에 절망하거나 원통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자부심은 있었겠지만 먹고사는 문제와 저울질했을 때 어느 쪽에 더 무게가 실릴 것인가는 어차피 뻔한 일이었다.

아르사크 자신이 부족을 구하기 위해 굴욕적인 심정으로 여기까지 온 것처럼. 누구에게나 삶은 중요한 것이다. 그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아르사크는 그것을 택할 것이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셔야 할 것입니다.”

“나도 그대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다. 황후로 앉히는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폐위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시켜주지.”

“참으로 낭만적이시네요.”

* * *

“심문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에리히의 질문에 테오도르는 순간적으로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신관은 자백을 했습니다. 축일과 수확제를 비롯한 여러 큰 행사에서 신탁을 조작해 왔으며, 이번 예식을 치르기 전, 볼핀 후작과 따로 사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증언도 확보한 상태입니다.”

“그 시녀는?”

“…아직 아무런 자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자백을 안 해?”

테오도르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에리히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툭 팽개치다시피 내려놓으며 몸을 돌려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자백을 안 하면 하게 만들어야지.”

“…폐하, 심문 중입니다. 조금 더 기다리시면…….”

“감히 황제가 선택한 후녀를 시해하려던 자다. 심지어 발칙하게 위장하고 숨어들기까지 했지. 제까짓 것이 혼자서 그런 일을 벌였을 리 만무하지 않느냐? 뒤에서 사주한 것이 누군지, 이름 한 자 하나도 놓치지 말고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입을 열지 않으면 말을 할 때까지 이를 하나씩 뽑아라. 이가 다 빠져도 말을 하지 않으면 뼈를 하나씩 부러뜨리고, 그래도 버틴다면 눈을 뽑아버려.”

듣기만 해도 속이 서늘해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에리히의 태도에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무릎에 힘을 주었다.

물불을 따지지 않고 덤벼드는 아르사크에게 경악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는 원래 이런 인물이었다. 냉혹하고 비정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도 없이 많은 귀족들이 그의 냉정한 방침에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섣불리 나서서 덤벼들 엄두를 못 내는 것도 그의 이런 성격 덕분이다. 눈 밖에 나면 그때부터는 목숨을 내놔야 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십시오.”

“테오, 네 녀석은 너무 물러. 그게 탈이야.”

에리히가 혀를 찼다. 그다지 변명할 말이 없어서, 테오도르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약간 숙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아르사크에게는 그토록 관대하게 구는 것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단순히 그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 이해하고 넘기기엔 아르사크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나 기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후작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틀림없어. 이번에 뿌리를 뽑지 못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위든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렸다. 에리히는 테오도르에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에리히의 서재를 나선 테오도르는 신관과 니나가 감금되어 있는 지하로 향했다. 돌로 쌓아놓은 벽은 지독하게 습하고 어디서든 쿰쿰하고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지키고 서 있던 병사들이 문을 열어줬다. 안으로 들어간 테오도르는 발목에 사슬을 매단 채 철창 안에 쓰러져 있는 늙은 신관을 쳐다보다 미간을 좁히며 따라온 병사를 돌아보았다.

“그 시녀는?”

“안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저, 그… 후녀, 아, 아니. 화… 황후께서 와 계십니다.”

황후라는 말을 할 때, 얇은 헬름 아래의 표정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테오도르는 곧장 병사의 어깨를 잡아채며 그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했느냐?”

“그, 황후께서, 오셔서, 잠시… 만나봐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 저희들이 막을 수가 없었… 없었습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테오도르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붙잡고 있던 병사의 몸을 패대기치듯 밀쳐버린 테오도르가 문을 열려 했으나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아르사크 님! 테오도르입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난 괜찮으니 밖에서 기다려라.”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아르사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일단 안심은 되었지만 테오도르는 문밖을 서성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눈치를 보며 죽어나는 것은 병사들이었다. 그들로서는 아르사크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누구에게든 이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뭘 멍하니 섰어! 가서 문을 지키고 서 있지 않고!”

“아, 네! 아, 알겠습니다!”

사색이 된 병사가 허둥지둥 바깥으로 뛰어갔다. 테오도르는 문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기울였지만 안쪽은 조용했다.

소란이 멎기를 기다리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던 아르사크는 바깥이 조용해지자 다시 니나를 내려다보았다.

갇혀있기는 했지만 아직 그다지 심하게 심문을 받은 것은 아닌 듯, 얼굴의 상처에 딱지가 앉고 지저분한 것을 빼면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해서인지 눈 아래가 퀭하게 꺼졌고 숨소리도 약했다.

“다시 묻겠어.”

아르사크가 말했다. 니나는 바닥에 앉은 채 빛없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실없이 웃었다.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너는 신관의 사주를 받았다고 내게 말했지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저 늙은 신관은 기껏해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의 힘이나 꾸며낼 뿐, 나를 죽일 만큼 내게 원한을 갖고 있지는 않아. 지금껏 꾸며낸 신탁으로 사람들을 속여왔는데, 이제 와서 굳이 너를 이용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넌 죽어, 니나.”

“죽이세요. 전 괜찮으니. 무슨 짓을 한들 제게서 다른 대답을 듣지는 못할 것입니다.”

“너를 사주한 것은 후작의 딸이지?”

니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 찰나의 방심 때문에 모든 것을 자백한 꼴이 되어버렸지만 아르사크를 올려다보는 표정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태연했다.

“아닙니다. 저는 신관의 사주를 받았습니다.”

“네 목숨까지 버려가며 지키려는 이유가 뭐야? 약점이라도 잡혔어?”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저는 신관의 사주를 받았을 뿐, 후작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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