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18장 추가 협상 (2)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까마득한 평원에서 나고 자란 알린의 눈에는 제국과 수도의 모든 것들이 다 신기하기만 했다. 벽돌을 쌓아 지어 올린 건물이며 어딜 가나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거리들, 시장의 좌판마다 쌓인 온갖 물건까지.
이따금 가축에게 풀을 먹이러 말이나 양 떼를 몰고 멀리까지 나가다 보면 더 이상 아무 데도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곳과 수도는 천지 차이였다. 그러나 수도의 마을보다도, 시장보다도, 귀족들의 저택보다도 황궁은 더 어마어마했다.
“그만 입 좀 다물어. 벌레 들어가겠어.”
으리으리하게 넓은 방과 화려한 실내장식에 알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꼴이 티리야는 눈꼴시었다.
그녀도 알린과 마찬가지로 수도에 오기 전까지는 평생 부족 내에서만 살았지만 북적거리는 거리와 마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반강제로 수도까지 와 정착하게 된 이후, 부족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제국의 사람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음식이나 말투까지 점차 달라져 가는 것도 티리야는 싫었다.
“내버려 둬, 티리야. 차 마시렴.”
아르사크가 말했다.
“여기 차는 입에 안 맞아요. 너무 묽고 이상한 냄새만 나요.”
“어쩔 수 없잖아. 여기 사람들은 말젖이라면 질색하던데. 난 이것도 맛있더라.”
알린이 눈치도 없이 거들며 차를 홀짝거리자 티리야는 한 대 패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르사크는 힘이 좀 빠진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찻물로 목을 축였다.
“아르사크, 황후가 된 거예요?”
고개를 숙인 채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던 티리야가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아르사크의 곁에 서 있던 로즈안나는 눈치를 살피듯 곁눈질을 하며 아르사크의 찻잔에 차를 좀 더 채워주었다.
“그렇다고 하네.”
아르사크는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덤덤하게 대답했다.
티리야는 온 얼굴을 구긴 채 거의 울기 직전인 표정을 짓고 있다가 테이블 아래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으면 아르사크도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야, 티리야. 무슨 그런 말을… 아르사크가 포로로 잡혀 온 것도 아니잖아.”
“시끄러워, 알린!”
티리야가 소리를 지르자 알린은 찔끔한 표정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르사크는 티리야를 달래주고 싶었지만 자기 자신도 현재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에리히는 조건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간단한 것들은 티리야와 알린에게 먼저 말해주었으니 셋이서 이야기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황후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없었다.
‘어차피 황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붙들어 두려는 거야.’
아르사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에리히는 자신을 황후로 만들겠노라고 분명히 말했다. 아르사크가 아무리 반발해 봐야 그는 황후 책봉에 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할 마음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황제와 전면전을 벌일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아르사크는 어떤 방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했다. 생각을 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나 생각을 해야 한다.
“황제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봐.”
훌쩍거리기 시작한 티리야의 어깨를 토닥이며, 아르사크는 알린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알린은 티리야의 매서운 눈길을 피해 접시 위의 과일을 한 조각 집어 먹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땅을 주겠대.”
“땅? 무슨 땅?”
“자세히는 설명해 주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보다 더 넓고 살기 편한 곳이라고 했어. 농사를 짓기도 충분할 거라고…….”
농사라.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했던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이 년만 황후의 자리에 있어 준다면,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땅을 주겠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들 지내지?”
“잘들 지내고 있어. 사실… 다들 아주 편한 것 같아. 먹을 것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고… 밤낮으로 가축들 수를 세고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가축들은 다 어떻게 했어? 제법 수가 많았는데, 그걸 다 거둬 키울 만큼 넓은 곳이야?”
“전부 팔았어요.”
알린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티리야가 울음을 삼키며 매섭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깨를 토닥이던 아르사크의 손이 문득 멈췄다.
“말도, 양도, 전부 다 팔았어요. 매도요. 다들 이제 필요가 없다면서.”
“야, 티리야. 그래도 그걸 팔아서 다들 장사를 시작…….”
“우리가 장사꾼이야? 밤낮 앉아서 돈이나 세고 어떡하면 흥정을 잘해볼까 그 궁리밖에 안 하게 됐어! 그게 좋아? 난 싫어!”
티리야는 한참 동안이나 참았던 것을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털어놓았다.
아르사크가 자신에게 부족을 보호하라 맡긴 것을 거절할 수 없어서, 부족민들 대다수가 원하고 모두가 살 수 있는 방향을 선택하긴 했지만 그건 티리야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알린은 아르사크와 티리야의 눈치를 동시에 보면서 미간을 짚고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야.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도 있지만 규모가 너무 작아서 그것만으로 먹고살기는 힘들거든. 사냥을 나가려고 해도 이 근방 숲들은 죄다 황제 아니면 귀족들의 소유라서 우리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 그러니 말도, 매도, 이젠 다 소용이 없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아르사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물었다.
“분위기는 어때?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 일전에 티리야가 말하기로는… 다들 적응한 것 같다고 하던데.”
알린은 입술을 안으로 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은 적을 거야. 아르사크… 네가 돌아온다고 해도 말이야.”
“넌 어떤데? 알린.”
아르사크가 묻자 알린의 귓불이 붉어졌다.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입가와 귓가를 연신 매만지던 알린이 기어들어 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다시 토르갈을 이끌겠다고 하면 너를 따라갈 거야. 어릴 때부터 항상 대장은 너였잖아. 우리 또래는 전부 다 네 뒤만 따라다니며 자랐지. 넌 여전히 우리의 족장이고 내 친구야. 하지만…….”
“하지만?”
“…아르사크, 우리 고향은 너무 척박해. 너도 알잖아. 이제는 옛날처럼 물자를 교환할 다른 부족들도 거의 없고…….”
“배신자.”
티리야가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아르사크는 티리야를 향해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알린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티리야,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언제 척박하지 않은 땅에 산 적이 있어요? 그런 땅에서도 우리는 잘 살아왔잖아요.”
“나도 알아. 나도 너만큼이나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나와 너 그리고 알린. 우리 셋만 돌아가서 오손도손 굶어 죽는 건 말이 안 돼.”
그렇게 되면 토르갈의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르사크는 화가 잔뜩 난 티리야와 알린을 일단 쉬도록 했다. 로즈안나는 그들의 잠자리도 직접 꼼꼼히 보아준 후 아르사크에게로 돌아와 테이블을 치웠다.
“로즈.”
아르사크의 목소리에 찻주전자와 접시들을 쟁반에 올려놓던 로즈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네, 아르사크 님. 말씀하십시오.”
“미안해.”
느닷없이 사과를 하자 로즈안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무엇에 대한 사과이신지요?”
“너한테 못된 말을 했잖아. 진심은 아니었어. 오늘 널 못 오게 하려고 그런 거야. 위험했을 테니까.”
로즈안나는 그제야 아르사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잠시 말이 없던 로즈안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다시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티리야는 얌전히 자려고 하던?”
“글쎄요, 제게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던걸요.”
“고집이 세서 그래.”
당신만 할까요. 로즈안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음을 깨물었다.
로즈안나가 테이블을 다 치우고 난로의 불을 다시 지필 동안, 한참이나 미동도 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아르사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황제를 만나고 올게.”
“지금요? 이미 잠자리에 드셨을 겁니다. 내일…….”
“깨우면 되지. 한시가 바빠.”
아르사크는 로즈안나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방을 뛰쳐나갔다. 경비들이 줄줄이 지키고 서 있어 어차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려던 로즈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장작이나 마저 정리했다.
에리히의 침실 밖을 지키고 서 있던 테오도르는 불쑥 나타난 아르사크를 보고 기겁을 했다.
“아르사크 님, 이런 시간에 여길… 경비들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들어오신 겁니까?”
“내가 황후가 되었으니 말을 안 들으면 전부 다 목을 쳐버리겠다고 했지.”
뻔뻔하기까지 한 대답에 테오도르는 그야말로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황제의 침전이 있는 곳은 입구에서부터 복도까지 그야말로 몇 걸음마다 경비병들이 서 있는데, 그 많은 수의 병사들을 일일이 다 협박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폐하께서 이미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럼 깨워.”
“제 목이 날아가면 폐하는 누가 지키고요?”
“지킬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 네 목을 치지 않겠지. 그런데 나는 네 목을 날릴 수 있거든, 테오도르. 왜냐면 난 네 경호가 필요 없으니까. 어쩔 테야. 황제를 깨울래? 아니면 날 막을래? 미리 말해두지만, 난 지금 기분이 아주 나빠.”
테오도르는 자신의 일과 인생에 대해 진심으로 회의를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제의 호위기사직을 맡느니 차라리 얌전히 작위나 물려받아 농사짓는 사람들이나 돕고 살 것을.
“안 깨울 거야?!”
아르사크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굳게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선잠이 들었다 깬 에리히가 잠옷 바람인 채 잔뜩 불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테오도르, 일 똑바로 안 할 테냐? 죽고 싶어?”
“…폐하, 아르사크 님을 설득하던 중이었…….”
“조건이 뭔지 얘기 좀 하죠.”
테오도르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먹은 아르사크는 문을 짚고 선 에리히의 팔을 턱 밀치며 침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침없는 돌발 행동에 에리히는 물론 테오도르도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
“…테오, 너는 나중에 나 좀 보자.”
에리히가 말했다. 다시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오도르는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 사직서를 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