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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29화 (29/191)

29화

“에리히 님…….”

“시끄러워! 지금 생각 중이잖아.”

에리히는 짜증스러운 대꾸를 내뱉고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가 아픈데 테오도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쓸모없는 녀석.

테오도르가 들었으면 억울해서 잠도 안 왔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에리히는 다 식어버린 찻잔을 멀찌감치 밀었다.

예식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황후가 결정되고 난 후, 그대로 책봉식까지 축제 기간이 시작되어야 하지만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들떠서 춤추고 노래하지 않았다. 모두 다 얼빠진 표정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갔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조용했다.

황제로서 이 사태를 수습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에리히 역시도 당장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신관과 그 시녀의 심문은 어떻게 되었지?”

“조사 중입니다. 시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아 일단 가두어 두었습니다.”

“깨어나면 나에게 바로 보고해라. 분명히 후작가와 연관이 있을 테지. 후녀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이번에야말로 목을 매달아버릴 수 있을 테니까.”

테오도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입가를 문질렀다.

“별궁으로부터 다른 말은 없나?”

“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깨어나서 날뛰기 시작하면 로즈안나 혼자서는 무리일 테니 병사들을 배치해 둬. 별궁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단속하라고 일러라.”

무슨 용이라도 잡았나. 테오도르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에리히 님, 하지만…….”

“내 말대로 해.”

에리히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이 날카로운 눈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하면 아르사크가 더 반발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테오도르는 이번에도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르사크에게 일어난 일은 에리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예식을 보기 위해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런 사태를 겪어본 적 없었다.

수확제나 축일마다 신관들이 예식을 거행하고 종탑이 빛날 때마다 사람들은 그것이 신의 힘이며 제국을 위한 신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까발려진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신관의 비리를 드러내어 황제의 권한을 보다 강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은 에리히가 원했던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사고―에리히의 입장에서는―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진짜 신의 빛이라니.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의 기억을 통째로 없애버리지 않는 이상 오늘의 일은 에리히가 늙어 죽을 때까지 두고두고 그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 분명했다.

“폐하께서는… 아르사크 님을 황후로 맞이하실 것입니까?”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묻자, 에리히는 또 한 번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

“그러지 않을 방도가 있나?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았잖아. 이렇게 된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신관들을 끌어내리려고 했는데 도리어 힘만 실어준 꼴이 되었군.”

“제가 무엇을 하면 폐하께 도움이 되겠습니까?”

테오도르가 물었다. 에리히는 창밖을 쳐다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훑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망나니가 날 죽이려고 할 때 막아줘야지.”

* * *

테라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아르사크를 로즈안나는 혼자서 돌봤다. 테오도르가 다른 시녀들을 보내주었지만 로즈안나는 그들을 전부 다 내보냈다. 니나의 정체에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아르사크의 방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비어 있던 방을 사용해야 했다.

로즈안나는 소리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빠른 속도로 해냈다. 아르사크의 이마에 향유를 발라주고 손발을 따뜻한 천으로 감싸고, 벽난로를 지펴 서늘한 방 안을 데웠다.

기절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르사크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로즈안나는 침대 옆에 앉아 물수건이 식지 않도록 계속해서 따뜻하게 적셔 아르사크의 손을 감싸주면서, 멍이 들고 생채기가 난 곳에 약을 발랐다.

다른 상처들은 비교적 자잘했지만 오른쪽 어깨의 멍은 꽤 심했다. 무언가 무거운 것에 두들겨 맞은 것 같았는데 그나마 뼈는 부러지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윽…….”

팔뚝에 난 상처를 조심스럽게 닦아주던 로즈안나는 별안간 튀어나온 나지막한 신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르사크 님? 아르사크 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로즈? …로즈안나, 너니?”

“네, 로즈안나입니다. 아르사크 님, 혹시 앞이 잘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시면 빨리…….”

“아니, …아니야. 목이 말라.”

“누워 계세요.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로즈안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르사크는 기어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입과 목 안이 마치 사막이 된 것처럼 바짝 말라 괴로웠는데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야?”

“별궁입니다. 아르사크 님이 쓰시던 방이 너무 엉망이어서 다른 방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르사크가 물었다. 로즈안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로즈안나도 아르사크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르사크 님, 지금은 일단 몸을 추스르세요. 충격이 크셨던 것 같습니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를 다시 눕히려 했지만 아르사크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처음 떠오르는 것은 불이 붙어 타오르던 가짜 장치였다. 그다음으로는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밝은 빛이 있었다.

아르사크는 그 빛에 둘러싸였던 순간을 떠올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광경도. 아르사크는 빛 속에서 그들의 얼굴을 전부 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물에 빠졌을 때처럼 무겁게 웅웅 대는 귓가에 누군가 알 수 없는 말로 끝없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르사크 님?”

“그게 신의 빛이었던 거야?”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아르사크가 느닷없이 물었다. 로즈안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은 저도 처음 봤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어떤 빛과도 달랐지요. 신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자, 로즈안나.”

아르사크는 불쑥 이불을 걷으며 침대 아래로 내려오려 했다. 놀란 로즈안나가 부축을 하려 했지만 아르사크는 휘청거리지도 비틀대지도 않았다.

“아르사크 님, 조심하세요! 어딜 가시려고요?”

“황제를 만나야겠어.”

“폐하께서는 지금 바쁘실 겁니다. 신관과… 아르사크 님을 해치려고 했던 자를 심문하셔야 하세요. 그리고…….”

“비켜, 로즈.”

아르사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치 사냥을 시작하려는 맹수 같은 눈빛에 로즈안나는 덜컥 겁이 났지만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은 안 됩니다. 너무 오랫동안 쓰러져 계셨어요. 몸 상태도…….”

“로즈안나, 비키라니까!”

귀가 쩡 울릴 만큼 크게 소리를 지른 순간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로즈안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에리히와 테오도르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타이밍이 최악이다.

“소리를 질러서 내 궁을 무너뜨릴 작정인가?”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원하시는 것을 드렸으니 이제 약속을 지키시지요.”

“일 처리를 황당하게 했더군. 누가 그렇게 난동을 부리라고 했어?”

“말 돌리지 마.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면 그때는 정말 당신 이마에 활을 쏴버릴 테니까.”

순식간에 말이 짧아지자 에리히는 아무렇지도 않은 반면 뒤에 서 있던 로즈안나와 테오도르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에리히는 옷깃 아래로 보이는 아르사크의 멍든 어깨를 잠깐 바라보았다.

“나도 약속을 지키고 싶지만,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아.”

“무슨 헛소리야?”

“겪었으니 알 것 아닌가? 가짜를 꾸며내는 신관놈들을 끌어내려고 했는데 진짜로 신탁이 내려올 줄 누가 알았겠어?”

“내 알 바 아니지. 황제는 당신이니 당신이 수습할 일이야.”

“그래, 내가 수습할 것이다. 그대를 황후로 만들어서.”

그 순간 아르사크의 손이 순식간에 에리히의 멱살을 낚아챘다.

놀란 로즈안나와 테오도르가 아르사크를 떼어내려 하는데 에리히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화풀이를 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대는 황후가 되어야만 한다.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신의 선택을 받았으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지.”

“이대로 당신의 목을 꺾어버릴 수도 있어.”

“그럼 그러든가. 내 목을 꺾고 나면 황후가 아니라 황제가 되어야 하겠군. 그걸 원하나?”

성난 숨을 몰아쉬는 아르사크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에리히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협박 같은 것이 통할 얼굴이 아니었다.

에리히는 구겨진 목깃을 툭 털어내듯이 펴고 아르사크를 내려다보았다.

“조건을 붙이지.”

“웃기지 마. 믿을 수 없으니까.”

“신탁만 아니었더라도 오늘 당장 내보냈을 것이다. 믿건 말건 자유지만 내가 이런 상황을 바란 것이 아니야. 나라고 그대를 황후로 맞이하는 게 썩 흡족할 것 같나? 그러니 둘 다 만족할 수 있을 만한 조건을 생각해 보자고. …들여보내.”

에리히가 말했다. 테오도르가 경비들에게 손짓을 하자 문이 열렸다.

아르사크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티리야와 알린은 아르사크를 보자마자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르사크!”

“무슨… 너희들이 어떻게 왔어?”

눈물부터 흩뿌리며 품에 달려드는 티리야를 끌어안은 아르사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알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품에 안긴 티리야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토르갈을 대표하여 부른 자들이다.”

아르사크는 다시 불길이 이는 것처럼 사나운 눈으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만약 또다시 부족민을 인질로 협박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땅을 줄 것이다. 물론, 감시하는 병사도 없이. 그대가 이 년 동안만 황후 노릇을 해준다면, 그대와 그대의 부족이 평생 동안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해주지. 어때, 이만하면 조건을 들어볼 마음이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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