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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28화 (28/191)

28화

에리히의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온몸의 피가 다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고치고 몸을 바로 세웠으나 초조함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종이 세 번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르사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사태에 당황한 것은 로즈안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광장에서 예식을 지켜보려던 로즈안나는 허둥지둥 별궁으로 가려 했으나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병사들이 광장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그들의 눈을 피해 별궁까지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도망치신 게 아니야.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로즈안나는 불안한 눈으로 별궁이 있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석상처럼 움직임이 없던 에리히가 몸을 일으키자, 앉아 있던 귀족들이 모두 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신관은 예식을 시작하라.”

에리히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자, 위든과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볼핀은 처진 턱살이 겹겹이 접히도록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늙은 신관이 앞으로 나서자 광장의 사람들은 저마다 기도를 올리듯 눈을 감기도 하고 손을 모으기도 했다.

앉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동도 없는 에리히의 표정은 무심하고 냉랭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묵직하게 드리운 휘장 너머에서 비교적 어린 신관 하나가 검은빛이 나는 뭔가를 들고나와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거대한 수정 덩어리를 가느다란 다리로 받쳐놓은 제구(祭具)였다.

한때는 실제로 신탁을 받는 데에 쓰인 신성한 물건이지만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한낱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무릎을 꿇으십시오.”

신관이 말하자 힐데트로스와 루이제가 제단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제단의 초에 불을 붙인 신관은 깨끗한 물에 손을 적신 뒤 후녀들의 이마를 한 번씩 짚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 놓인 제구에도 손을 얹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신탁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촛불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반투명하던 수정의 중심에서부터 희미한 빛무리 같은 것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자 광장의 사람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에리히는 입술 안쪽을 피가 맺히도록 깨물었다. 그때였다.

“기다려!”

순간, 힐데트로스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도 잊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힐데트로스, 루이제, 늙은 신관은 물론 광장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었고, 루이제는 벌떡 일어났다.

“저게… 저게 대체 누구야?”

“그, 그 후녀… 나머지 한 분 아닌가?”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로즈안나는 그만 무릎을 휘청거리다 누군가에게 어깨를 부딪혔다. 너무 놀라 숨이 멎을 뻔했다. 질린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소리들도 그 순간 로즈안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사람들의 반응 따위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제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황후 간택을 위한 예복은 엉망진창으로 찢어졌고 얼굴과 옷 곳곳에도 핏자국 같은 얼룩이 있었다. 그러나 좌중을 경악하게 한 것은 아르사크의 엉망진창인 몰골이 아닌, 그녀의 손에 멱살이 잡힌 채 오도 가도 못 한 채 버둥거리고 있는 니나였다.

아르사크는 돌처럼 굳어버린 신관들 사이를 걸어와, 힐데트로스와 루이제 앞에 니나를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이게… 이게 뭐야! 아악! 아버님! 폐하! 살려주세요!”

니나의 몸이 바닥을 구르자 루이제는 저도 모르게 난간을 붙든 채 비명을 빽 질렀다.

난데없는 사태에 얼어붙어 있던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제야 놀란 함성과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아르사크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힐데트로스의 얼굴을 노려보다 비웃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토르갈은 손님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내가 말했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아르사크 양. 신성한 예식에서 이게 무슨 짓이지요?”

“신성한 예식 좋아하네. 이까짓 늙은이 손에 오락가락하는 돌덩어리가?”

아르사크의 목소리가 드넓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헉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삼키고 일제히 신관을 올려다보았다. 늙은 신관의 주름진 얼굴이 푸들푸들 떨리더니 검붉은 빛으로 변했다. 그것은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던 볼핀 후작도 비슷했다.

“이… 이 무슨……. 당장 내려가시오! 감히……!”

신관은 온몸을 푸들푸들 떨면서 침을 튀겨가며 소리쳤다.

아르사크는 정신을 잃어 움직이지 않는 니나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별안간 날쌔게 몸을 날려 신관의 목을 움켜쥐고 쾅! 소리가 나도록 제단 위에 그의 머리를 눌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 돌발적인 행동에 힐데트로스마저도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르사크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신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네 입으로 말해, 늙은이.”

“윽… 아악……!”

“아니면 내가 직접…….”

순간, 신관의 팔이 크게 허우적거렸다. 숨을 쉬지 못한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든 순간, 휘장 뒤에서 무언가 딸깍이는 소리가 났다. 광장 아래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을, 오로지 아르사크와 신관과 힐데트로스에게만 들린 소리였다.

“신탁이……!”

“황후께서!”

수정 안에서 커진 빛무리의 빛이 힐데트로스에게로 뻗쳤다. 햇빛 아래에서도 하얗게 도드라져 눈에 띄는 빛이었다. 경악한 채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입에서 애매한 환성과 경탄이 터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에리히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힐데트로스는 창백한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 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광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무언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비추던 빛이 순식간에 뚝 꺼졌다.

“아니……!”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 순간 제단 한쪽이 쾅 소리를 내며 밑으로 내려앉았다. 아르사크는 장치를 쥔 신관의 팔을 밟은 채 무너진 제단의 휘장을 벗겼다.

겁에 질린 탄식과 나지막한 비명이 들렸다. 휘장 안쪽에는 건국자의 문양이 찍힌 제단이 아닌,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정교하게 짜 맞춘 장치가 있었다.

“‘신의 빛’이 황후를 결정한다고? 이 늙어빠진 손목이 신의 것인가? 제국의 신관 자리를 얻으려면 사기꾼이어야 하는 모양이지?”

광장에 모인 사람들 중 아르사크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귀족들까지도 사색이 되었다. 그 순간 그들은 세 종류의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신의 분노와 황제의 분노, 그리고 아르사크의 존재.

“나의 병사들은 들으라.”

별안간 에리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테오도르는 얕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예식은 중단한다. 저 해괴한 장치를 수거하고 신관들을 모두 포박해라. 감히 신탁을 사칭하여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철저하게 조사하겠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볼핀을 비롯한 귀족들은 거품을 물고 쓰러질 듯한 표정으로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에리히는 그들을 향해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다.

“관련된 자는 끝까지 추적하여 남김없이 찾아낼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테오도르였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신관들과 쓰러진 니나를 붙잡았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신관들은 병사들에게 붙잡힌 채 저마다 아우성을 쳤다. 혼이 빠져 주저앉은 힐데트로스와 루이제도 병사들에 의해 제단 아래로 끌려가다시피 내려갔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난간 너머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당장이라도 아르사크를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누가 이렇게 개망나니처럼 일을 하랬어?’

그런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쳤다.

“소원대로 해줘도 난리야.”

조그만 소리로 아르사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병사들이 가짜 제단을 들어 올리는 것을 태연히 지켜보았다. 제구의 수정을 고정하고 있던 장치가 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아르사크가 무심코 수정 쪽으로 손을 뻗었다.

“으악!”

그때였다. 제단을 들고 있던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치다 요란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웅성대며 흩어지던 사람들은 물론 에리히도 테라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신탁이…….”

에리히의 등 뒤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신음하듯 뇌까렸다. 그야말로 휘장과 같은 빛무리가 아르사크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수정을 든 아르사크는 속이 텅 빈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병사들이 팽개친 가짜 제단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것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그런데 불길의 색이 이상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푸른색의 불이다.

아르사크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그 불을 만져보려다 퍼뜩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지?’

아르사크는 멍하니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잡하고 불경한 가짜를 불태우는 푸른 불길과 자신의 온몸을 휘감은 이 선연한 빛.

“폐하, 저건…….”

넋이 나간 듯한 위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리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가 헛웃음을 쳤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빛 속에 서 있는 아르사크는 마치 날개를 단 전쟁의 신처럼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기를 봐! 종탑에서!”

“축일의 빛이야, 엄마! 그런데 훨씬 더 예뻐!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젤 예뻐!”

높이 솟아오른 종탑에서 빛이 솟구치고 있었다. 에리히가 장작과 색유리 몇 장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장담을 했던 그동안의 빛과는 완전히 달랐다.

눈부시도록 밝지만 너무나 또렷하게 보이는 신탁의 증거. 에리히조차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그것은, 역사서의 설명으로나 존재하던 ‘신의 빛’의 형상 그대로였다.

17장 추가 협상 (1)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면 말문이 막히고 사고가 멈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테오도르는 얼핏 불안한 눈으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어디까지가 계획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인지 고민해 보지만 에리히의 표정으로 보아, 무엇 하나 그의 계획대로 진행된 일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폐하, 계속 이대로 기다리고만 계실 겁니까?”

의미도 소득도 없는 침묵을 견디다 못한 테오도르가 겨우 말을 걸어보았지만 에리히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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