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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27화 (27/191)

27화

“넌 내가 없어도 상관없잖아, 로즈안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네가 날 ‘귀족 출신의 우아한 아가씨’로 만들기 위해 고생했으니 내가 꼭 황후가 돼서 너에게 보답이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로즈안나는 눈가가 어른어른 흔들리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았을까.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슨 기대를 했었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도 너와 헤어지는 게 아쉽다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무표정한 얼굴을 한 로즈안나가 등을 쭉 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딱딱하고 단조로운 억양으로 그녀가 말했다.

“…시키실 일이 더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르사크 님.”

“그래, 가봐. 원한다면 내일도 내 시중을 들러 올 필요는 없어. 옷 입히는 정도야 니나나 다른 시종들이 알아서 해줄 테니까. 내가 네게 아무 보답도 해주지 않는 걸 굳이 눈으로 확인하러 올 필요는 없지 않겠어?”

로즈안나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그러고는 아르사크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몸을 휙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쾅 하고 문을 닫자마자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올 생각이 없었노라 쏘아붙이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그날 밤은 고요히 지나갔다. 별궁의 사람들은 각자 다른 기대를 품은 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식의 아침이 밝았다.

황후가 될 인물을 결정하는 최종 예식은 축제와 비슷한 분위기에서 치러진다. 황궁의 가장 넓은 광장에 아침부터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누가 황후가 될지 가늠하며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높다랗게 지어진 건물의 테라스에 신관과 후녀들이 모습을 나타내고 종이 울리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예식이 시작된다. 식을 주관하는 신관이 의식을 거행하고 신탁을 청하면 신이 가장 적합한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아프시다니, 로즈안나 님도 너무 무리를 하셨나 보네요.”

시끌벅적한 바깥에 비해 별궁은 조용했다. 이미 모두 다 예식이 시작되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아르사크와 니나는 예복과 마지막 씨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에 입던 드레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화려해서 손이 많이 가는 옷이었다. 로즈안나가 있었다면 훨씬 더 빨리 단장을 마쳤을 것이지만 로즈안나는 오지 않았다.

“너도 꽤 무리를 했지, 니나. 예식이 끝나고 나면 푹 쉬도록 해.”

소매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며 니나는 살그머니 웃었다.

“그럴 순 없죠. 예식이 끝나도 저는 계속 일을 해야 하는걸요.”

“로즈안나는 내가 황후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게 무척 서운한 모양이던데, 너는 어때?”

느닷없는 질문에 고개를 번쩍 든 니나가 눈을 깜빡인다. 아르사크는 어색할 정도로 니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해보렴, 니나. 너도 내가 황후가 되길 바라?”

“그야… 물론이지요.”

더듬거리듯 대답한 니나는 한 박자 늦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아르사크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단추를 덜 잠근 소매를 자연스럽게 물린 아르사크는 멀리서 들려오는 첫 번째 종소리를 들었다. 로즈안나는 종이 세 번 울리면 예식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제 두 번의 종소리만이 남았다. 그 전에 식장으로 가야 한다.

“아르사크 님, 단추를…….”

“쓰러진 척 연기할 때는 감쪽같더니, 지금은 당황해서 그런 건가?”

소매를 향해 뻗은 손이 우뚝 멎었다. 니나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를 어떻게 죽였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 말해봐, 어떻게 한 건지.”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 순간, 니나는 갑자기 몸을 날려 아르사크에게로 달려들었다. 곡선을 그리며 휘두르는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아르사크는 몸을 뒤로 빼면서 니나 쪽으로 의자를 걷어찼지만 그녀는 민첩하게 피했다.

아르사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니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대체 언제부터야? 날 죽이려고 기다린 게.”

“그날 그 머저리들이 실패하지 않았으면 내가 손쓸 일도 없었겠지요.”

“후작 가문은 하나같이 속들이 좁구나. 하는 짓마다 졸렬해서 웃음밖에 안 나오는걸.”

“머잖아 웃을 일도 없어질 테니 실컷 웃어둬요.”

두 번째 종이 울렸다. 아르사크의 신경이 얼핏 그쪽으로 기울어진 사이, 니나는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우악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다시 단검을 휘둘렀다. 날이 푸르스름하게 변색된 것으로 보아 독이 발려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르사크는 아래로 몸을 숙이면서 벽난로의 불쏘시개를 낚아챘다. 아르사크의 머리 위로 휙 소리를 내며 단검이 스쳐 지나갔다. 아르사크는 급하게 불쏘시개로 검을 막았다. 손목이 쩡 울릴 정도로 센 힘이었다.

“굳은살이 박인 모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힘에 부친 척 어깨를 숙였던 아르사크는 그 반동으로 니나를 밀어내며 거추장스러운 테이블을 쾅 걷어차 넘어뜨렸다. 단 몇 걸음을 사이에 둔 채 아르사크와 대치한 니나가 코웃음을 쳤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걸레질이나 하고 차나 끓이면서 생길 만한 굳은살이 아니더구나. 그 상처들도.”

“언제부터 날 의심했나요?”

“글쎄, 네가 그 남자를 죽였을 때부터? 사람을 사주해서 날 납치하고 죽이려고 했던 인물이 실패한 자를 없애면서 고작 시녀 둘은 기절만 시키고 끝낸다? 말이 되질 않잖아. 안 그래?”

불쏘시개를 두 손으로 쥔 아르사크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내던지듯이 뛰었다. 팔을 크게 휘두르자 가느다란 쇠막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묵직한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움찔한 니나가 뒤로 한 발짝 빠르게 물러서는데 이미 앞섶이 너덜거리듯 찢겨 있었다. 니나는 불쏘시개의 뾰족한 끄트머리를 보면서 입가를 떨며 웃었다.

“굉장하시군요.”

“몰랐어?”

니나가 다시 공격할 자세를 잡기도 전에 아르사크는 재빨리 달려들어 니나의 다리를 걷어찼다. 쓸데없이 몸에 딱 맞는 예복 때문에 움직이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죽일 각오로 덤벼드는 니나의 몸놀림은 그 와중에도 감탄이 나올 만큼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했다. 그냥 싸움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도록 훈련된 움직임이었다.

“이런 일을 겪을 줄 알았으면 내 검이라도 한 자루 챙겨왔을 텐데 말이야. 로즈가 잔소리를 하든 말든.”

“이럴 줄 알고 로즈안나를 뒤로 빼돌렸잖아요? 일부러 내게 시중을 들게 해서 날 방심하게 하려고?”

“너 따위에게 내가 빈틈씩이나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난 로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오늘까지 이런 꼴을 봤으면 대체 뭐라고 했겠니?”

아르사크가 조롱하듯 말했다. 니나는 빠득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며 독을 바른 단검을 고쳐 쥐었다.

16장 예식 (3)

납치를 시도한 장정 둘을 때려눕혔음을 알았을 때부터 무시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각오를 감안하더라도 아르사크의 힘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체구에 비하면 괴력에 가까운 힘이었다.

니나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길러졌지만 아르사크는 달랐다. 그런데도 아르사크는 밀리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전사처럼,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은 빠르고 정확했다.

‘뭐 이런 괴물 같은 게 다 있어?’

일촉즉발의 순간에도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나는 오른쪽을 겨냥해 들어오는 길쭉한 불쏘시개를 재빠르게 막아냈다.

분명히 먹혀 들어갈 거라 생각한 공격이 막히자 아르사크의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니나는 아르사크의 어깨가 조금 전보다 거칠게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아무리 무지막지한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피와 살로 된 인간인 이상 체력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영원히 똑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슬슬 한계인 것 같은데, 이만 포기하시죠.”

“전부터… 내가 할 소리를 자꾸 남이 해주네.”

“어차피 이제 곧 마지막 종이 울립니다. 그러면 당신은…….”

아르사크의 입매가 뒤틀린 순간,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니나는 쓰러진 채 나뒹굴던 의자를 집어 들어 아르사크에게로 내던졌다.

아르사크는 다급하게 몸을 날렸지만 미처 다 피하지는 못했다. 의자의 단단한 모서리가 빡 소리가 나도록 어깨를 찍자마자 아르사크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터졌다. 뒷걸음질을 치던 아르사크는 벽난로의 튀어나온 장식에 등을 부딪혀 몸을 움츠렸다.

“죽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어요.”

니나의 몸이 공중에 뜬 채 뒤로 확 젖혀졌다. 예리한 단검의 날이 푸르게 번득였다. 그 순간 세 번째 종이 울렸다.

아르사크가 순간적으로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니나의 얼굴에 때 이른 희열이 불길처럼 번진 순간, 아르사크는 다시 니나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니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르사크는 웃고 있었다.

“이만 포기하지 그래, 니나.”

“일부러……!”

“한 가지는 내가 틀렸구나. 너는 방심 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상대야.”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사크는 기다란 불쏘시개 끝으로 벽난로 안의 재받이 통을 끌어내어 니나를 향해 내던졌다.

갑작스레 얼굴을 뒤덮은 매캐한 잿더미에 니나가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발이 융단에서 미끄러진 순간, 단단한 금속으로 된 불쏘시개가 단검을 쥔 손목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르사크는 빈 왼손으로 니나의 목을 움켜쥔 채 그대로 바닥에 뒤통수를 찍어 누르고 잇새로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이제 네 우두머리 목을 치러 갈까?”

* * *

사람들 사이로 당황스러운 술렁거림이 점점 번져갔다. 에리히는 처음 자리에 앉은 그 모습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광장에 모인 이들은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밀물의 수위처럼 높아져 갔다.

“폐하.”

바로 옆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에리히를 불렀지만 에리히는 눈만 한 번 깜빡였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황했으며, 한발 더 나아가 분노하고 있었다. 다만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볼핀과 홀드빅,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귀족들이 너무도 가까이에 있었다.

“폐하, 제가 가서…….”

“입 다물어라, 테오도르. 수선 떨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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