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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26화 (26/191)

26화

그러나 볼핀은 끌끌 대는 웃음소리를 내며 빈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낳는 것만 보고 죽을 수야 없지요.”

“그럼? 그 애가 황제가 될 때까지 살 작정인가?”

“간절히 기도하면 신께서 저의 정성을 알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볼핀이 말했다. 시종일관 흐릿하던 신관의 눈이 갑자기 악랄한 예리함을 띠며 번뜩이더니, 뒤이어 듣기 싫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한번 뒤흔들었다.

“그렇고말고. 신은 자비로운 분이시거든. 자네가 성의를 보인다면 결코 외면하시지 않을 걸세.”

“신관님께서도 오래 사셔야 합니다. 제 딸이 황태자를 낳으면 그 아이를 축복해 주셔야 할 테니까요.”

“그럼 나도 오늘부터 기도를 열심히 해야겠군.”

탄력이라고는 없이 흐물쩍 누그러진 입가가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 * *

아르사크의 방에서 뛰쳐나오다시피 한 로즈안나는 영 가라앉지 않는 속을 진정하기 위해 혼자 별궁의 복도를 걸었다.

로즈안나보다 급이 낮은 시종 아이들이 창틀과 유리를 닦고 있다가 로즈안나의 모습을 보자 헝겊을 내려놓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나 로즈안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앗!”

모퉁이를 도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힌 로즈안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넘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벽을 붙잡은 로즈안나는 앞을 잘 보고 다니라며 혼을 내려다 익숙한 무늬의 신발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테오도르 님!”

“로즈안나?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다치지 않았나?”

로즈안나는 황급히 옷자락을 바로잡으며 인사를 했다. 조심성 없는 시종 아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부딪힌 사람은 뜻밖에도 테오도르였다.

“별궁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경비를 서는 병사들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왔다. 너는 아르사크 님과 함께 있지 않고 혼자 어딜 가고 있었지?”

“아, 잠시… 잠시 산책 중이었습니다.”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둘러대고서야, 로즈안나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뺨을 붉혔다.

“복도에서 산책을?”

“…죄송합니다. 머리가 복잡해서 좀 진정하려고요.”

테오도르는 굳이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로즈안나처럼 꼼꼼하고 빈틈없는 사람이 머리가 복잡하다고 할 만한 일이라면 틀림없이 아르사크가 뭔가 사고를 쳤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사크 님이 또 무슨 해괴한 일을 벌이신 모양이구나.”

“아뇨, 그렇지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예식이 하루 앞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제가 긴장이 되었을 뿐.”

그럴 만도 했다. 테오도르는 안쓰러움과 약간의 답답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로즈안나를 내려다보았다.

내일 예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테오도르가 혼란에 대처할 수 있도록 에리히는 그에게 미리 무슨 일이 있을지를 알려주었지만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좀 걷겠나?”

별궁의 뜰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한적한 곳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복도를 걷는 것보다는 확실히 바깥바람을 쐬는 편이 나았다.

아르사크가 물에서 이상한 맛이 난다며 하루 종일 투정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불평하듯 털어놓으니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정말 알 수가 없는 분입니다. 말 젖도 드신다는 분이.”

“너도 투덜거릴 때가 다 있구나.”

“당연하지요, 저도 사람인걸요. …하지만 아르사크 님은 제 생각보다 훌륭하셨어요. 저는 그분이 도망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에리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토르갈 부족민이 정착한 마을에 굳이 병사까지 보내어 한바탕 연극을 벌인 것이다.

테오도르는 에리히가 그들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르사크에게 먹힐 만한 협박거리라곤 부족민 이외에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도.

비록 그 선택 때문에 테오도르는 거의 한 달 내내 밤을 새다시피 에리히의 침실 앞을 자진해서 지켜야 했지만, 그것도 이제 내일이면 끝날 일이다.

“아르사크 님이 황후가 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테오도르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즈안나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애매한 표정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그야말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황을 전혀 모르는 로즈안나에게 무턱대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글쎄. 내일이 되어 보면 알 일이지. 너는 아르사크 님이 황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냐?”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황후가 된다 하더라도 아르사크 님은 행복하지 않으시겠죠.”

테오도르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로즈안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웬 비극적 사랑에라도 빠진 것 같은 말을 하는 건지.

그가 알던 로즈안나는 무척 철저하고 감정 표현이 드문 인물이었다. 지금 함께 걷고 있는 로즈안나는 마치 딴사람인 것 같았다.

“아르사크 님이 황후가 되신다고 해도 폐하와…….”

“잠깐만요, 테오도르 님.”

로즈안나는 테오도르의 앞가슴을 퍽 치듯이 누르면서 걸음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던 테오도르는 로즈안나가 미간을 찌푸린 채 어딘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뭘 그렇게 보는…….”

“조용히 하십시오.”

그러자 테오도르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로즈안나는 햇빛이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는 유리창 너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창문을 등진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멀어서 정확히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틀어 올린 머리 모양과 나부죽한 어깨로 보아 그녀는 힐데트로스임이 틀림없었다.

15장 예식 (2)

‘저쪽은 출입할 수 없도록 막힌 복도일 텐데. 왜 저런 곳에?’

“로즈안나, 뭘 보고 있냐니까?”

“테오도르 님, 저쪽이요. 저쪽 복도는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 아닙니까?”

로즈안나가 손가락질을 하는 곳을 바라보던 테오도르도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 같구나. 황녀께서 계시던 곳인데.”

로즈안나의 얼굴에 일순 그늘이 졌다.

“저기 서 계신 분은 후작가의 영애가 아니냐?”

“그런 것 같습니다.”

“왜 저기에… 아니, 잠깐. 한 사람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예? 저는 안 보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은…….”

테오도르의 말이 뚝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창가에서 어른거리던 힐데트로스의 모습도 사라지고 말았다.

로즈안나는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누가 있는지 못 보셨나요?”

로즈안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테오도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인적이 사라진 창가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수가 없구나.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로즈안나를 다독인 테오도르는 그녀가 뜰을 가로질러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지만 창가는 여전히 텅 비어 있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출입이 제한된 바로 그곳이 틀림없었다.

황녀가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후로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바로 그 복도, 테오도르도 어린 시절 에리히를 따라 뻔질나게 드나들어 눈에 익은 그곳이었다.

로즈안나가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을 때, 아르사크는 니나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은 불안해서 가슴이 터질 뻔했는데 태평하게 수다나 떨고 있는 것을 보니 화가 치밀었지만, 로즈안나는 애써 표정을 고쳤다.

“다녀왔습니다.”

“로즈, 들어봐. 니나가 그 물에 뭐가 들었는지 말해줬어.”

아르사크가 깔깔거리며 말하자 니나는 로즈안나의 눈치를 살피며 난처한 미소를 띠었다.

“장난 삼아 농담을 한 것인데 아르사크 님께서…….”

“니나, 이제 가서 할 일을 하렴. 아르사크 님의 예복을 찾아오라 말하지 않았니?”

“아, 예복이라면 벌써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럼 가서 장신구를 정리해 놓도록 해.”

“네, 그럴게요.”

니나는 로즈안나의 엄한 시선에 쫓기듯이 방을 나갔다. 머리쓰개 아래로 빠져나온 붉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렸다.

“왜 심술을 부려? 한참 얘기가 재밌어지려는 참이었는데.”

“시종들과 너무 허물없이 어울리시는 건 그리 권장할 만한 행동이 아닙니다, 아르사크 님.”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대꾸한 로즈안나는 장작을 정리하는 척 몸을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르사크가 들으라는 듯이 코웃음을 치자 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잔소리할 것 없잖아. 이제 내일이면 전부 다 끝인데, 이제 와서 누구랑 얼마나 이야기를 하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아르사크 님, 내일은 중요한 예식입니다. 다른 분들은 하실 말씀도 삼가며 엄숙하게 시간을 보내시죠. 아르사크 님도 그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이제 와서 나한테 무슨 기대라도 걸고 있는 거야?”

이건 완전히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말투다. 로즈안나는 쪼개진 장작을 난로 안으로 내던지듯 집어넣으며 몸을 돌렸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흥얼거리듯이 미소를 띠고 있는 아르사크는 홀가분해 보였다. 아쉬움이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로즈안나는 그것이 서운하고 속상했다.

“아르사크 님은 전혀… 변한 데가 없으시군요.”

“그사이에 내가 변하길 기대했다니 너도 참 순진하다, 로즈. 황후가 되느니 차라리 말에 목을 매고 말겠다던 게 거짓말인 줄 알았어?”

“정말 그것뿐이셨나요? 폐하께서… 토르갈의 사람들을 해코지하실까 봐 여태까지 참고 계셨을 뿐인 거예요? 전혀 마음이 바뀌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다른 이유가 또 있을 줄 알았어? 그들이 남겠다면 나는 받아들일 거야. 떠나고 싶지 않다는데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지. 난 누구처럼 머릿수를 앞세워서 협박을 하진 않거든.”

아르사크가 말했다. 지금까지, 아르사크는 한 번도 로즈안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로즈안나는 왠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서운할 수 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정이라고는 없는 아르사크의 말이 서글펐다.

“아르사크 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이상한 줄은 압니다. 하지만, …아르사크 님을 위해서 일한 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누구보다도 아르사크 님이 황후가 되시기를 원하는… 서운하냐고 물으신 건 무엇 때문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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