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25화 (25/191)

25화

“무척 아프셨겠어요.”

“말도 마. 다들 얼마나 난리였는지, 아픈 줄도 몰랐어. 내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울어댔다니까. 아버지는 거의 기절하실 뻔했지.”

부친은 강인한 족장이었지만 하나 있는 딸을 끔찍하게 아꼈다.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틈만 나면 양이나 조랑말에 올라타 말썽을 부리고, 겁 없이 활을 메고 나다니는 아르사크 때문에 그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경험을 해야 했다. 지금은 다 옛날의 일일 뿐이다.

아르사크는 마치 자신의 동생이나 되는 것처럼 니나의 손에 난 흉터를 어루만지다 장난스럽게 말했다.

“누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거든 내 핑계를 대면서 내빼버려.”

“그럴 순 없습니다. 아르사크 님도 매일 하기 싫은 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폐하께 도움이 되기 위해서요.”

니나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르사크의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이제 너도 그만 돌아가 쉬렴.”

“편히 주무세요, 아르사크 님.”

침대의 휘장을 내려준 니나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푹신한 베개 위에 머리를 누인 아르사크의 시선이 굳게 닫힌 창문으로 향했다. 로즈안나가 하도 불안에 떠는 바람에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창문에는 아예 자물쇠를 걸어버렸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서 로즈안나는 기어이 방 전체에 있는 창문 아래에 누름쇠를 두어 고정하고서야 약간이나마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바보 같은 것. 그러니 열이 나지.’

오후 무렵부터 이마가 펄펄 끓기 시작했는데도 로즈안나는 도통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아르사크가 으름장을 놓다시피 하고서야―돌아가 쉬지 않으면 난동을 부리겠다는― 로즈안나는 방 전체의 문을 두 번씩 점검하고 거처로 돌아갔다.

힐데트로스를 찾아가 무슨 말을 하고 왔는지 말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만약 아르사크가 한 일을 알았다면 로즈안나는 그대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운 채 떠오르는 생각들을 멍하니 헤아리고 있던 아르사크는 니나의 손이 닿았던 어깻죽지를 만져보았다. 단단하게 뭉쳤던 근육이 제법 나긋나긋하게 풀어져 움직이기가 한결 편했다.

그 애가 몇 살이라고 했더라. 이제 열여섯을 넘겼다던가.

그러고 보면 아르사크는 로즈안나는 물론이거니와 자주 얼굴을 보는 시종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니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어, 시종 중에서는 가장 먼저 이름을 외운 아이였지만 아르사크의 시중을 들도록 배정되기 전에는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내일 로즈안나가 오면 물어보라고 해야겠네.”

마치 옆에서 누군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혼잣말을 한 아르사크는 깨끗하게 빨아 말린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며칠 뒤면 심사가 끝날 것이고, 위든과 에리히가 원하는 대로 조작된 예식을 밝혀내고 나면 자신은 자유였다.

에리히가 이후 어떤 사람을 황후로 맞게 될지 잠시 궁금해하던 아르사크가 코웃음을 치며 눈을 감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더럽게 운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14장 예식 (1)

밋밋하고 아무 맛도 없는 흰 빵조각과 묘한 향이 나는 물 한 잔이 식사의 전부였다.

아르사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다 옆에 선 로즈안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래야 한다고? 다시 설명해 줄래?”

로즈안나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사크가 무슨 개구리라도 잡아 올리는 것처럼 엄지와 검지 끝으로 빵 조각을 들었다 놓자, 로즈안나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예식의 일부이니 참고 드세요, 아르사크 님.”

“한가롭게 식사 투정이나 하자는 게 아니야, 로즈. 그런데 물에서 너무 이상한 냄새가 난단 말이야.”

“신관께서 축복하신 물입니다.”

“솔직히 말해봐. 여기에 뭐가 들어갔는지 넌 알지? 도대체 뭘 넣은 거야? 알고나 마셔야겠다.”

로즈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빵과 물이 든 접시를 아르사크 앞으로 밀어주었다. 뭐가 들어갔는지 알면 더욱더 마시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예식이 치러지기 하루 전에는 후녀들에게 주어지는 식사가 바뀐다. 수확제와 같은 큰 제사를 치르기 전 신관들의 식사처럼 빵과 약수가 전부다.

아르사크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빵 조각을 씹어 삼킨 뒤 물은 단숨에 마셔버렸다. 숨을 참으니 그럭저럭 마실 만했지만 묘한 비린내를 풍기는 산미가 입 안에 남아 무척 찜찜했다.

“아침부터 밖이 소란스러운데, 내일 있을 예식 때문이야?”

아르사크가 물었다. 후녀들이 있는 별궁 근처뿐만이 아니라 황궁 전체가 수선스럽게 들썩이는 듯한 소음이 내내 이어졌던 것이다.

로즈안나는 시녀들에게 빈 접시와 잔을 치우라는 손짓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예식을 준비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니까요. 어떤 분이 황후가 되실지 결정되면, 대관식 날까지 축제를 하게 돼요. 황궁뿐만이 아니라 수도 전체가 며칠 내내 소란스러울 겁니다.”

“너도 나랑 같이 토르갈로 가지 않을래, 로즈?”

“그건 청혼할 때나 하실 법한 말인 것 같은데요, 아르사크 님.”

화병에 꽂힌 꽃을 매만지며 로즈안나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아르사크는 의자 위로 무릎을 접어 앉으며 낄낄대듯 웃었다.

“만약 아르사크 님이 황후가 되시면…….”

“그럴 리는 없어.”

아르사크가 단호하게 말하자 로즈안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열렬하지는 않지만, 로즈안나는 여전히 신을 믿었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마다 사소한 기적을 일일이 행해주지는 않아도 황제나 황후를 선택할 때, 또는 재해가 일어날 때처럼 큰일이 있을 때면 신탁을 내린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았다. 신관이 후작에게 매수되었으리라는 상상 같은 것은 해본 적도 없었다.

“곧 이별하겠구나. 서운해?”

아르사크의 말에 로즈안나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대책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황제가 이런 사람을 굳이 후녀로 들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지금,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에 대해 복잡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아르사크가 황후가 되기에 완벽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도 이제 곧 떠날 사람이라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르사크 님, 만약… 부족 사람들이 아르사크 님과 함께 가지 않는다고 하면 어떡하실 건가요?”

“설득해 봐야지.”

“그래도 거절하면요?”

“남으라고 해야지.”

아르사크의 대답은 필요 이상으로 간결했다. 로즈안나는 식사를 하느라 흘러내린 아르사크의 머리를 다시 매만져주며 입속으로 천천히 말을 골랐다.

“아르사크 님도 그들과 함께 수도에 정착하실 수 있을 텐데요.”

“여긴 너무 복잡해. 건물도 너무 많고 사람도 필요 이상으로 많아.”

“하지만 토르갈은 너무 멀어서…….”

말을 잇던 로즈안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르사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로즈안나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미소를 띠었다.

“마차를 만들어 보낼 테니 그걸 타고 날 만나러 와.”

“싫습니다. 산에서 또 도적을 만날까 봐 무서우니까요.”

“내가 다 때려잡아서 남은 놈이 없을걸?”

“또 어디서 모여들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마부를 센 놈으로 골라 보낼게.”

그래도 로즈안나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찡그린 채 아무런 말이 없던 로즈안나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얼굴을 휙 돌린 채 방을 나가버렸다.

아르사크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 드레스 자락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을 기울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 * *

볼핀 후작은 에리히와 육촌 간이지만 외모는 전혀 닮은 데가 없었다. 키는 땅딸막하고 머리는 약간 괴상해 보일 정도로 커서 그가 걸어 다니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잘못 만든 장난감 병정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관님.”

늙수그레한 신관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볼핀은 둥글넓적한 얼굴에 한껏 과장된 웃음을 띠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입은 웃고 있으되 조그만 눈동자는 교활한 모양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번득거렸다.

신관은 주름지고 검버섯이 핀 눈가를 실룩이며 볼핀의 맞은편에 거만한 태도로 앉았다.

“이런 늙은이를 찾아오신 이유를 알지.”

짐짓 옷깃의 먼지를 터는 시늉을 하며 신관이 말했다.

그는 일찍이 세력 있는 귀족의 자제였지만 작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적어지자 잽싸게 신관이 되었다. 제국의 신관이라는 것이 신앙심보다는 재물과 권력으로 만들어짐을 온몸으로 입증하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볼핀이 아직 작위를 물려받지 않았을 때 그가 후견인으로서 볼핀을 지지했고 덕분에 볼핀은 위로 두 형들을 제치고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예식이 바로 내일이라, 딸을 둔 입장에서 마음이 초조하여…….”

“그럴 테지. 나도 자네가 차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지 않아. 걱정 말게.”

“무사히 일이 성사된다면 반드시 흡족하실 만한 보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글쎄, 늙으면 욕심만 많아지더군. 자네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나?”

숨길 것도 없이 아예 노골적으로 속내를 내놓는 태도다. 그러나 볼핀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제 딸의 앞날을 밝혀주시는데 아비로서 못 해드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감사를 드려야지요.”

“자네가 그렇게만 해준다면야.”

신관은 주름진 입가가 흐물거리도록 음흉한 웃음을 띠었다.

‘하여간 천박한 노인네라니까.’

볼핀이 생각했다. 그러나 만족할 만큼의 보상을 주겠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계획한 대로 힐데트로스가 황후의 자리에 올라 자신이 국구가 된다면 못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네는 오래 살아야겠군.”

검버섯이 핀 손으로 입가를 쓰다듬던 신관이 말했다. 볼핀은 그의 턱에 잡힌 주름이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네의 딸이 황태자를 낳는 것을 봐야 할 게 아닌가? 나야 신에게 바친 몸이니 자식을 볼 일이 없지만 말일세.”

그의 사생아가 둘이나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볼핀으로서는 코웃음을 칠 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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