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위든이 에리히와 아르사크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형형한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꺼졌다.
“제국의 법에는 황제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신관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따로 부여되어 있네. 건국 초기에 비하면 신관의 권한이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민간에서는 물론이고 귀족들도 신을 믿는 자들이 수도 없이 많아. 제국의 황제는 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네. 대관식을 치를 때도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니까.”
토르갈에는 그토록 절대적인 신앙이 없다. 유목민들 대부분은 절대적인 신을 숭배하기보다 자연에 깃든 신을 섬긴다.
부족에 큰일이 닥쳤을 때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부족도 있지만, 토르갈에는 그런 문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황제가 신관의 권한에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르사크로서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러면… 부정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찾아내도 신관을 파면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아. 세속적인 욕심으로 부정을 저지른 것을 들킨 신관은 결코 존경받을 수 없네. 아무도 그런 자를 두고 보지는 않을 테지.”
“혹시 후작이 손을 쓰지 않을 가능성은 없나요?”
“없네. 결코 그럴 자가 아니야. 자네를 없애는 일에 실패했으니, 하지 않았을 일도 할 걸세.”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와 함께 별궁으로 돌아왔다. 니나는 아르사크가 시킨 일들을 깔끔하게 마쳐놓았다.
금방 식지 않도록 따뜻하게 감싼 찻주전자를 매만지던 아르사크는 로즈안나가 찻잔을 채우기 전에 다시 벌떡 일어섰다.
“아르사크 님?”
“후작의 딸을 만나러 가야겠다.”
“네? 무슨… 힐데트로스 님을요? 어째서요?”
“내 목을 조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테니 좀 긁어줄까 해서.”
“아르사크 님,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넌 여기 있으렴. 차가 식지 않도록 데워놔. 식으니까 정말 떫더라. 뭘 우린 거야?”
이 찻잎이 어느 정도의 가격인지 알면 또 무슨 참신한 폭언으로 황궁의 사치스러움을 욕할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로즈안나는 굳이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참을 아르사크의 주변에 있다 보니,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로즈안나마저 제국 내부의 크고 작은 불합리에 눈을 뜨게 되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르사크 님, 정말 제가 같이 안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죽을까 봐 걱정돼서 그러니? 안심해. 드레스 안에 칼을 숨겨뒀으니까.”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거짓말이야.”
탕 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모습이 사라진 빈 방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자신이 어쩌다 이토록 대책 없는 사람을 모시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테오도르 님 때문이잖아! 테오도르 님이 시키신 일이니까!’
불현듯 성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로즈안나가 생각했다. 다음번에 그를 만나면 실수인 척 발등이라도 밟아주리라 결심했다.
13장 협상과 위협 (6)
“저를 찾아오시다니… 다소 뜻밖이네요.”
물결 같은 굴곡의 찻잔 손잡이에 손끝을 걸친 힐데트로스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넘기면서 말없이 웃기만 했다. 서로 의중을 간파하려 탐색전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오가는 말이 없었다.
힐데트로스는 한쪽으로 느슨하게 땋은 아르사크의 검은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저렇게 탐스러운 흑발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장정 둘을 패 죽일 수 있을 만한 무식한 힘이 이유가 아니라면, 에리히가 머리칼만 보고 아르사크를 후녀로 뽑았다고 해도 그럴싸했다.
“그동안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잖아요. 토르갈은 작은 부족이라 모두들 가족처럼 지내거든요. 아무리 경쟁 상대라지만 그렇다고 인사도 한 번 한 적 없는 사이는 너무 삭막할 것 같아서.”
힐데트로스의 입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경쟁 상대라는 말이 무척 심기에 거슬렸다.
그렇지 않아도 멍청한 두 놈 때문에 일이 다 틀어질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긴 것이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데, 아르사크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힐데트로스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힐데트로스는 차분한 태도로 손을 모으며 허리를 살짝 세웠다.
“맞는 말씀이군요. 사실은 저도 아르사크 양을 무척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그래요? 언제든 오지 그랬어요. 내 방은 항상 열려 있거든요.”
찻잔을 들던 힐데트로스의 손이 잠시 멎었다. 돌변하듯이, 순간적으로 방 안의 온도가 떨어진 느낌마저 들었다.
아르사크는 뺨을 괴면서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채 힐데트로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관찰했다. 웃고 있을 때는 수수하고 평범해 보이던 얼굴이 표독스러운 빛을 띠자 갑자기 선명해졌다.
“환영해 주신다니 기쁘네요, 아르사크 양.”
“토르갈에서는 손님을 마다하지 않죠.”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겠어요. 더 일찍 찾아뵐 수도 있었을 텐데.”
힐데트로스의 얼굴에 가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르사크는 조심성 없는 몸짓으로 테이블 아래를 향해 다리를 약간 뻗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요?”
“글쎄요, 그리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군요. 아시다시피 심사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당신을 황궁으로 초청할 수도 있겠죠. 안 그래요?”
그 말의 의미를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힐데트로스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아르사크를 보았다. 자신을 긁어보고자 일부러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 리 없는 힐데트로스는 탁,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말씀을 제가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아르사크 양.”
“다음번에 날 찾아올 때는 좀 더 예의를 갖춰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이 정도는 알아들을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당신이?”
“재밌네요. 어제 나한테 얻어맞은 놈도 비슷한 말을 하던데… 뭐라더라, 당신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하던가? 그런데 손가락 네 개를 부러뜨리니 입을 다물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죠? 그보다 잘할 자신이 있는지 궁금한데?”
힐데트로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르사크는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명랑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잘 마셨어요. 그건 그렇고, 이건 선물이에요.”
무언가 조그만 꾸러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아르사크는 힐데트로스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복도로 나선 인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모멸감에 어깨를 떨던 힐데트로스는 아르사크가 내려놓고 간 꾸러미를 풀었다가 공포에 질린 것 같은 신음을 흘렸다.
피에 흥건히 젖었다가 그대로 마른 자국이 거뭇거뭇하게 얼룩진 자루였다. 힐데트로스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자루 안의 금화를 바라보다 비명을 지르듯 소스라쳤다.
깨알같이 촘촘하게 적힌 글씨를 한참이나 읽어 내려가던 아르사크는 피로한 눈가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살면서 요즘처럼 글을 많이 읽은 적도 없는 것 같다.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제국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읊을 때까지 외워야 하는 것은 그나마 나았다.
예식의 순서니, 황후로서의 미덕이니 하는 것들을 읽으라고 할 때마다 아르사크는 두툼한 책등으로 에리히의 이마를 내리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르사크 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고개를 돌린 아르사크는 문을 열고 들어온 니나를 흘긋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넘게 녹아내린 양초들을 니나가 새것으로 바꿔 끼우는 동안, 아르사크는 드레스를 벗고 가운을 걸쳤다. 니나는 촛대 아래로 흘러내린 촛농을 깨끗하게 긁어낸 뒤 새로 불을 붙이고 아르사크를 돌아보았다.
“로즈안나 님은 어디 가셨나요?”
“열이 좀 있다기에 일찍 가서 쉬라고 했어. 왜, 로즈에게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아뇨, 아닙니다.”
니나가 말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아르사크는 자기 좋을 대로 팔다리를 뻗으며 기지개를 펴다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촛농을 닦아낸 헝겊을 쥐고 있던 니나는 아르사크가 하는 양을 보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좀 주물러드릴까요, 아르사크 님?”
“응, 그래 줘. 하루 종일 앉아서 책이나 읽으라니 버틸 수가 있어야지. 또 아무거나 휘둘렀다간 로즈가 잔소리를 할 테고.”
아르사크는 어린애처럼 투덜거렸다. 니나는 헝겊을 뒤집어 깨끗한 쪽에 손을 닦은 뒤 아르사크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어깻죽지를 손끝으로 쥔 채 힘 있게 눌렀다.
“너 힘이 꽤 세구나.”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궁에서 일을 하다 보면 무거운 걸 들고 다니거나, 창틀 같은 걸 꼼꼼하게 문질러 닦아야 해서 그런 것 같아요.”
고생이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 같은 곱상한 얼굴에 비해 살갗에 와 닿는 손끝은 굳은살로 단단했다.
아르사크는 기분 좋게 신음하며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뻣뻣해진 목덜미의 근육을 엄지 끝으로 꾹, 꾹 짚어 누르자 뻑적지근한 통증이 오는가 싶더니 금세 가뿐해졌다.
“솜씨 좋은데?”
“칭찬 감사합니다.”
니나가 말했다. 보면 볼수록 얌전한 애다.
아르사크는 흡족한 표정으로 니나의 손을 부드럽게 쥐어 어깨에서 떼어냈다.
“이제 그만해도 돼.”
“원하시면 자주 주물러드릴게요. 목이나 어깨가 아프면 몸 전체가 뻐근해지니까요.”
“네 일만도 바쁠 텐데, 그래서야 내가 미안하지.”
니나의 손을 내려다보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리 튼튼해 뵈지도 않는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크고 작은 굳은살이 박였다. 손바닥이나 손끝에는 아주 오래전에 아문 것 같은 작은 흉터들도 보였다.
아르사크가 손끝으로 흉터를 매만지자, 니나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감추듯이 움츠렸다.
“어렸을 때는 많이 서툴러서… 자주 상처를 입곤 했어요.”
“누구나 그렇지. 나도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넘어지고 까지고 긁히고… 한번은 나뭇가지를 베다가 날카로운 칼로 손목을 자를 뻔한 적도 있었지.”
그러면서 아르사크는 니나의 눈앞에 왼쪽 손목을 보여주었다. 희미해져 거의 보이지 않지만, 손바닥과 이어진 부분에서부터 비스듬한 사선으로 제법 긴 흉터가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