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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23화 (23/191)

23화

아르사크의 물음에 로즈안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이라면 혼자서도 늑대 떼를 다 두들겨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늑대 무리를 한꺼번에 다 잡아 와서 길들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그렇다고 새끼들을 야금야금 훔쳐 와서 키워가며 길들이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아르사크 님,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더 들어봐. 그래서 그들이 늑대들을 단번에 제압하는 방법이 있어. 바로 우두머리의 목을 치는 거다. 그런 다음 그걸 모든 늑대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야.”

로즈안나는 피가 흐르는 늑대의 거대한 머리가 눈앞에 있기라도 하듯 어깨를 움츠리며 진저리를 쳤다. 바로 조금 전까지 믿고 따르던 우두머리가 단숨에 목만 남은 것을 보며 늑대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나도 그걸 기다리겠다는 이야기야.”

“…폐하께서 아르사크 님께 원하시는 것이 이것인가요?”

“그래, 맞아. 말하자면 나는 미끼로 위장한 사냥꾼인 셈이지.”

“아르사크 님, 말도 안 됩니다.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로즈. 그리고 황제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미끼 노릇을 자청하겠다는 것만은 아니야.”

“그럼 왜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즈안나가 긴장에 짓눌린 채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아르사크는 마지막 한 땀을 놓은 뒤 조그만 가위로 실을 톡 끊었다.

“날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줘야 하니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녀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린 아르사크는 콧노래를 부르듯 경쾌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니나,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아르사크 님.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녀는 쓰러졌던 시녀 중 한 사람이었다. 귓가에서 굽이치는 붉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니나는 공손한 태도로 손을 모은 채 아르사크에게로 다가왔다.

“폐하께서 아르사크 님을 부르셨습니다.”

“귀찮아 죽겠네. 자기는 발이 없나. 사람을 오라 가라…….”

아르사크가 투덜거리자, 로즈안나가 퍼뜩 정신이 든 사람처럼 얼른 일어서며 아르사크의 말을 가로막았다.

니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다녀올 테니 차를 좀 끓여놓을래? 그리고 이불을 좀 더 얇은 것으로 바꿔놔, 니나.”

“알겠습니다, 아르사크 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침대 쪽의 초를 몇 개 빼놔. 눈이 부셔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르사크는 완성한 자수를 수틀에서 빼놓은 뒤 로즈안나와 함께 방을 나섰다.

12장 협상과 위협 (5)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서재를 찾아갔을 때, 에리히는 혼자 있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위든이 에리히와 함께 있었다.

“저를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공손한 태도에 에리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위든이, 숙부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너는 나가 있도록 해라, 로즈안나.”

에리히가 말했다. 로즈안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한번 쳐다보았으나,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로즈안나가 서재 밖으로 나가자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에리히는 다과가 마련된 탁자를 턱짓하며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앉지.”

세 사람은 찻잔을 하나씩 앞에 놓은 채 둘러앉았다. 위든과 에리히가 찻잔을 기울일 동안, 아르사크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다 짧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

그러자 에리히가 또 한 번 소름 돋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위든은 애매한 미소를 띤 채 찻잔 너머로 아르사크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간밤에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길 들었네.”

“심려를 끼쳤습니다, 전하.”

“내 숙부께서 왜 그대를 심려하셨다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에리히가 시큰둥한 시비조로 말꼬리를 잡았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멱살을 잡아채지 않기 위해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맞잡으며 뻣뻣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누구에게든 말씀을 단정히 하십시오.”

“…죄송합니다, 숙부님.”

“어머, 사과도 할 줄 아는 분이셨군요. 여태 몰라뵈었습니다.”

아르사크는 위든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리히가 눈을 부릅뜨며 아르사크를 노려보자, 위든은 웃음을 터뜨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요. 폐하, 저를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숙부님을 노려본 것이 아닙니다. 저 뒤에 있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당장 떼어내라고 해야겠습니다.”

이를 꽉 깨문 소리로 에리히가 말했다. 그러나 벽에는 그림이라고는 걸려있지도 않았다.

아르사크가 코웃음을 치자, 위든은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한 말을 자네가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아 다행이로군. 하지만 저들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갔으니 일이 복잡하게 되었지. 그에 대해 폐하와 상의를 하고 있었네. 자네도 들어야 할 것 같아 불렀지.”

“말씀하시지요, 전하.”

“폐하께서 내게 얼마만큼의 정보를 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이번 일에 후작이 개입되어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아르사크는 위든을 바라보고 있어 에리히의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도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 그리고 자신의 패를 어디까지 보여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의 초조함. 그런 것들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여 아르사크의 시선은 묘한 빛을 띠며 가라앉았다.

“사실입니다, 전하.”

“후작은 폐하의 육촌이기도 하지. 그 사실을 자네도 알고 있었나?”

그건 몰랐던 사실이다. 아르사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에리히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는 몰랐습니다.”

“후작이 오래전부터 힐데트로스를 황후로 만들고자 노력한 사실은 수도의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세. 만약 심사에서 떨어진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테지. 그를 지지하던 일부는 떨어져 나갈 수도 있는 일인 데다가… 힐데트로스의 앞날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걸세. 그 애는 철저하게 황후가 되기 위해 키워진 아이니까. 그러니 이번 심사에서 떨어진다면 타격이 클 걸세. 귀족들 사이에서 비웃음거리가 될 것은 뻔한 일이야. 후작이 그걸 두고 보지만은 않겠지.”

“눈물 나는 부성애로군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면 그런대로 아름다운 이야기이긴 하겠지만, 후작은 힐데트로스 자체를 아껴서 그 애를 황후로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네. 다만 그 애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이지. 힐데트로스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

“없습니다. 홀드빅 자작의 따님은 한번 지나치며 인사를 한 적이 있지만요.”

“루이제도 출중하지만 힐데트로스에 비할 바가 못 되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홀드빅 자작의 세력은 볼핀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다고 봐야 해. 후작은 이미 신관을 매수했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자네도 알고 있겠지.”

최종 심사에 관한 설명은 로즈안나와 교사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해 들었다.

현재 치르고 있는 심사 기간이 끝나면, 탈락하지 않고 남은 후보들은 모두 최종 심사를 받게 될 자격을 얻는다.

제국은 명목상으로나마 신앙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에, 관례에 따라 신관이 주최하는 마지막 심사에서 ‘신의 빛’이 선택한 인물이 황후가 된다.

만약 후보들 중 가장 성적이 낮은 인물이었다 할지라도, 최종 심사에서 선택되기만 하면 아무도 그 결과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마지막까지 탈락만 하지 않으면 황후가 되고 말고는 누구에게나 비슷한 확률이었다.

“이번 사건에서 뿌리를 뽑았다면 일이 수월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됐어. 폐하나 내가 손을 써서 후작가를 파헤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네.”

“제가 할 일이 더 남은 것이지요?”

“그렇네. 아주 중요한 일이지. 할 수 있겠나?”

“제가 할 수 없다고 하면, 저를 탈락시켜 내보내주실 겁니까?”

위든은 대답하지 않고 빙긋이 미소만 띠었다. 아르사크는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전하께서는 제게 질문을 하셨던 게 아니로군요.”

“그래. 자네가 아니면 아무도 못 할 일이니까. 할 수 없더라도 해야 하네.”

“폐하께서는 최종 심사가 끝나면 저를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르사크의 시선이 에리히를 향했다. 아르사크는 확신이 필요했다.

에리히는 지겹다는 듯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밀며 몸을 숙였다.

“그대가 그대의 할 일을 마친다면, 그때는 궁에 남고 싶다고 애원을 해도 그대를 내보낼 것이니 염려하지 마라.”

“약속만 해주신다면 폐하께서 제 치맛자락에 매달려 엉엉 우셔도 단호하게 뿌리쳐 드릴 테니 심려 마십시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싸늘한 공기가 테이블 위로 내려앉는가 싶더니, 위든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침묵을 깨트렸다.

“좋아, 자네의 결심이 확고하고, 폐하께서도 약속을 하셨으니 이걸로 됐어. 폐하께서 하신 약속은 내가 보증하겠네.”

“감사합니다, 전하.”

“예식을 치를 신관은 분명 휘장 뒤쪽에 장치를 감춰두었을 걸세. 빛은 반드시 힐데트로스 쪽으로 향하게 되겠지. 명심하게. 불이 피어오르고, 빛이 힐데트로스를 비추는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되네. 장치가 꺼지면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신관이 장치를 끌 수 없도록 해야 해. 예식에는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수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황궁의 광장으로 모이지. 기회를 놓치면, 힐데트로스가 황후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네.”

“그건 왜죠? 나중에라도 전부 다 꾸며낸 짓이었다고 설명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황제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되니까. 그 정도는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알 수 있는 일일 텐데.”

에리히가 툭 끼어들어 핀잔을 했다. 테이블 밑으로 그를 걷어차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무릎을 있는 힘껏 누른 아르사크가 고개를 휙 돌렸다.

“폐하께서는 신앙 같은 것에 관심이 없으실 줄 알았는데요.”

“폐하께서 신앙을 가지셨는지, 그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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