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어쩌다 이 꼴이 된 거야? 쥐어뜯고 싸움박질이라도 했나?”
“좀 두들겨 팼죠.”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뭐라고요? 바보 취급도 유분수지.”
“솔직히 죽이고도 남았을 거잖아.”
“힘 조절이 좀 힘들긴 했습니다.”
“누가 풀어놓은 건지 알아낸 건가?”
“네, 알아냈지요.”
아르사크와 로즈안나, 그리고 에리히는 별궁의 복도를 지나 뒤뜰로 나갔다.
“어디 있어?”
“저쪽에요. 시녀들에게 지키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다 너처럼 무식하게 힘이 센 줄 알아?”
“무식하게 힘센 제가 꽁꽁 묶어놨으니 쓸데없는 걱정…….”
아르사크의 말이 뚝 멎었다. 로즈안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입을 가렸고, 에리히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이럴 리가. 아르사크가 생각했다.
뒤뜰에는 세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아르사크의 시녀 둘, 그리고 믹이다.
시녀들은 기절한 것 같았지만 믹은 아니었다. 빠끔히 열린 눈이 허옇게 뒤집어졌고 입에서도 뿌연 거품이 흘러넘쳤다. 죽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분명 산 채로 데려왔던 게 맞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 꼴이 됐고. …로즈, 경비병들을 불러와라. 그리고 테오도르를 데려오라고 해. 시녀들은 안으로 옮기고.”
“알, 알겠…알겠습니다, 폐하.”
뒷걸음질을 치는 로즈안나는 거의 혼이 나간 것 같은 기색이었다.
아르사크는 믹에게 다가가 목 옆을 짚어보았다. 확실히 숨이 끊어졌다. 죽은 모양으로 보아 약물일 것이다.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에리히가 물었다.
“스스로 죽은 건가?”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손발을 전부 묶어놓았고, 제가 끌고 왔을 때까지만 해도 기절한 상태였으니까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흔적만 보아도 그녀의 말은 납득할 만했다.
“이젠 어쩌실 거죠?”
“감히 내 사냥감에 손을 댄 간 큰 놈을 찾아야지.”
“여우는 이제 그만 잡으실 겁니까?”
“그래, 시시하게 여우나 잡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군.”
에리히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로즈안나의 부름을 들은 경비병들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사크는 한숨을 쉬며 피와 땀에 엉겨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럼 늑대를 잡으러 가보죠.”
“웬일로 적극적인데?”
아르사크를 힐끔 건너다보며 에리히가 물었다. 아르사크는 혀끝을 굴려 터진 입술을 핥으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난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라서요.”
11장 협상과 위협 (4)
믹의 시체는 병사들에 의해 감쪽같이 처리되었다. 에리히는 쓰러졌던 시녀들이 깨어나자마자 무엇을 보았는지, 믹이 죽기 전에 어떤 상태였는지 상세히 캐물었지만 두 사람의 대답은 똑같았다.
아무것도 본 것은 없으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날이 밝은 후였고, 믹은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한 상태였지만 결코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증언뿐이었다.
“후원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에리히의 명령으로 별궁과 후원을 수색하고 돌아온 테오도르가 말했다.
그러리라는 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자 슬그머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에리히는 손끝으로 눈 위를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테오, 네 생각을 말해봐라.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를 것 같은지.”
“…폐하, 아직은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으로써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누가 너더러 당장 범인을 지목하라 했어? 짐작 가는 자가 있다면 말해보라는 거다.”
난처한 질문이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시선을 움직이다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지근지근 깨물었다.
“만약… 그들이 노렸던 자가 아르사크 님이 맞는다면,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자들의 범위가 무척 좁아지겠지요.”
“목표가 누구였는지는 확실하다. 별궁의 방들은 거의 다 비어 있지. 그중에서도 그 망나니의 방은 후원 쪽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고.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가 있을까?”
“…폐하께서는 범인을 짐작하십니까?”
“짐작? 짐작을 왜 해?”
에리히가 말했다. 너무나 단호하고 단정적인 어조라 테오도르는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차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사냥을 나간 사이 볼핀과 홀드빅이 별궁에 왔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연치고는 대단하지. 둘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산책 나올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그럼 별궁에 와서 뭘 했을까?”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증인도…….”
“그러니 끌어내야지. 감히 내 눈앞에서 일을 벌이다니, 그럴 만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했을 것 아니냐. 다행히 미끼가 아직 살아서 팔딱거리고 있거든. 조만간 다시 입질이 올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미끼’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만큼 둔했다면 차라리 좋았으련만.
테오도르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허둥거리듯이 시선을 움직이다 결국 할 말을 잃고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아르사크 님의 생각은…….”
“그 망나니가 걱정인가?”
에리히가 물었다. 테오도르는 그의 목소리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들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아르사크를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잠시 고민했다.
그녀가 다치거나 해를 입을까 봐 걱정하는, 소중히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당신을 그렇게 걱정하노라고 말하면 아르사크는 테오도르의 멱살을 잡거나 무릎을 걷어차는 반응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아르사크를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불안했다. 마치 곧 전쟁이 터질 것을 예감할 때와 비슷한 불안감이 테오도르를 엄습하고 있었다.
“아르사크 님을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실이 밝혀졌을 때 혼란해질 상황이 걱정되는 거겠지. 소심한 놈 같으니.”
신중하다는 칭찬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소심하다는 비난은 처음이다. 테오도르는 약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에리히는 창밖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린 채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심란하거나 언짢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폐하, 그러면… 이대로 심사를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최종 간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사이 아르사크 님의 신변에 다시 이상이 생기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신의 뜻에 맡겨봐야지.”
“…예?”
“심사는 당연히 진행한다. 이 일은 일단 묻고, 더 이상 새어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이미 퍼질 대로 퍼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소문을 떠들고 다니는 놈이 있으면 혀를 잘라버리겠다고 엄포를 놔야 한다. 너는 네 일에만 집중해.”
그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는 테오도르는 다소 찜찜한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에리히의 말대로, 자신이 할 일은 황제를 호위하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까지 신경을 쓰다가 에리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 * *
“아르사크 님, 지금 하신 말씀이… 정말 사실인가요?”
“목소리 낮춰, 로즈.”
수틀에 끼워진 천에 자수를 놓으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로즈안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볼핀 후작이… 정말로 아르사크 님을 해치려는 시도를 했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귀로 분명히 들은 내용이야. 그걸 황제 앞에서 털어놓게 하려 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지.”
문득, 새벽에 보았던 시체의 끔찍한 몰골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로즈안나는 몸서리를 치며 팔딱거리듯 오르내리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아르사크가 사라진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초주검이 된 남자를 질질 끌고 나타났을 때, 지난밤에 놀란 것만으로도 로즈안나는 수명이 십 년쯤 줄어든 것 같았다. 그런데 설마 더 놀랄 것이 남아 있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수도 귀족들 사이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후녀가 되어 궁으로 오기 전까지는 토르갈 밖으로 한번 나가보지도 않았다.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이를 갈며 증오할 만한 적도 없다. 아르사크는 조각조각 갈라진 땅덩이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섬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누군가 납치를 당한다면, 아르사크보다는 힐데트로스나 루이제여야 훨씬 아귀가 맞았다. 그 둘을 제쳐두고 아르사크를 노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잖아요. 아르사크 님을 해칠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은 그 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겹겹이 대비책을 마련해 놓은 거겠지. 그놈을 그토록 빨리 죽여버린 걸 보면, 어딘가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물론, 내가 그대로 사라졌을 때도 뭔가 빠져나갈 만한 구멍을 만들어뒀을 거다.”
“지켜보고 있었다니… 그럼, 이런 일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세요?”
“일어날지 모른다고? 로즈, 분명히 또 일어날 거야.”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아르사크의 말에 로즈안나가 이마를 싸쥐며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꿈에서도 겪기 싫은 일을 또 한 번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럼… 아르사크 님은 어떡하실 건가요? 뭔가 대책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어.”
로즈안나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르사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대답을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어떡하시려고요?”
“기다려야지.”
“기다린 다음에는요?”
“로즈, 너 유목민들이 늑대 무리를 어떻게 길들이는지 알고 있니?”
알 리가 있나. 로즈안나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자수나 놓고 있는 아르사크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릅니다.”
“토르갈은 아니지만, 거친 유목민들 중에는 늑대 무리를 길들여서 데리고 다니는 부족이 있어. 하지만 아무리 사냥 솜씨가 출중하고 용감한 자들이라고 해도 수십 마리나 되는 늑대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버겁지.”
“아르사크 님은 늑대를 사냥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없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