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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21화 (21/191)

21화

황궁 전체가 깊이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 그때, 반뼘도 되지 않게 벌어져 있던 창문이 안쪽으로 밀리며 끽, 하는 소리가 울렸다. 창틀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잠깐 방 안을 둘러보다 침대 위의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세상모르고 자는군.”

“빨리 묶기나 해. 떠들 시간 없으니까.”

그들은 지저분한 천을 꺼내어 아르사크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손목을 묶어 어깨에 둘러멘 채 다시 창을 타넘을 때까지, 아르사크는 여전히 축 늘어져 깨어나지 못했다.

10장 협상과 위협 (3)

마차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숲을 가로질렀다. 비가 올 것처럼, 짙고 묵직한 구름이 달을 가렸다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마부석에 앉은 둘은 따분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시시한 음담패설이나 주고받으면서 말을 몰았다.

“이봐, 믹. 슬슬 저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지 않아?”

덩치 큰 남자가 뒤쪽에 달린 마차를 턱짓하며 말했다. 믹은 왜소하고 좁달막한 어깨를 한번 움츠렸다 펴고는, 물고 있던 담배를 아무 데나 내던졌다.

“숲 바깥쪽까지 데려가서 파묻어버리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목을 꺾어놓든가.”

“곱상하게 생겼으니 팔아먹으면 돈이 되지 않겠어?”

남자가 툽툽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믹은 뒤룩뒤룩한 정강이를 발뒤꿈치로 툭 걷어차며 그를 쏘아보았다.

“턱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후작이 우릴 가만둘 것 같아?”

“멀찌감치 데려가서 팔아버리면 누가 알겠어?”

남자가 불만스레 툴툴거렸다. 믹은 주름진 이마를 더욱 찌푸리며 새 담배를 꼬나문 채 고삐를 붙들었다.

“볼핀 후작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린 주는 돈이나 얌전히 받아 챙겨서 내빼면 그만이라고.”

“알았어, 알았다니까.”

남자가 몸을 기울이자 낡은 마부석의 나무가 부러질 듯이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흙길 위를 구르는 바퀴 아래에서 작은 돌덩이가 튀어 오르자 삐걱대는 소리가 점점 더 심해졌다.

잇새로 연신 뿌연 연기를 흘리던 믹은 짜증스러운 눈으로 마차를 돌아보았다.

“돈을 받으면 이 고물도 바꿔버려야겠군.”

“네가 하도 험하게 몰아대는 탓이지.”

“뭐가 어째? 네놈이 뒤룩뒤룩 살이 찐 탓이겠지.”

달밤에 만담이라도 주고받을 작정인지 무의미하게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우뚝 멈췄다. 나무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뭔가 다른 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무언가 우두둑 부러지는 소리였다.

“뭐야? 무슨 소리였어?”

“바퀴축이 부러졌나?”

“빌어먹을, 이런 숲속에서? 불길한 소리 하지 마.”

믹은 곧장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만약 바퀴축에 금이라도 갔다면 일이 곤란해진다. 아직 황궁과 너무 가까웠다.

“내려서 확인해 봐, 빨리.”

“그러게 내가 진작에 바퀴 좀 바꿔 끼우라고 말했잖아.”

덩치 큰 남자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리자 마부석 전체가 크게 출렁이듯 흔들렸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 뒤쪽 바퀴 가까이로 다가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축을 살피기 위해 그가 몸을 숙인 순간, 엉성한 사슬로 고정해 놓은 마차의 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무슨……!”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말들이 날뛰기 시작하자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바퀴 바깥으로 튀어나온 축대에 턱을 찧은 남자가 억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굴렀다.

그와 동시에 문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붙잡은 채 바깥으로 몸을 날린 아르사크가 남자의 얼굴을 있는 힘껏 밟았다.

“억!”

살과 뼈가 동시에 부딪치며 우둑 소리가 났다. 아르사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자의 거구를 그대로 꺼들어 빡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거꾸로 걷어찼다.

둔탁한 비명이 터졌다. 살이 겹겹이 접힌 목을 움켜쥐고 있던 아르사크는 별안간 머리 위에서 들린 쐑! 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남자의 몸을 방패 삼아 그의 등 뒤로 웅크렸다.

“아악!”

“이런, 빌어먹을!”

믹이 휘두른 채찍이 아르사크가 아닌 남자의 어깻죽지와 가슴팍을 치고 지나갔다.

아르사크는 남자의 묵직한 몸을 믹 쪽으로 확 밀쳐버린 뒤 그들이 쓰러진 틈을 타 느닷없이 발로 흙더미를 걷어차 눈에 뿌려버렸다.

버둥거리던 그들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눈을 움켜쥐고 구르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아르사크는 마차 뒤쪽의 가로대를 부수다시피 뜯어냈다. 그러고는 남자의 머리를 향해 그 막대기를 휘둘렀다.

“억!”

뚱뚱한 남자가 한 번 더 바닥을 구르는 사이 믹은 씨근거리며 일어섰다. 믹이 괴성을 내지르며 곧장 아르사크에게로 달려들었다.

목을 거머쥐려 뻗쳐오는 그의 손을, 아르사크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막대기를 들어 올려 막았다.

“악!”

“이, 망할 계집이…….”

작달만한 체구에 비해 믹의 힘은 꽤 강했다. 가시가 거칠거칠하게 일어난 나무 막대가 아르사크의 목을 짓누르기 직전이었다.

온몸으로 목을 조르는 믹을 밀어내기 위해 이를 악문 아르사크는 버둥거리던 남자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것을 힐끔 쳐다보았다.

“얌전히 있었으면, 편하게 죽었잖아… 응? 왜 쓸데없는, 짓을…….”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주는구나.”

“뭐가, …뭐가 어째?”

믹은 거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껏 막대기를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에서 버티는 아르사크의 힘이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귀족 영애가 아닌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힘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이리라.

믹은 부들부들 떠는 아르사크를 내려다보며 미친 사람처럼 히죽거리고 웃었다.

“예상하고는 좀 다르지만 여기가 마음에 든다면야, 여기다 묻어주마.”

아르사크의 시선이 믹을 향했다. 그 순간 믹은 너무 놀라서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날 뻔했다.

아르사크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할 말이다.”

믹 하나를 버텨내는 것만도 혼신의 힘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만 있던 아르사크의 몸이 갑자기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솟구쳤다.

놀란 믹이 버둥거리며 뒤쪽으로 휘청거린 찰나, 아르사크는 그가 붙잡고 있는 나무 막대의 방향을 그대로 한 바퀴 돌려 그를 내동댕이쳤다.

쾅 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딪혀 움찔거리는 그의 몸을 지지대 삼아 아르사크는 공중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휘청거리며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의 정수리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날 안 건드리고 얌전히 살았으면 편하게 죽었을 텐데, 여기가 마음에 든다면 여기다 묻어주지.”

정수리를 맞은 남자는 그대로 기절한 것처럼 사지를 늘어뜨린 채 간헐적으로 푸들거리며 떨고만 있었다.

아르사크는 손에 들고 있던 나무 막대를 내던지고 그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은 뒤 믹에게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겁에 질려 바람 새는 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믹의 어깨에 그대로 검날을 박아 넣었다.

“아아악!”

칼이 꽂힌 자리에서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아르사크는 벌벌 떨며 공포에 질린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바닥을 짚고 있던 그의 손을 들어 올려 마차의 바큇살에 찍어 눌렀다. 단단한 나무에 걸린 손가락들이 금방이라도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버릴 듯 아슬아슬하다.

“악! 아악! 제발, 살려줘! 제발!”

“지금부터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해라. 헛수작 부릴 때마다 네놈 손가락을 하나씩 분질러버릴 거야. 고물 바퀴가 얼마나 제구실을 잘하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

“찾았어?”

“아니요, 아무 데도 안 계십니다.”

시녀의 대답에 로즈안나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에 방문을 연 로즈안나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었다.

텅 빈 침대와 활짝 열린 창문, 흩날리는 커튼. 아르사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폐하께서 아셔서는 안 돼. 별궁 전체를 전부 다 뒤져. 그리고…….”

“로즈안나 님!”

어둑한 그늘 쪽에서 다른 시녀 하나가 재빨리 뛰어오며 숨을 몰아쉬었다. 로즈안나는 조용히 하라는 듯이 다급하게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마자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로즈안나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무슨 일이야? 아르사크 님을 찾았어? 빨리 말해!”

“차, 찾았, 찾았습니다. 아르사크 님이…….”

“왜들 이렇게 시끄러워?”

로즈안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르사크였다.

“아르사크 님!”

나직한 소리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던 로즈안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거의 반죽음이 되어 있는 남자와 엉망으로 흐트러진 아르사크의 모습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아르…아르사크 님. 이게, 이건 도대체…….”

“너한테 설명하고 있을 시간 없어. 거기, 너희 둘. 이쪽으로 와서 이놈을 지키도록 해라. 기절시켜서 묶어놨으니 깨어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나는 폐하를 모셔오겠다.”

“예? 아르사크 님, 폐하를요? 아뇨, 이 꼴로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로즈. 빨리 따라와.”

로즈안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따랐다.

아르사크는 속옷만 걸친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머리는 산발을 했고 손이며 팔다리에 핏자국이 엉망진창이었다.

“아르사크 님, 다치셨어요? 치료부터……! 아니, 신발이라도… 아르사크 님!”

“내 피 아니야. 신발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아르사크는 아연한 경비병들을 아무렇게나 밀어내며 에리히의 침전까지 달려갔다. 그러고는 로즈안나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노크도 하지 않고 닫혔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르사크 님!”

“여우를 잡았습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놀란 로즈안나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는 사이, 영락없이 잠든 것처럼 조용히 누워 있던 에리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엉망이 된 아르사크의 몰골을 쳐다보며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꼴은 대체 뭐야?”

“저한테 시비 거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 나오세요.”

“신발이라도 좀 신어.”

에리히는 테이블 아래에서 부드러운 가죽으로 된 실내용 신발을 꺼내 아르사크의 앞에 던졌다.

아르사크는 마뜩잖은 표정을 지은 채 신발에 발끝을 아무렇게나 집어넣은 뒤 서둘러 앞장을 섰다.

에리히는 침대 한쪽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걸친 뒤 아르사크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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