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20화 (20/191)

20화

9장 협상과 위협 (2)

웅성거리는 소음과 음악 소리, 불빛, 얇은 유리들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렸다.

아르사크는 연회장 한쪽에 선 채 로즈안나가 알려준 대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미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르사크 혼자뿐이었다.

해가 지자마자 귀족들의 마차가 줄지어 궁으로 들어왔다. 기절했던 로즈안나는 일어나자마자 아르사크를 다시 씻긴 뒤 몸단장을 시켰고, 숲속에서 있었던 일은 입 밖으로 낼 생각도 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굉장히 괜찮은 분이던데? 사실, 그 재수 없는 인간의 숙부라고는 믿기지가 않…….”

“아르사크, 님.”

이를 꽉 깨문 로즈안나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아르사크를 불렀다. 아르사크는 합죽이처럼 입을 다문 채 헛기침을 하며 로즈안나의 시선을 피했다.

“오늘 일은 절대로,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 아르사크 님은 디몰트의 전하를 뵌 적도, 저랑 같이 숲으로 나가셨던 적도 없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알았어, 로즈. 그런데 너 다리는 괜찮니? 넘어지면서 돌에 부딪힌 것 같던데.”

“아르사크 님, ‘없었던 일’이 무슨 뜻인지 모르십니까?”

“걱정도 하지 말라는 거야?”

“네. 전 다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하루 종일 아르사크 님의 단장을 돕느라 이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더 말을 할 수도 없을 만큼 바쁘게 움직였다. 머리를 만지고 옷을 입히는 데에 로즈안나를 포함한 시녀들이 네 명이나 달라붙었다.

‘로즈, 못된 계집애. 일부러 이렇게 세게 조여놓은 거지.’

아르사크는 아무리 해도 숨을 크게 들이쉴 수 없는 가슴과 배를 번갈아 더듬으며 천천히, 그리고 짧게 호흡했다. 얼마나 세게 묶어놓았는지 혼자서는 풀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다니는 다른 귀족들을 보면, 하나같이 아르사크보다 반 뼘은 가느다란 허리를 갖고 있었다.

“황실의 연회가 너무 화려해서 넋을 놨나?”

에리히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르사크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눈을 위로 치켜떴다가 예의 미소를 띠면서 에리히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폐하.”

“이 자리를 왜 열었는지 알고는 있나?”

“글쎄요, 수도에 사는 공작새들이 깃털을 자랑하러 모였습니까?”

“더 정확하게는 그 공작새들을 누가 더 많이 잡는가 하는 자리지.”

“아, 그럼 여긴 사냥터로군요. 불빛과 향과 음악으로 새를 불러 모으셨나요?”

“그런 셈이지. 그러니 촌뜨기처럼 멀거니 서 있지 말고 뭐라도 하나 건지러 가봐.”

“전 공작새 사냥은 관심 없습니다. 깃털 몇 가닥 뽑아봐야 돈도 안 되니까요.”

“그래?”

에리히는 재킷의 소매를 만지는 척하며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모두들 자기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보여도, 그들이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아르사크 하나뿐이라는 것을 에리히는 알고 있었다.

“나를 향해 돌아서.”

“식전이라 사양하고 싶습니다, 폐하.”

“네 발로 돌아설래? 아니면 꼭두각시처럼 줄이라도 매서 당겨줄까?”

“성질머리하고는.”

아르사크가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에리히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고개를 확 돌린 순간, 아르사크는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사뿐히 몸을 돌려 에리히를 마주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나긋나긋한 말투가 소름 끼쳤다. 에리히는 진저리를 내듯 어깨를 털고는 앞머리를 훅 불어 넘겼다. 독처럼 푸른 기를 띤 눈동자가 아르사크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췄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손을 쥐고 들어 올려 굽이진 손마디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손 빼면 죽는다.”

아르사크의 어깨가 움찔거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에리히가 말했다. 붙잡은 손이 양쪽 다 힘겨루기라도 하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멀찌감치 떨어진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안 놓으시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이렇게 하지.”

아르사크가 발을 들어 올리기 직전에, 에리히는 꽉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손이 떨어지자마자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드레스 위에 벅벅 문지르는 아르사크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에리히는 음악이 바뀐 틈을 타 자세를 고치며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공작새 사냥이 취미가 없으면 여우 사냥은 어때?”

“폐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에두르지 말고 하십시오. 조금 전 같은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마시고요.”

“그대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살아있는 건 뭐든 잡을 수 있다면서?”

“그렇습니다.”

“증명해 봐라. 미끼는 내가 몸소 놓아줬으니, 나머지는 네게 맡기지.”

에리히가 말했다. 그가 자리를 뜬 뒤 아르사크가 고개를 돌리자, 둘을 쳐다보고 있던 수많은 시선들이 일제히 다른 곳을 향했다.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쉰 아르사크는 나풀거리며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힐데트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수많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서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미소로 화답하다가, 아르사크와 눈이 마주친 순간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얼굴 뚫어지겠네.’

“여기저기서 자네 이야기뿐인데, 정작 본인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군.”

위든이 말했다. 그는 느긋한 태도였지만, 아르사크는 숲에서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은 것 같은 태연한 표정으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전하.”

“왜 제국의 황후가 될 생각을 했나?”

“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폐하의 의도였죠.”

“그럼, 왜 폐하께서 그런 선택을 하셨다고 생각하지?”

그제야 아르사크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위든은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중앙에 모여 춤을 추는 귀족들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황후를 고르고 싶었다면 폐하께는 수도 없이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네. 여기 모인 귀족가의 딸들만 모아도 차고 넘치지.”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하지만 통 가르쳐주시질 않더군요.”

“폐하와 사냥을 해보았지?”

아르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든은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단정한 입가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아르사크는 그의 손마디에 단단한 굳은살이 박인 것을 알아보았다. 저 위치에 저런 모양으로 생기는 굳은살은 깃펜을 드는 정도로는 절대 생길 수 없다. 적어도 수십 년은 검을 쥐고 휘둘러야만 생기는 굳은살이다.

‘디몰트는 전쟁이 잦은 지역인가?’

“폐하는 어릴 적부터 사냥을 좋아했지. 애석하게도 형제가 없어 함께 어울릴 상대는 적었지만, 형제가 여럿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냥 솜씨만큼은 지금의 폐하가 가장 뛰어났을 걸세.”

그러고 보면 에리히에게 형제나 또는 남매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황태자 하나로 대를 이을 수 있었다니, 선대 황제는 억세게 운이 좋았나 보네.’

“하지만.”

딴생각을 하던 아르사크는 위든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가졌다고 해도 잡기 힘든 짐승은 있는 법이지. 늑대라든가, 표범 같은 맹수라든가…….”

“혹은 여우처럼 교활한 짐승은 쉽사리 잡기 힘들죠.”

아르사크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벽과 벽 사이에 몸이 꽉 낀 것처럼 갑갑한 것은 여전했으나, 그녀는 어딘가 상쾌해진 것 같은 표정으로 위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말하자면 저는 사냥꾼이군요.”

위든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아르사크에게 술잔을 건넸다.

“토르갈에서는…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아이에 대한 점을 쳐서 이름을 짓는다고 들었네만, 자네 이름은 무슨 뜻이지?”

아르사크는 얇은 유리잔을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향긋하고 쌉싸름한 맛이 혀끝에 번졌다. 불빛을 받아 색이 엷어진 아르사크의 눈동자가 호박색으로 반짝였다.

“제 이름의 뜻은 ‘가장 높은 곳을 나는 매’입니다.”

그리고 매는 활강하며 여우를 사냥한다.

* * *

힐데트로스는 연회가 무르익었을 무렵 아무도 모르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별궁으로 통하는 외진 복도는 오가는 사람이 없이 조용했다.

드문드문 불이 꺼져 어둑한 곳을 빠르게 벗어난 그녀는 어둠이 깔린 뒤뜰을 가로질러 담에 난 문을 찾았다. 손끝으로 무거운 자물쇠를 만지던 그녀는 입술 안쪽을 깨물며 재킷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이쪽이다.”

힐데트로스가 낮게 속삭이자, 수풀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 둘이 뱀처럼 재빨리 문 안쪽으로 기어들어 왔다.

하나는 왜소했지만, 하나는 그보다 덩치가 컸다. 걸친 옷에서는 묵은 술과 이끼의 쿰쿰하고 불길한 악취가 풍겼다.

힐데트로스는 재빨리 그들에게서 물러섰다가, 재킷 안쪽에서 작은 자루를 꺼내 땅바닥에 던졌다.

“약속한 선금이다.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면 내 아버님이 그 열 배를 약속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자루를 열고 금화를 세어보던 둘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힐데트로스는 긴장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턱을 쳐들었다. 귀에 달린 귀걸이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음험하게 반짝거렸다.

“여기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렇게 합죠.”

“정확히 처리했다는 증거를 나한테 먼저 가져와야 할 거야.”

“그것도, 그렇게 합죠.”

왜소한 쪽의 남자가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힐데트로스는 거친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어두운 복도 쪽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 * *

“죽을 뻔했네.”

갑갑하게 몸을 조이던 코르셋을 벗자마자, 아르사크는 로즈안나가 말리기도 전에 침대로 뛰어들어 팔다리를 쭉 뻗었다.

“아르사크 님, 일어나세요. 가운은 입으셔야죠. 그리고 스커트는 아직 벗지도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또 벗어야 되는데 뭐 하러 가운을 입어? 귀찮으니 오늘은 그냥 잘래. 너도… 얼른 가서 쉬어, 로즈.”

“말도 안 됩니다. 빨리 일어나세요.”

“나 정말 졸려, 로즈…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

아르사크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멀어지는가 싶더니 금방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무서운 것 없이 돌아다니더니 의외로 술은 약한 모양이다.

로즈안나는 반듯하게 접힌 가운을 아르사크의 머리맡에 내려놓고 손등으로 아르사크의 뺨을 짚어보았다. 홧홧한 열이 손끝에까지 끼쳤다.

“도대체 무슨 술을 얼마나 드신 거야?”

구깃구깃해진 치맛자락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던 로즈안나는 침대 옆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아르사크의 이마 위를 스쳤다.

‘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으시겠지.’

불을 끄고 문을 닫자 방 안에 정적이 깔렸다. 희게 빛나며 유리창에 부딪히던 달빛이 구름에 밀려 옅어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