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8장 협상과 위협 (1)
로즈안나는 아침나절부터 아르사크를 깨워 정신없이 재우쳤다. 눈도 덜 뜬 아르사크를 욕조에 집어넣어 씻기고, 드레스를 입기 싫다고 툴툴대는 입에 비스킷을 물려가며 겨우 속옷만 입혀 놓았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아르사크는 로즈안나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잽싸게 침대로 뛰어가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깨끗한 시트 위에 비스킷 부스러기가 부슬부슬 떨어진 것을 본 로즈안나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아르사크 님, 제가 어젯밤에 뭐라고 말씀드렸는지 그새 다 잊어버리셨습니까?”
“잊어버리지 않았어. 연회는 저녁이잖아.”
“그렇지만, 지금부터 준비하셔야 합니다.”
“아니, 뭘 준비해? 아직 점심 식사도 하지 않았는데 왜 벌써부터 드레스를 못 입혀서 안달이야!”
“왜냐하면요, 아르사크 님. 연회에 참석하기 전에도 해가 떴으면 일어나 옷을 입는 것이 법도니까요.”
“제발, 로즈. 잠깐만이라도 편하게 있도록 날 좀 내버려 둬. 어차피 식사도 여기서 하잖아. 오늘은 너 말고는 아무도 안 올 테고.”
“몸에 밴 게으름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르사크 님.”
“내가 게으르다고?”
아르사크가 버럭 소리를 치면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 서슬에 놀란 로즈안나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한 발 물러났다.
“내가 게으른 게 아니야. 이곳이 날 게으르게 만드는 거지! 도대체 그 비싼 옷을 입혀놓고 나한테 시키는 일이 다 뭐냔 말이야?”
“이곳은 황궁입니다, 아르사크 님.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요. 그리고 귀족들은 아무도 손에 흙을 묻혀가며 일하지 않지요.”
“그게 문제야.”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러면서 속옷 바람을 한 채 저벅저벅 방을 가로지르더니 로즈안나가 민망해 고개를 돌릴 정도로 당당한 표정을 한 채 허리에 손을 척 얹었다.
“옷을 준비해, 로즈안나. 최대한 편한 걸로.”
“대체 뭘 하시려고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오늘은 마구간 청소는 절대로…….”
“알았어, 네 체면을 봐서 그건 참아주지. 그러니까 최대한 움직이기 좋은 옷을 한 벌 준비해.”
“뭘 하시려는 건지 말씀을 해주셔야…….”
“아니면 지금 이 차림도 편한데, 이렇게 입고 말들이나 쓰다듬어주러 가 볼까?”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로즈안나가 문을 쾅 닫으며 뛰쳐나갔다. 아르사크는 짓궂은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킬킬거리며 비스킷을 차에 푹 담갔다가 한입에 집어넣었다.
“정말 아주 잠깐만입니다.”
“알았다니까.”
로즈안나는 자신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저으며 아르사크를 데리고 별궁의 뒤뜰로 향했다.
담벼락의 작은 문 앞에 선 로즈안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고는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어주었다. 아르사크가 먼저 들어가고, 그 뒤를 로즈안나가 따랐다.
별궁의 담 밖은 사냥터와 이어진 숲이다. 아르사크는 여염에서나 입을 법한 수수한 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은 채 덤불 사이를 걸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풍기는 따뜻한 햇볕 냄새가 기분 좋았다.
“이런 문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
“아무나 드나들 수 없습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아가씨들을 모시는 시종들에게 열쇠를 하나씩 주셨지만, 중요한 일이 아닐 때 함부로 문을 연 것을 들키면 크게 혼이 날 거예요.”
“넌 지금 날 모시고 있잖아. 내 부탁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 안 그래?”
일견 뻔뻔하게 들리지만 말은 맞는 말이라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로즈안나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입술을 모은 채 허둥거리며 아르사크를 따라갔다.
“아르사크 님, 좀 천천히 가세요!”
“활을 가지고 나올 걸 그랬다. 또 검은 여우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폐하의 사냥터에서 허락 없이 사냥을 하는 것은 중죄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중죄를 몇 개나 저질렀을까?”
중죄라는 걸 알긴 아는 건가. 로즈안나가 생각했다.
한참이나 숲을 산책하던 아르사크는 가늘게 흐르는 개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죽신을 벗고 맨발을 물에 담그자 뼛속까지 아린 차디찬 물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로즈안나는 당장 누군가 숲속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 같은 기분에 안절부절못하며 아르사크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아르사크 님,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 돌아가? 걱정 마라. 또 수색대를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다 문득, 아르사크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로즈안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아르사크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르사크 님? …왜 그러세요?”
“저쪽에서 뭐가 보인 것 같아.”
“설마요. 이곳은 폐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아마 짐승이겠지요. 사슴이나… 뭐 그런 것일 거예요. 아르사크 님, 이제 그만 돌아가야…….”
“여기서 기다려, 로즈.”
신발의 가죽끈을 단단히 조인 아르사크는 로즈안나가 말릴 틈도 없이 개울을 뛰어 건넜다. 삽시간에 낯빛이 질린 로즈안나가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아르사크 님! 돌아오세요!”
로즈안나가 작은 소리로 외쳤으나 아르사크는 돌아보지 않았다. 조용히 하라는 듯이 들어 올린 손가락을 보자 로즈안나는 그만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말 것 같았다.
개울을 건너 덤불 사이로 몸을 숙인 아르사크는 숨조차 쉬지 않은 채 적막한 숲속을 눈으로 살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귀가 짐승처럼 열리는 것 같았다. 조그만 벌레가 나뭇잎을 밟는 소리마저도 들을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거대한 나무 뒤에서 긴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아르사크는 나무뿌리 쪽으로 손을 뻗어 귀퉁이가 날카로운 돌을 움켜쥐었다.
‘한 번만 더 보여라. 한 번만.’
로즈안나는 짐승일 것이라 말했지만 아르사크의 생각은 달랐다. 낮에 돌아다니는 짐승은, 특히 근처에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는 짐승은 저토록 조심스럽게 유인하듯 움직이지 않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많아도 둘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늑대는 아니었다. 늑대는 셋 이상씩 떼를 지어 다니니까.
‘한 번만 더 움직여.’
돌의 뾰족한 귀퉁이가 손바닥을 아리게 눌렀다. 그 순간, 나무 뒤에서 무언가 다시 스멀거리듯 움직였다.
아르사크는 재빨리 땅을 박차고 일어나며 손에 들고 있던 돌을 정확히, 그것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아르사크 님!”
로즈안나의 비명이 숲을 울렸다. 그러는 것과 동시에 아르사크는 자신이 던진 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온 것을 알았다.
“이게 무슨……!”
“아르사크 님!”
첨벙거리며 개울을 뛰어 건너온 로즈안나가 휘청거리듯 아르사크의 팔을 잡았다.
무성히 드리운 가지 사이로 번뜩이는 칼날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키가 큰 중년의 남자가 불쑥 걸어 나왔다. 연륜이 느껴지는 단정한 얼굴이 당황과 분노로 험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는 아르사크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전에 아르사크를 향해 칼을 뻗어 움직임을 막았다.
“너는 누구냐.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감히 황제의 숲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느냐. 말하라.”
“그러는 당신은 누군데 황제의 숲에서 음험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나?”
금방이라도 가슴팍을 꿰뚫을 것 같은 칼끝을 보고도 아르사크는 어디 할 테면 해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오히려 기절하기 직전까지 떨고 있는 것은 로즈안나다.
아르사크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로즈안나를 자신의 뒤로 숨긴 뒤 다시 상대방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나는 디몰트의 공작이며 선대 황제 폐하의 동생인 위든 클로츠다.”
남자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등 뒤에서 전해지던 로즈안나의 떨림이 우뚝 멎었다.
‘선 채로 기절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안 돼, 로즈.’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전하. 저는 토르갈의 족장, 아르사크 하르슈입니다.”
“토르갈의 족장이라고?”
위든의 눈이 의구심으로 물들었다.
아르사크는 오른손 주먹으로 가슴 앞을 가볍게 두드린 뒤 허리를 깊게 숙였다. 토르갈에서의 가장 공손한 인사였다.
“그 예법을 안다.”
위든이 말했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가슴 앞을 겨누고 있던 칼이 치워지고 나자, 자신이 잠시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폐하께서 토르갈의 족장을 후녀로 세우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지. 자네가 소문의 후녀로군.”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 옷이며 신발은 또 뭐고? 왜 나에게 돌을 던졌나? 하마터면 내 머리를 박살 낼 뻔했다. 그건 알고 있나?”
“죄송합니다. 수상쩍은 자가 감히 황제의 사냥터에 침범한 것은 아닌가 염려되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수상한 놈 하나가 잘 걸렸다 싶은 것이었고, 에리히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르사크는 일단 그렇게 둘러댔다.
위든은 미심쩍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삼촌 아니랄까 봐 빼다박았네.’
“내가 듣기로는 자네가 그리 충성스러운 후녀는 아니라고 하던데. 이제 보니 다들 자네를 오해했던 모양이로군.”
“충성의 형태는 각자 다른 법이니까요, 전하.”
“그래서 내 조카의 발목을 다치게 만들었나?”
“지혈은 제가 했습니다.”
로즈안나의 몸이 아래로 풀썩 떨어졌다. 선 채로 기절이라도 했나 싶었더니 진짜였던 것 같다.
아르사크는 최대한 덤덤하게 로즈안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위든은 아르사크가 로즈안나를 힘들이지도 않고 안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괴상한 모양으로 찡그렸다.
“힘이 좋은데.”
“제 시종이 좀 깃털 같습니다.”
“그건 자네가 사내일 때나 통할 말이 아닐까?”
“전 로즈를 꼬드길 마음이 없어서요, 전하.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위든은 잔주름이 지도록 눈을 가늘게 했다가 별안간 폭소를 터뜨렸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조그만 새가 큰 소리에 놀라 파드득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네, 아주 재미있군. 내 조카가 왜 그렇게 자네 이야기만 해대는지 알 법도 해.”
“이야기였나요? 아니면 험담이었습니까?”
“어떤지는 자네가 더 잘 알 테지. 이제 나가보도록 해. 자네가 내 머리를 돌로 깰 뻔했다는 이야기는 비밀로 해주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아르사크는 축 늘어진 로즈안나를 안은 채 숲을 빠져나갔다.
덤불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가는 아르사크의 뒷모습을 보던 위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리고 시선을 내렸다. 발밑에는 아슬아슬하게 깨진 돌들이 나뒹굴었다.
“폐하께서 재미있는 걸 건지셨군.”
반듯한 모양으로 코를 댄 신발이 돌 조각을 툭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