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래로 내려간 테오도르는 거의 미치기 직전인 로즈안나와 마주쳤다. 궁으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건만 기어이 쫓아온 것이다.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자마자 로즈안나는 성난 소처럼 무섭게 달려들었다.
“테오도르 님! 아르사크… 아르사크 님은요? 아르사크 님을 찾으셨습니까?”
“아직 찾지 못했다, 로즈안나. 아마도… 길이 무너지면서 아래쪽으로 떨어지신 것 같구나. 두 분 다.”
로즈안나의 눈동자가 멍하니 빛을 잃었다. 휘청거리는 로즈안나를 부축한 테오도르는 횃불을 들고 서 있던 병사에게 말했다.
“로즈안나를 궁으로 데려가라. 안정을 취하게 하고.”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 아르사크 님을 찾아야 해요!”
“안 돼. 어두워지면 짐승들이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네 상태로는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르사크 님을 찾을 때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로즈안나는 부축한 병사의 손을 뿌리치고 후들거리는 무릎에 힘을 주었다. 서 있는 것조차도 힘겨운 얼굴이었지만 묶어서 끌고 가지 않는 이상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눈빛이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나날이 주인을 닮아가네.’
“좋아. 하지만 여기 있어야 한다. 약속해다오.”
테오도르의 말에 로즈안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서 곧 눈물이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아르사크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무뚝뚝하고 시큰둥하게 대하더니, 언제 저렇게 친밀해진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두 명씩 조를 짜서 움직여라. 무엇이든 발견하게 되면 곧장 호각을 불어라.”
* * *
“내가 장담하는데, 내 말대로 했으면 테오나 병사들이 벌써 우릴 찾고도 남았을 거다.”
“그럼 나도 장담하죠. 제 말을 듣지 않고 거기 그대로 누워 있었다간 지금쯤 둘 다 목이 말라서 죽었을 겁니다.”
“하루쯤 물 안 마신다고 안 죽어.”
“아, 네. 그러시겠지요. 혼자 그 가죽 부대의 물을 다 드셨으니 분명 죽진 않으실 겁니다.”
“혀는 왜 차?”
귀도 밝네. 아르사크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르사크가 찾은 약초 덕분에 지혈은 금방 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발목을 삐었는지 에리히 혼자 걷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 다리로 절벽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사람들의 눈에 띌 만한 곳까지 걸어가는 것은 아르사크가 부축을 한다 해도 무리였다.
“그렇게 싫으셨으면 그냥 거기 누워 계셨으면 됐을 것을요.”
“네가 납치를 했잖아.”
“부축과 납치도 구분 못 하시나요?”
활줄을 다시 감은 아르사크는 좁은 틈으로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다 에리히를 돌아보았다.
널찍한 바위에 몸을 기댄 채 다친 다리를 뻗고 앉은 그는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하나?”
에리히는 나무 사이로 서성거리는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아르사크는 들은 척도 않은 채 어둑한 가지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듯 모습을 숨겼다가, 에리히가 열 받은 소리를 내지르기 직전에 양손에 뭔가를 잔뜩 안고 돌아왔다.
“그건 뭐지?”
아르사크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 없이 에리히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조심성 없는 몸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에리히는 침묵한 채 아르사크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아르사크는 땅바닥에 내려놓은 나무 열매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손톱으로 껍질을 벗겼다. 엄지 끝에 좀 더 힘을 주어 누르자 통째로 쩍 갈라지며 흰 과육이 드러났다. 아르사크는 한쪽을 에리히에게 내밀었다.
“자요.”
“…지금 이걸 손으로 깐 건가?”
“그럼 우아하게 과일 깎는 칼이라도 들고 다닐까요?”
“흙 묻었잖아.”
“좀 먹어도 죽진 않아요.”
아르사크는 반으로 갈라진 과일에 입을 댄 채 으석 소리가 나는 과육을 베어 물었다. 바깥쪽은 물러져서 들척지근했지만 안쪽은 아직 새콤하고 싱싱한 맛이 남아 있었다.
“내 목을 따려고 별렀으면 지금이 기회였는데.”
에리히가 불쑥 말했다. 아르사크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삐딱하게 에리히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고작 그 정도로 보셨나요?”
“아, 목 따는 정도로는 만족을 못 한다 이건가?”
“‘외람된 말씀이지만’, 폐하의 목을 노렸다면 굳이 우연한 기회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이젠 제법 사람다운 표현도 쓸 줄 알고. 말이 늘었군.”
“그전까지 했던 말은 사람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죠?”
“글쎄, 약간 정신 나간 망아지 우는 소리랑 비슷하게 들리긴 했는데.”
“이상하네.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네요. 폐하도 들리시나요?”
에리히는 한 대 때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눈과 혀를 동시에 굴렸다.
아르사크는 자기 몫의 과일을 다 먹은 뒤 다른 과일을 까기 시작했다. 아직 덜 익어 단단한 부분을 돌로 쿡 내리찍어 갈라진 틈을 만들고는 이로 껍질을 물어 벗기는 모습을 보던 에리히가 말했다.
“어디 전쟁터에서 몇 년쯤 살았어?”
“매일이 전쟁터나 다름없는 삶이라면, 네. 몇 년쯤 살았죠.”
“병 때문에?”
과일을 쪼개던 아르사크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형형하게까지 보이는 눈을 한 채 한참 동안이나 에리히를 노려보던 아르사크는 긴 숨을 내쉬며 갈라진 과일을 에리히 쪽으로 밀어주었다.
“알았으면 도왔을 거다.”
흙이 묻은 과일을 내려다보던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자잘한 열매들을 옷깃에 문질러 흙을 닦다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에리히의 얼굴 위로 어둠이 내려앉아 그의 표정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의 입술이 달싹인 순간, 머리 위에서 갑자기 불빛이 일렁거리더니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테오도르 님! 폐하가 계신 곳을 찾았습니다!”
“제정신이십니까!”
아르사크는 젖은 머리카락을 감쌌던 천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로즈안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주먹까지 움켜쥐고 있었다.
“그만 좀 해, 로즈. 오늘 밤이 새도록 잔소리를 할 작정이야?”
“아르사크 님!”
“알았어, 미안하다니까. 아무도 안 죽었잖아. 그럼 됐지.”
기가 막힌 로즈안나의 몸이 기어이 휘청였다. 아르사크는 눈치를 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물이든 뭐든 찾아야 했어.”
“그 얘기가 아닙니다. 그 위험한 절벽으로 말을 몰아가신 걸 얘기하는 거죠! 아르사크 님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날 그렇게 걱정했다니 감동인걸.”
분위기를 풀어보려 농담을 해보았지만 로즈안나는 여전히 화난 표정 그대로다.
아르사크는 젖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늘어뜨린 채 몸을 일으켜 로즈안나에게로 다가갔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 로즈.”
“두 번 다시는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십시오. 절대로요.”
“그것보다 더 가파른 곳도 올라간 적이 있…….”
“아르사크 님!”
“알았어, 알았다고. 안 그럴게.”
아르사크가 양 손바닥을 펼치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로즈안나는 그제야 화를 삭이려 애쓰는 듯, 긴 숨을 내쉬며 거울 앞으로 아르사크를 데려가 앉혔다. 그러고는 매끄러운 향유를 머리카락에 발라 천천히 빗질을 해주었다.
“폐하께서도 무사하다는 소식입니다. 크게 다치신 것은 아니라 하더군요.”
알 게 뭐냐는 표정으로 아르사크는 어깨만 으쓱였다.
로즈안나는 거울 너머로 한 번 더 책망하는 시선을 던졌다.
“내일부터는 좀 더 행동을 신중히 하셔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죽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르사크가 말했다.
로즈안나는 서랍 안에서 긴 천을 꺼내어 아르사크의 머리칼 끝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돌려 감았다.
“폐하의 사냥에 아르사크 님이 동행한 것을 마뜩잖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으면 자기들도 따라오면 됐을 것 아니야?”
“그럴 수 없으니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냥을 가자고 한 건 내가 아닌데 왜 내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느냔 말이야. 황제더러 그렇게 행동하라고 해.”
다른 시종들을 물려두기 천만다행이었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머리단장을 끝마친 뒤 손에 남은 향유를 씻어내고 그녀가 침대에 누울 수 있도록 도왔다.
“홀드빅 자작과 볼핀 후작이 딸들을 만나러 왔었다고 합니다. 하필 폐하가 안 계신 때에, 그리고 하필 아르사크 님과 사냥을 나가신 때에 공교로운 일이죠.”
“아버지가 딸들 좀 만나러 올 수도 있지. 내가 아버지라도 이런 곳에 내 딸이 갇혀 있으면 만나러 오겠다.”
“아르사크 님, 잘 들으세요. 그분들은 아르사크 님은 물론, 서로를 몰아낸 뒤 황후가 되려는 분들입니다. 아르사크 님이 그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듣지 않을 거예요. 제 말을 믿으세요.”
아르사크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걷어 놓았던 휘장을 풀어 내려주는 로즈안나의 표정에는 뭐라고 할 수 없는 복잡한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디몰트의 전하께서 후녀들을 직접 만나고자 연회를 여신다 합니다.”
“디몰트의 전하? 그건 또 누구야?”
“폐하의 숙부 되시는 분입니다. 명심하세요, 아르사크 님. 그분은 절대로 폐하처럼 아르사크 님의 말이나 행동을 그냥 눈감아주시지 않을 겁니다.”
아르사크는 수긍할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로즈안나가 아르사크의 어깨를 가만히 누르면서 몸을 숙였다.
“아르사크 님이… 폐하와의 협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토르갈에 어떤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협상. 아르사크는 굳은 표정으로 숨죽여 웃었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턱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고는 머리맡의 촛불을 껐다.
“쉬세요, 아르사크 님.”
인사를 한 로즈안나가 돌아서자, 아르사크는 머리를 꺼들며 일어나 앉았다.
“내가 최종 심사까지만 남는 것, 그게 정말 황제가 바라는 전부일까? 네 생각은 어때? 로즈.”
긴장한 것처럼 솟구쳤던 로즈안나의 어깨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르사크는 그런 로즈안나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침묵이 흐른 후, 로즈안나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폐하께서는 홀드빅과 볼핀, 두 가문 중 어떤 곳에도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그러니 모두가 만족하고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것뿐이에요.”
“네 말은, 말을 타고 절벽을 오르는 것 이외를 말하는 거지?”
아르사크의 말에, 로즈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편안히 주무십시오, 아르사크 님.”
“잘 자렴, 로즈.”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아르사크는 구석진 곳에서 가늘게 일렁거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눈을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