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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7화 (17/191)

17화

“입을 조심하라고 내가 경고했을 텐데. 함부로 떠들다간 그 혓바닥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제 혀를 자르실 생각이셨다면 벌써 자르셨겠지요.”

“설마 내가 그대를 봐주고 있다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용기가 있으시다면 그 밑에서 절 협박하실 시간에 여기까지 오고도 남으셨을 텐데요?”

에리히는 뱃속에서 뭔가 욱 끓어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오늘이야말로 저것을 얌전하게 만들고야 말리라.

뭐 어떤 방법으로 얌전하게 만들 것인지는 떠오르지도 않았지만, 아르사크의 도발은 확실하게 에리히에게 먹혀들어 갔다. 그는 멈칫거리는 말을 재촉해 절벽을 올랐다.

오르고 보니 아르사크는 누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발 하나를 걸칠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에서 묘기라도 부리듯이 몸을 굽혀 아래를 내려다본 것이다. 자칫하면 그대로 떨어져 머리가 박살 날지도 모르는데.

아르사크가 매달려 있던 곳을 눈으로 확인하자 에리히마저 가슴이 섬뜩해졌다.

“너는 대체 뭐야. 불사의 존재라도 되나? 아니면 날개라도 돋아나나?”

“농담하시나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녀가 말 위에 훌쩍 올라타는 사이, 에리히는 가죽띠로 고정한 검은 여우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여우로군.”

“이 정도 크기에 이런 털 결은 값이 꽤 나가지요.”

“잘 됐군. 팔아서 공손함이라는 걸 좀 사 오도록 해.”

“그보다 저는 폐하께 양심이라는 것을 사드릴 생각이었는데요.”

“혓바닥 길어? 좀 잘라 달라고 시위하는 건가?”

“제 혀를 자르려면 병사를 여럿 데려오셔야 할 겁니다. 적어도, 내 부족민들을 감시하라 명령한 인원보다는 더 많이 필요하겠지요.”

에리히의 시선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지?”

“그게 중요합니까?”

“나 몰래 궁을 빠져나갔나?”

“그것도 중요합니까?”

내리막길을 천천히 걷던 말을 멈추며 아르사크는 거의 돌아앉다시피 몸을 돌렸다.

에리히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붉게 달아올랐다가 핏기가 가시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에리히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토르갈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아르사크가 말했다. 악물린 잇새로 씹어뱉는 듯이 낮은 목소리였다.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당장 칼이라도 뽑아 들이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슬 퍼런 눈빛이었다.

“왜 그들을 끌고 와서 감시하는 거지? 내 약점을 잡고 싶어?”

“잘 아는군. 지금 내 앞에서 하는 네 태도를 돌아봐라. 내가 너의 무엇을 믿어야 하지?”

“병사들을 물려. 그리고 그들을 보내줘.”

“웃기는군. 내가 네 부족을 포로로 잡아다 놓았나? 살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정착할 수 있도록 돈과 집도 마련해 주었지. 흙먼지나 날리는 곳에서 풀이나 캐고 짐승이나 몇 마리 키운다고 네 부족이 융성해질 것 같은가? 그들은 모두 제 발로 제국의 백성이 된 것이다.”

“군사를 끌고 가 겁박했겠지. 그러니 순순히 온 거야.”

“도대체 제국에 대해 뭐가 그리 불만이지? 내가 너희를 핍박했나? 감당할 수 없는 세금을 요구했어? 왜 혼자만의 망상에 갇혀서 너를 따르는 그들을 가난과 궁핍으로 몰아넣지 못해 안달이냔 말이야. 네가 그러고도 족장이라 할 수 있는가?”

“내 앞에서 토르갈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그 순간이었다. 아르사크의 날카로운 외침이 반대편 골짜기에 닿았다 생각한 순간, 에리히는 그녀의 몸이 통째로 휘청거리며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지 모르게 무척 느리게도 느껴졌다.

아르사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당황해할 뿐이었다.

에리히는 순간적으로 말 위에서 몸을 날려 아르사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절벽의 가파른 능선을 따라 돌덩이들이 굴러떨어졌다. 아르사크를 붙잡은 채 거꾸로 떨어지면서 에리히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귀퉁이가 움푹하게 끊어진 길의 모습이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에리히는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시야를 바로잡자 나지막한 위치의 덤불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널찍한 잎사귀가 쑥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회색 토끼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고 에리히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윽…….”

에리히가 몸을 움직이자 토끼는 다시 덤불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누가 머리를 걷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심한 두통이었다. 일어나려 했지만 그러자마자 뱃속이 뒤집히며 구역질이 치밀었다. 에리히는 도로 몸을 늘어뜨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고개를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모습을 찾으려 했지만 그녀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는 사이 어딘가 멀리 떨어져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떨어진 절벽은 에리히가 누운 곳에서도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그리 높지 않았고 아래는 덤불이며 넝쿨이 있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지대가 평평하니 아르사크만 달랑 떨어져 어디로 굴러갈 일은 없었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설마 도망쳤나? 그럴지도 모르지.’

에리히는 잔숨을 내쉬면서 팔을 움직여 보았다. 오른쪽 어깨에 무시무시한 통증이 있긴 하지만 뼈는 부러지지 않았는지 다행히 움직일 수는 있었다.

가슴팍 이곳저곳을 조금씩 더듬어보던 에리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지를 쭉 뻗었다. 이제 속은 덜 울렁거렸지만, 머리는 여전히 아팠다.

‘자, 이제 어쩐다. 나무 때문에 위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테오, 이 자식은 도대체 언제쯤 올 거야? 환장할 노릇이군.’

테오도르가 병사들을 데리고 온다면 길이 무너진 것을 발견할 것이고, 그러면 수색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해가 기울고 있었고, 숲은 더욱더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

궁의 사냥터라고 해서 사슴과 토끼만 평화롭게 뛰어노는 것은 아니니,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숲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운이 나쁘면 어슬렁거리던 늑대와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덤불이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다른 방향이다. 게다가 꽤 높았다.

에리히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겨우 상체를 일으켰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머리가 핑 돌았고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았다. 불길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에리히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겨우 허리춤에 찼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걸로 늑대의 목을 딸 수 있을까? 성공한다면 황금으로 만든 판에 업적으로 새겨놔야 하겠군.

“뭐 하는 거예요!”

검을 들고 있던 에리히의 입에서 허탈함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이 터졌다. 풀숲을 헤치고 튀어나온 것은 늑대가 아니라 아르사크였다.

뭔지 모를―잡초인지 넝쿨인지― 식물을 한 줌 가득 쥐고 있던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일어난 것을 보고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함부로 일어나면 어떡해요? 머리를 부딪혔는데!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알면 소리나 지르지 말지.”

“한참은 더 기절해 있을 줄 알고 다녀왔더니… 생각보다 골이 튼튼한 모양이로군요. 안 깨져서 다행이에요.”

“지금 악담하는 거야, 뭐야?”

“됐고 누워요.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 머리를 잘못 부딪혔을지도 모르니까.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칼 물고 날뛴 황제로 기록되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말 들어요.”

다친 황제를 걱정한다기보다는 웬 사고뭉치 꼬마를 윽박지르는 태도다.

에리히는 기가 차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지만 아르사크의 말을 안 들을 수도 없었다.

“어딜 갔다 온 거야?”

“약초를 찾으러요. 발목 하나 날아갔으니 지혈이라도 해줄까 해서.”

“내 발목이 뭐가 어째?”

“그걸 믿네.”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거의 기가 넘어갈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발목은 둘 다 붙어 있었지만, 한쪽 발목의 상처가 꽤 깊었다.

아르사크는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을 가져다 옷자락에 문질러 흙을 털어내고는 그 위에 약초를 놓고 빻았다. 도대체 무슨 풀인지 짓이길 때마다 씁쓸하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약초가 맞긴 한 거야? 뭐 알기나 하고 빻는 건가?”

“왜? 내가 독살이라도 할까 봐 겁나는 모양이죠?”

“차라리 발목이 날아가는 게 더 나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거야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겠죠.”

그러더니 에리히가 말리기도 전에 질척하게 뭉친 약초를 상처 위에 툭 올려놓았다. 말도 못 하게 쓰리고 따끔거렸지만 피는 금세 멎었다. 그리고 상처 주변의 붓기도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자, 그럼 이제 어쩔까요? 나 혼자 가서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과 나란히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 어느 쪽이 더 낫겠어요?”

“말들은?”

“둘 다 목이 부러졌어요.”

아르사크가 어딘가를 눈짓했다.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두툼한 둥치 뒤로 길게 뻗은 다리들이 보였다.

에리히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 한 말인데.”

“나도 저 애가 좋았어요. 굉장히 착한 말이었는데.”

“말 없이는 위험하다. 곧 해가 질 테고 길을 잘못 들면 사냥터를 벗어날 수도 있어.”

“내 목숨을 걱정해 주는 건가요? 상냥도 하셔라.”

빈정대는 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맞받아 싸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리히는 통증이 가시기 시작한 발목을 움찔거리며 눈을 감았다.

노을이 깔리면서 첫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직 절벽 위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 * *

“폐하! 아르사크 님!”

절벽을 따라 늘어선 횃불들이 무섭게 일렁였다.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병사가 아무도 없었다는 보고를 하자마자, 테오도르의 안색은 삽시간에 납빛으로 굳었다.

길이 무너져 내린 흔적을 다시 내려다봤다. 최악의 사태만은 아니길 그토록 바랐건만. 테오도르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그러쥔 채 병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절벽 아래를 수색한다. 두 분 다 의식을 잃으셨을 수 있으니 인기척이 없는 곳도 샅샅이 살펴라. 아래는 숲이고 그리 높지 않다. 부상은 입으셨을지 모르나 크게 다치시진 않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테오도르 님.”

“꾸물대지 말고 내려가!”

테오도르가 버럭 소리쳤다. 덩달아 병사들까지도 당황과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한 채 절벽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테오도르는 경사진 절벽 쪽으로 다시 횃불을 비춰보았다. 나무들이 무성해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르사크 님! 폐하!”

목이 터져라 불러본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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