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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6화 (16/191)

16화

아르사크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즈안나는 미간을 좁히면서 불만스레 푸르륵 거리는 말을 달래기 위해 애를 먹었다.

“전… 말과, 친하지… 않아요!”

“테오, 로즈안나를 도와줘라.”

에리히가 말했다. 그의 옆에서 말을 몰던 테오도르는 뒤쪽을 힐끔 돌아보고는 로즈안나가 탄 말 옆으로 가 부드럽게 고삐를 잡아챘다.

“감사합니다.”

로즈안나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테오도르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르사크와 에리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냥터에 도착하자, 에리히는 병사들을 먼저 풀어 주변을 정찰하게 했다. 혹시나 민간인이 숲속에 들어오지는 않았는지 찾으려는 것이다. 곧 여기저기서 깃발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에리히와 아르사크, 그리고 테오도르였다.

“이런 숲에서 사냥을 해 본 적이 있나?”

“병사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숲은 처음이죠.”

“그럼 병사가 없는 숲에서는?”

아르사크는 대답을 하는 대신 활줄을 활대에 감았다. 빡빡한 활줄을 이로 물어 당긴 아르사크는 허리에 찬 활통과 가죽띠를 확인한 후 뻐근한 근육을 풀려는 듯이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도망치려는 시도는 안 하는 것이 좋을 거다.”

단단하게 고정된 활줄을 있는 힘껏 당겼다가 놓은 아르사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삐뚜름한 시선으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만약 내가 시도한다면 어쩌실 거죠?”

“궁금하면 한번 해봐.”

“스스로 비겁하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빈정거리는 말투에 에리히의 눈썹이 솟구쳤다.

테오도르는 물론 주변의 병사들도 순간적으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그런 것쯤이야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에 활을 둘러멘 채 말을 몰았다.

귀족이나 왕족들의 사냥은 절박하지 않다.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유희만을 위한 사냥이기 때문이다.

간혹 활을 잘 못 다루는 사람들을 위해 병사들이 눈에 띄는 장소로 동물을 몰아넣기도 한다. 평생 활줄 한 번 감아보지 못한 곱상한 도련님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사냥감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비겁하다는 게 무슨 뜻이지?”

“잘 생각해 보시죠.”

“황제 앞에서 입이 너무 자유분방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제 입에도 목줄을 채우고 싶으신 모양이죠?”

아르사크는 고삐를 휘둘러 말을 몰아 앞서 나갔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리며 멀어졌다.

기가 막힌다는 헛웃음을 친 에리히는 테오도르와 함께 뒤따라 말을 몰았다. 로즈안나는 도저히 그들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해 병사들과 함께 머무르며 그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상쾌했다. 오래간만에 갑갑한 드레스를 벗은 것만으로도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르사크는 한참이나 말을 달려 안쪽 깊숙한 곳까지 다다랐다. 에리히와 테오도르는 다른 방향으로 갔는지 기척이 없었다.

무성한 덤불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사크는 말을 멈춘 채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비교적 낮은 곳에서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토끼나 꿩 따위의 작은 사냥감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괜찮은 여우 가죽은 꽤 돈이 된다. 매나 수리가 있으면 여우를 몰아 사냥하기 쉽지만 그러려면 활강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지대가 필요하니 여기서는 소용이 없다. 아르사크는 화살 하나를 꺼내어 시위에 걸었다.

덤불이 다시 부스럭거리더니 윤기 나는 검은 털을 가진 여우가 재빨리 튀어나왔다. 아르사크는 여우를 쫓아 말을 몰았다.

검은 여우의 가죽은 보통 여우의 가죽보다 서너 배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어차피 지금은 팔래야 팔 수도 없겠지만, 사냥감의 가치로 승부를 가린다면 검은 여우 한 마리는 어지간한 사슴 두세 마리보다 훨씬 더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난 안 놓쳐!”

여우는 재빨랐다. 게다가 영리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봐서 나이를 좀 먹은 놈인 것 같았다. 말이 쫓아오기 힘든, 굽이진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을 쳤다.

아르사크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춘 뒤 재빨리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수풀이 얕게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가 번개같이 시위를 당기자 캥!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고요해졌다.

아르사크는 화살이 날아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여우는 수풀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화살을 뽑은 아르사크는 가죽띠를 이용해 안장 뒤에 여우를 매달았다.

“이것만 잡아도 내가 이길 것 같지?”

갈기를 쓰다듬으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말은 콧김을 불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솔직하게 말해봐라, 테오.”

“뭘… 말씀이십니까?”

“이런 걸 몇 마리 잡아야 그 망나니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버릴 수 있을까?”

화살을 맞고 쓰러진 사슴을 내려다보며 에리히가 말했다. 암컷이어서 뿔은 얻을 수 없었지만 덩치가 제법 큼직하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확신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사크 님의 말이 얼마나 튼튼한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망나니가 말이 휘청거릴 정도로 사냥감을 잡을 수 있을 거다, 그거냐?”

테오도르는 입맛을 다시며 짐짓 시선을 돌렸다. 에리히의 사냥 실력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긴 하지만 취미에 가까운지라, 사냥도 생계 수단의 하나인 유목민 출신의 아르사크를 이길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쪽으로 사냥감을 몰아놓으라고 할걸.”

“…에리히 님, 그건 반칙입니다.”

“황제가 하겠다는데 반칙이 어디 있어?”

이젠 뭐라 지적할 기운도 없었다.

에리히는 원래도 고집이 센 성격이긴 했지만, 아르사크의 일만 얽혔다 하면 요즘에는 유치하기까지 한 대응을 한다. 아르사크를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을 기세였다.

토르갈의 부족민을 정착시킨 뒤, 병사들을 주둔시켜 그들을 감시하게 한 것도 에리히의 명령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테오도르의 조심스러운 조언도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실제로 부족민들을 공격하거나 겁박할 의도라기보다는 아르사크의 약점을 쥐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임을 테오도르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그 사실이 아르사크의 귀에 들어갔을 때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도, 마치 싸움을 걸어오길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군다.

에리히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테오도르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멱살 잡고 싸울 상대라도 필요하신 건가?’

“테오, 뭘 멍하니 서 있는 거냐. 빨리 가져오지 않고.”

쓰러진 사슴을 버려둔 채 말을 향해 걸어가며 에리히가 말했다.

테오도르는 사슴의 목을 찔러 피를 빼낸 뒤 말 등에 실었다. 무게가 꽤 나가는지라 말은 영 불만스러운 듯이 앞발을 툭툭 휘둘렀다.

“테오, 저길 봐라.”

걸음을 멈춘 에리히가 숲 너머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테오도르는 얼굴을 치는 나뭇가지를 헤치며 에리히의 옆에 섰다.

시야를 가린 잎사귀와 가지 너머로 높직한 절벽이 보였다. 말 한 마리가 겨우 올라갈 수 있을 만한 그 좁다란 길을 따라 올라가는 아르사크가 보였다.

“아르사크 님……!”

“조용히 해, 이 멍청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테오도르가 손등으로 입술을 덮어 가렸다.

절벽도 물론 황제의 사냥터에 속한 곳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한 곳이라 올라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다.

평소였더라면 짐승을 몰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주의를 주었을 텐데, 오늘은 병사들이 없어 올라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정말 목숨이 여러 갠가?”

“에리히 님!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사고라도 생기면……!”

“호들갑 떨기는. 가서 병사들을 불러와라. 나는 여기서 저 망나니가 미끄러지나 안 미끄러지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테오도르는 말에 얹었던 사슴을 내려놓은 채 얼른 고삐를 휘둘렀다.

에리히는 발에 차이는 사슴의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점점 더 조그맣게 멀어지는 아르사크를 향해 눈살을 찡그렸다. 절벽 쪽에는 기껏해야 굴토끼 정도나 살까, 큰 짐승은 잡을 수도 없을 텐데 뭣 하러 저기까지 올라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사사건건 귀찮게 구는군.’

말 위에 올라탄 에리히는 숲을 똑바로 가로질렀다. 테오도르가 병사들을 데리고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아르사크를 따라가 절벽에서 내려오라 말하는 것이 더 빨랐다.

“가자, 겁먹지 말고. 공주들이나 타던 말보다 소심해서야 네놈이 황제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가파른 길로 올라서기를 망설이는 말을 다독인 그는 얕게 굽이진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말이 길에 적응을 하자 속도가 좀 더 붙었다. 아르사크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깎아지른 벽 같은 절벽 틈새로 풀줄기와 이름 모를 꽃들이 돋아나 있었다.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조차 뿌리를 내리고 악착같이 생을 이어간다. 개중에는 허공을 향해 뻗어난 어린나무들도 있었다.

“이봐!”

인적이라고는 없는 듯한 길 위로 에리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절벽은 사람이 올라올 수 없는 구역이다! 당장 이쪽으로 내려와!”

“길이 있으면 올라올 수 있는 거지, 올 수 있고 없고를 누가 정한다는 거죠?”

아르사크의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렸다. 높은 곳에서 낙하하는 폭포처럼 휙 떨어졌다.

에리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꺾어진 길을 통해 올라갔는지, 몸을 기울인 채 이쪽을 내려다보는 아르사크는 어딘가에 엎드려 있는 것처럼 한쪽 손으로 절벽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있었다.

“사람을 기막히게 만드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군. 뭐 얼마나 대단한 사냥감을 쫓아서 이런 곳까지 올라온 거지?”

“사냥감을 쫓아온 게 아닙니다. 이것 때문이죠.”

아르사크가 한쪽 손을 허공으로 쭉 뻗쳤다.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던 에리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깟 풀뿌리를 캐러 왔다고?”

“그깟 풀뿌리가 아니거든요. 밑에서 바라보니 절벽 틈새로 이게 잔뜩 자라난 것이 보이길래 좀 가지러 왔을 뿐입니다.”

“그게 뭔데? 날 독살할 독초라도 되나?”

“그렇게도 쓸 수 있긴 합니다. 보여드릴까요?”

“내려오면 목을 쳐버릴 테다.”

“아, 그럼 저는 여기 살아야겠군요. 폐하께서는 아마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하실 테니까요.”

아르사크가 허공을 향해 내밀었던 손을 휙 거두며 말했다. 에리히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얕게 도드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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