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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5화 (15/191)

15화

티리야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부족에 있을 때와는 입고 있는 옷도, 머리 모양도 달라졌다. 장신구만은 그리운 것들이었지만, 머리칼에도 또 가죽신에도 모래 먼지가 묻지 않은 티리야의 모습은 낯설었다.

“나는 괜찮아. 내가 최종 심사까지만 버티면,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면 우리는 다시 모여서 살 수 있어.”

“부족 사람들은 수도 생활에 빨리 적응한 것 같아요. 아르사크가 돌아온다 해도…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적을지도 몰라요.”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나는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 이 너풀너풀한 드레스도, 예절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도 전부 지긋지긋해. 예전처럼 하루 종일 말을 달리고 물을 긷고 가축을 몰면서 사는 게 더 좋아. 수도를 떠나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그렇게 하라고 해. 떠나고 싶은 사람들만 떠나도 괜찮아.”

“알겠어요, 아르사크. 아르사크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게요.”

티리야가 아르사크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아르사크로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인 셈이었다.

티리야가 돌아간 후, 아르사크는 완전히 뻗어버리고 말았다. 멀쩡한 척하고 있었지만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로즈안나는 교사를 돌려보낸 후 아르사크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다 손을 감싸고 주물러주었다.

“아르사크 님, 차를 끓여드릴까요?”

로즈안나가 물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아래로 드리운 휘장만 올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좀 쉬십시오. 들으니, 제가 없는 동안에도 혼자서 수업을 잘 받으셨다 하더군요. 감탄했습니다.”

“로즈.”

물수건을 들고 일어서던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멍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항상 대차고 당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맥 빠진 모습이었다.

“말씀하십시오.”

“만약, 내가 여기서 나가도…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어도, 아무도 나와 함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아르사크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생소한 모습에 안타까움마저 느꼈다. 소리를 지르고 커튼 봉을 뽑아 휘두르고 말을 달리는, 그런 모습이 이 사람에게는 훨씬 어울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르사크 님. 티리야도 있고, 또 정말로 아르사크 님이 돌아가신다면 다들 아르사크 님을 따를 것입니다.”

“떠도는 생활은 힘들어. 밤낮없이 일을 해도 겨울이 오면 굶주림과 싸워야 하지. 가축이 얼어 죽어도 어쩔 수 없고, 사냥감을 찾아 몇 날 며칠을 헤매도 허탕 치는 날이 더 많아. …그런 삶을 벗어나 정착해 살아가는 것이 더 안락하다고 한다면, 그게 더 안전하다 생각한다면, 나는 족장으로서 그들을 비난할 수 없어.”

“아직 결론이 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보다는 주둔한 병사들에 대해 생각하셔야 해요. 폐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 아닙니다. 토르갈 부족민들이 사는 마을 근처에 병사들을 멋으로 세워두시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르사크 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에 따라 달렸습니다. 아르사크 님을 따라 돌아가든, 아니면 수도에 정착하든, 그건 일단 나중의 이야기 아닐까요?”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눈만 깜빡였다. 로즈안나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고, 그래서 더욱 심란했다.

* * *

“그 망나니가 요즘은 좀 얌전을 빼는 모양이군.”

각 교사들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읽던 에리히가 말했다. 테오도르는 절대로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모처럼 에리히의 기분이 나아 보였기 때문에 별다른 첨언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실제로 아르사크에 대한 평판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오가는 시종들까지도, 세 명의 후보 중 아르사크가 가장 훌륭하다고 소곤거렸다.

“말이나 타고 검이나 잘 휘두르는 줄 알았더니 못 하는 게 없어. 토르갈의 족장이 여식 하나는 잘 가르친 모양이야.”

언제는 뭐 저런 걸 길러냈냐고 불평해 놓고서는. 테오도르는 왠지 모르게 속이 꼬이는 기분을 느끼며 말을 꿀꺽 삼켰다.

“그 증거로, 봐라. 그녀를 당장 심사에서 탈락시키라고 난리가 났어.”

귀족들에게서 온 다양한 크기의 편지를 손끝으로 툭 치며 에리히가 코웃음을 쳤다.

“아르사크 님은 현재 후녀로서 해야 할 본분을 다하고 계신데, 무슨 명분으로요?”

“기마대의 기수를 욕보였잖아. 그리고 수도에 입성할 때 그 몰골도. 시작부터 황제의 체면을 떨어트렸으니 자격이 없다는 거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말이라고 해? 웃기는 놈들. 언제부터 내 체면을 세워주었다고?”

에리히는 손짓으로 시종장을 불러 책상에 쌓인 편지들을 모조리 가져가게 했다. 귀족들이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한들,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탈락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만약 최종 심사에서 아르사크가 발탁된다면? 에리히는 신의 힘 같은 것은 전부 다 지어낸 옛날이야기일 뿐이라 비웃었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않다면?

에리히의 계획은 최종 심사에서 세 명을 전부 다 떨어트리는 것이리라고 테오도르는 확신하고 있었다. 높은 확률로 볼핀의 딸에게 가짜로 만든 빛이 비칠 것이고, 무슨 수를 써서든 그 거짓말을 밝혀내면 그녀는 자동으로 탈락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홀드빅의 딸과 아르사크 역시 그럴싸한 이유를 대고 탈락시킨 뒤, 에리히가 적당하다 생각하는 인물을 발견할 때까지 황후를 맞는 것을 좀 더 미루려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계획이 틀어진다면?

‘만약 폐하께서 약속을 깨고 돌려보내 주지 않는다면 아르사크 님이 어떻게 나올지 생각도 하기 싫은데.’

“그런데 아직은 잔챙이들만 걸려드는군. 좀 더 초조하게 만들어볼까?”

“예? 에리히 님, 그게 무슨…….”

테오도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에리히는 짓궂은 장난이라도 꾸미는 소년처럼 과장스럽고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목을 쭉 젖혔다.

“사냥을 가자, 테오.”

“…예?”

“이따금 고삐를 풀고 달리게 놔둬야 얌전한 말로 길들일 수 있거든.”

7장 사냥

“아가씨!”

문이 벌컥 열리며 시녀 아이가 뛰어 들어옴과 동시에 힐데트로스의 눈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좀 더 조심해서 다니지 못해? 여기가 어딘지 알고는 있는 거야?”

“그게, 저… 죄송합니다, 아가씨.”

주인의 성격을 아는지라 얼른 허리를 굽힌 시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힐데트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무엇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종이 위에 계속해서 글자를 쓰다 말고 짜증을 내며 깃펜을 내던졌다.

서슬에 놀란 시녀가 발끝을 움찔거리고 있는 사이, 힐데트로스는 성마르게 도드라진 이맛살을 구기며 미간을 짚었다.

“무엇 때문에 소란을 떨었는지 말해봐.”

“그게, 제가… 방금 나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폐하께서 사냥을 가신다고 합니다.”

“사냥? …그래, 날씨가 풀렸으니 그럴 때지. 그까짓 일로 왜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를 못 하겠구나.”

“저기, 그… 그 후녀를 데려가신다고 해요. 변방의… 유목 부족에서 왔다는 후녀를.”

힐데트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리며 잉크병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드레스 자락에 검은 잉크가 튀어 온통 얼룩덜룩한 흔적이 생겼다.

악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 별궁은 후작가의 저택이 아니다. 그 누구 앞에서도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확실한 이야기니? 네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정말 똑똑히 들었습니다.”

“홀드빅의 딸은? 그 여자도 데려간다고 하셨어?”

“아뇨, 루이제 님도 지금쯤 소식을 들으셨을 거예요. 저, 아가씨, 폐하께서는…….”

“됐어, 입 다물어. 네가 입 댈 일이 아니야.”

시녀는 얼른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다물었다.

힐데트로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 바람에 바닥은 잉크 자국으로 엉망이 되었고, 오늘 안에 저 얼룩을 다 지우려면 시녀들은 아마 한숨도 자지 못할 것이 뻔했다.

“너는 지금 바로 아버님께 다녀와.”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어떤 말을 전해야…….”

“생각을 좀 해! 네가 방금 나한테 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면 될 것 아니야!”

결국 큰소리가 나고야 만다. 시녀는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끄덕이고 달아나듯이 방을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얇삭한 입술이 희게 바래도록 세게 깨물고 있던 힐데트로스는 이미 나뭇결 사이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한 잉크 자국 위로 찻잔을 팽개쳤다. 아름답게 세공된 도자기 파편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끝장이야.’

주먹을 움켜쥔 힐데트로스의 입에서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로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혼기마저 놓치며 여태까지 틀어박혀 살았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는 모르지만, 내 자리를 노리면 누구든 가만두지 않아.’

날카로운 파편에 닿은 햇빛이 몸을 뒤틀며 반짝였다. 힐데트로스는 부서지는 햇빛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 * *

황궁의 사냥터는 얼핏 무성한 숲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말을 몰면서 질서 있게 정리된 덤불과 나무들, 말이 달릴 수 있는 길과 분리되어 숨겨진 산책로를 둘러보았다.

일정한 거리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나 호수들은 숲에 불이 났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디서 불이 나더라도 결코 궁까지는 다다를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수도를 포함한 부근은 비가 그렇게까지 자주 오는 지역이 아니므로 강우량에만 의존할 수는 없을 것이고, 정기적으로 물을 채우는 것도 큰일일 테니 아마 지하에서 솟아나는 물을 이용해 수위를 맞추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똑똑하군. 이 공사를 하면서 틀림없이 지하수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도 연구했을 거야. 그걸 알면 갑작스러운 가뭄을 관리하기도 수월해지지.’

“그대가 살던 곳에서는 주로 매사냥을 하겠지?”

고삐를 쥔 채 느긋하게 말을 몰며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울창하게 자란 녹나무를 바라보았다.

“항상 매를 이용하는 건 아니지요. 말을 달리거나 활을 사용하기 힘든 겨울에는 주로 매나 수리를 이용해 사냥을 하지만 짐승들이 살찔 때는 직접 사냥하는 편입니다.”

“활을 잘 쓴다고 들었는데.”

“살아있는 건 뭐든 잡을 수 있답니다.”

“뭐든?”

에리히의 말은 로즈안나의 말이 우는 소리에 뚝 끊어지고 말았다. 로즈안나는 안장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몸을 추스르느라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겁내면 떨어지고 말아,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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