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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4화 (14/191)

14화

“테오.”

에리히의 옆에 있던 테오도르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불러와.”

테오도르는 곧장 서재를 나섰다. 에리히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조금 기가 죽은 듯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번 심사에서 그대의 책임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막중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홀드빅과 볼핀의 딸들을 심사할 인물은 내 의지로 결정한 인물들이 아니다. 오로지 그대만이 나의 의지로 발탁한 인물이지.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심사에 부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도…….”

“모든 게 다 그대의 생각대로 정의롭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야.”

에리히가 말했다.

늙은 교사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에리히의 서재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오다시피 했을 때만 해도 당장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버틸 생각이었는데,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에리히는 결코, 단 한 발자국도 양보할 것 같지가 않았다.

“뼛속까지 다 바꿔놓으라는 건 아냐. 다만 최종 심사 전에 떨어질 일이 없을 정도로만 그럴듯하게 꾸며놔. 멍청하지는 않으니 어떻게든 잘 구슬려보라고.”

“…알겠습니다, 폐하.”

“이만 가봐.”

노인은 늙수그레한 얼굴에 더욱 수심이 깊어진 채 에리히의 서재를 나섰다. 그때 테오도르와 아르사크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십중팔구 불리한 상황에서 불려오는 것을 알면서도 아르사크는 태연하고 당당했다. 노인이 한숨을 쉬자, 뒤에서 테오도르도 그 속을 이해한다는 듯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절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앉은 그대로 눈만 치켜뜬 채 그녀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그렇게 버티다 보면 내가 그대를 순순히 심사에서 떨어트려 줄 것이라고 기대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까지 멍청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순진하군.”

“폐하께서 저를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으시다 한들 다른 귀족들의 입을 다 막지는 못하시겠죠. 전 소문을 타고 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아예 대놓고 비꼬았다. 하는 둥 마는 둥 한 경어도 에리히의 복장을 뒤집어놓기 위한 수단일 뿐, 존경심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에리히의 흰 이마에 핏대가 약간 도드라졌다가 가라앉았다.

“최종 심사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동안 시키는 것만 하면서 얌전히 있어 주면 자유를 약속하지.”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제국의 맹세란 허무하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지라.”

“과연 그대가 아껴 마지않는 부족민들의 생각도 그러할까?”

내내 시큰둥하던 아르사크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를 의식하며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내가 황궁으로 오면 내 부족민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대가 그대의 의무를 다할 때의 이야기지.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며 식량이나 축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당신의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제국의 정치 싸움이라면 나도 들은 것이 있어. 황위를 빼앗길까 봐 두렵나? 그래서 수도 귀족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변방까지 구원 요청을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인가 보지?”

“아르사크 님!”

테오도르가 외쳤다. 아니, 사실 외침이라고는 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쥐어 짜내듯, 어쩔 줄 몰라 터져 나온 작은 비명에 가까웠다.

에리히와 아르사크는 서로 멱살이라도 잡아챌 것 같은 기세로 맞붙은 채 살기등등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을 경박하게 놀리지 않는 법부터 배워. 여기는 네 멋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는 토르갈이 아니니까.”

“부족 사람들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오늘부터 잠들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눈을 감는 순간, 그다음의 광경은 영영 모르게 될 테니까.”

“얌전히 할 일을 다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 안심하도록.”

에리히의 눈이 묘하게 번뜩였다.

아르사크는 이 갈리는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깨물며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한시라도 더 머물렀다가는 참지 못하고 에리히의 목을 조르고 말 것 같았다. 그 정도 인내심을 발휘한 것도 아르사크의 성격으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아르사크 님!”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르사크는 돌아보지 않았다.

로즈안나를 기다려야 했다. 수도의 어딘가라고 했으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이 되든, 로즈안나가 가져올 진짜 소식을 알아야 했다. 정말로 부족민들이 노예나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다면, 그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리히의 목을 쳐버릴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아르사크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교사는 처음에는 미심쩍은 기색이었지만 아르사크가 단 몇 시간 만에 황실의 복잡한 계보도와 건국 역사를 눈 감고도 읊는 모습을 보여주자 나중에는 거의 감동한 것 같았다.

“아르사크 님처럼 우수한 분은 처음입니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여러 사람을 만났고 그들을 가르쳤지만… 이렇게 빨리 배우는 분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조용히 해, 계산이 헷갈리잖아.”

아르사크가 말했다. 복잡하게 나열된 숫자를 번갈아 확인하고, 더하고 빼고 나누며 계산하는 속도도 빨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르사크는 천문학에도 능했다. 시험 삼아 자수를 놓아보게 했을 때, 늙은 교사는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고작 차 한 잔을 마실 때도 우아함이나 조신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김이 풀풀 나는 차를 단번에 들이켜곤 했다― 자수를 놓는 실력만큼은 수도의 귀부인들을 다 데려다 놓아도 아르사크 하나를 이길 수 없을 정도였다.

“자수 놓는 거 처음 봐? 그렇게 한 땀 한 땀 감탄할 일인가?”

“물론 여러 번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처음입니다. 마치 새가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해. 어렸을 때 아버지 명령으로 틈만 나면 자수를 놓았으니까.”

아직 부족이 융성했을 때……. 아르사크는 바늘을 쥔 손을 일정하게 움직이면서 눈을 깜빡였다.

아르사크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모두들 자수를 놓을 줄 알아야 했다. 다른 재주는 한 가지도 없다 하더라도 자수만큼은 놓을 수 있어야 비로소 한 사람 몫으로 인정을 받았다.

자수를 놓아 만든 생활용품이나 장식품, 검집이나 안장 같은 것들은 부족 내에서 사용하기도 했지만 내다 팔아 부족을 먹여 살릴 돈을 벌어들이는 요소 중 하나였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취미로 손수건이나 수놓는 아가씨들하고는 상황 자체가 달랐다는 거지, 말하자면.”

“아르사크 님께서 이토록 훌륭한 자질을 갖추신 것을 알면 폐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입 다물지 않으면 쫓아낼 거야. 내 앞에서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

아르사크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노인은 어제와는 달리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우수한 학생을 만나는 것은 몇 살이 되어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다며 드러누워 뻐팅기던 어제의 그 진상과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아르사크가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르사크는 바늘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르사크가 생각했던 대로 로즈안나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아르사크!”

아르사크는 손에 들고 있던 수틀을 저도 모르게 바닥으로 내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티리야!”

별궁으로 오는 내내 화난 표정으로 말이 없던 티리야는 아르사크를 보자마자 통곡을 하며 매달렸다. 애절하게 헤어졌던 연인이라도 다시 만난 것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 바람에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아르사크까지 난감한 표정으로 진땀을 뺐다.

눈물 콧물을 빼며 한참 동안이나 숨넘어가게 울던 티리야는 차를 한 잔 마시고서야 겨우 진정을 했다.

그동안 아르사크는 티리야의 행색이 생각했던 것보다 깔끔하다는 사실에 남몰래 안도하고 있었다.

“이제 다 울었어?”

깨끗하던 손수건 다섯 장을 혼자서 다 버린 티리야가 약간 무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법석을 떨며 울더니 정신이 들고 나자 스스로 생각해도 감정이 너무 격했다 싶은 것 같았다.

“말해봐, 티리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희가… 토르갈의 사람들이 수도에 있다는 게 사실이야?”

훌쩍거리는 티리야의 어깨를 잡으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젖은 코와 볼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내던 티리야는 분하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정말로 다들 공사에 동원되었단 말이야?”

어두워진 표정으로 아르사크가 물었다. 그러나 티리야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공사라니, 아니에요. 우리가 설마 그런 일에 순순히 끌려왔겠어요?”

“그럼 아니란 말이야? 그게 아니고서야 도대체 왜 수도에 있어? 내가 곧장 동쪽으로 가라고 말했잖아.”

“갔어요. 아니, 가려고 했죠. 우리가 이동 준비를 거의 다 끝냈을 때, 황제의 병사들이 다시 우리를 찾아왔어요. 우리가 아르사크와 같이 수도에 가야 한다고요. 나와 몇몇 사람들은 반대했지만, 정착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에 부족의 대부분이 마음을 돌렸어요. 아르사크가 사람들을 책임지라 말했잖아요. 가겠다는 사람들만 떼어 보낼 수 없었어요.”

티리야가 전해준 사실은 당황스러운 내용뿐이었다. 아르사크는 이제 에리히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티리야의 말에 따르면, 토르갈 부족의 사람들은 아르사크가 떠나고 채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제법 큰 마을의 근처에 이미 터가 마련되어 있었고, 가축과 재산도 빼앗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각자 원하는 장사를 하거나 생활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일정한 금액도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요. 마을 주변을 항상 떠나지 않거든요.”

티리야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해? 주변을 순찰하거나, 아니면 침입 같은 것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르사크 님, 저도 직접 살펴보고 왔습니다. 황궁의 병사들이 마을 주변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 주변은 모두 민가나 장터뿐이라, 이전에는 병사들이 주둔하지 않았습니다.”

로즈안나가 티리야의 말을 거들었다. 아르사크는 격분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입술을 다물었다.

‘인질을 잡아두겠다는 거군. 언제든 내게 경고할 수 있도록.’

“아르사크, 아르사크는 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거예요? 모두들 아르사크 걱정을 해요.”

티리야가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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