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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3화 (13/191)

13화

심사가 시작되고서는 에리히로부터 허락받은 승마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르사크는 부당한 처사라고 항의를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아르사크가 에리히를 향해 어떤 말을 퍼부어댔는지, 로즈안나는 그것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신에게 맹세했다.

“아르사크 님, 하지만 황후가 되시는 일은 아르사크 님께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르사크 님의 부족민들을 위해서도요.”

눈치를 보던 로즈안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소파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아르사크의 몸이 갑작스럽게 솟구쳤다. 그 서슬에 이마에 얹혔던 수건이 저만치 날아갔다.

“로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르사크의 얼굴을 본 로즈안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사크는 더욱 매섭게 변한 눈빛으로 로즈안나를 쳐다보며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아르사크 님!”

“말해, 로즈. 토르갈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제 눈으로 확실하게 본 건 아니에요. 다만 소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문이냐니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교사가 돌아온 모양이다. 로즈안나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아르사크가 험악하게 소리쳤다.

“지금은 안 되니까 꺼져!”

문 너머에서 당황스럽고 부산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로즈안나는 첫날부터 에리히가 읽게 될 아르사크에 대한 형편없는 보고서를 생각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손 좀 놔주세요, 아르사크 님.”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거머쥐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며 로즈안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할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분노가 불꽃처럼 번쩍번쩍 튀어 올랐다.

“토르갈의 남은 부족민들이… 수도의 공사 현장에 동원되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공사에 동원되다니? 내 부족민은 노예가 아니야.”

“맞습니다. 그런데… 변방의 유목민들로 보이는 자들이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정확히 토르갈 부족민인지는 알 수 없으니, 아르사크 님께서 원하시면 제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당연히 알아봐야 했다. 아르사크는 거의 서리라도 내뿜을 것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슨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지 로즈안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정말 토르갈의 부족민이라면, 아르사크 님께서 지금 쫓겨나시는 것이 아무런 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약속했어. 나만 황제의 명령에 따르면 우리 부족민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라니… 설마, 폐하를 말씀하십니까?”

“그래. 나한테 그 말을 한 건 테오도르 그자였지만, 그게 황제의 명령이었으니 황제가 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만약 로즈안나,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두 놈 다 용서할 수 없어. 이렇게 비겁한 짓을 당하고 가만히 있는 건 우리 부족의 방식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아르사크는 당장이라도 에리히가 있는 중앙궁으로 쳐들어갈 것 같은 기색이었다.

로즈안나는 자신이 당장 소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 겨우 그녀를 달랬다.

문 앞에 서 있던 교사는 로즈안나를 보자마자 눈을 부라렸다. 평생 이런 모욕을 당한 것은 처음이라는 듯이, 사색이 되어 주름진 눈가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지만 로즈안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리를 꾸벅 숙이고 복도를 달려가면서,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부디 저 가엾은 노인을 숨넘어갈 때까지 괴롭히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 * *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힐데 양. 아, 이렇게 불러도 실례가 아니겠지요?”

루이제가 한껏 꾸며낸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 비해 힐데트로스는 나이답게 차분한 태도였다. 어디로 보나 지체 높은 가문의 딸이라는 기색이 엿보였다. 찻잔을 드는 모습이며 내리깐 눈매, 숨소리조차 고요했다.

어느 면으로 보나 황후가 되기에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루이제는 빼어나게 아름답기는 해도 황후보다는 차라리 천방지축 공주라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모습이었다.

“실례라뇨, 루이제 양. 저를 친근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제가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 것을 어려워한다며 늘 걱정하셨지요.”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지만, 힐데 양을 만나면 배울 점이 많을 테니 꼭 잘 지내라고 당부하신걸요.”

서로 굳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입술만 움직여 우아하게 미소를 띠는 힐데트로스를 보며 루이제는 속으로 아니꼬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힐데트로스와 척을 져서 좋을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와 좀 가까이 지내는 편이 괜찮은 정보를 얻어내기에는 유리했다.

“그러고 보니 루이제 양은 먼저 별궁으로 오셨죠? 저희 말고도 후녀가 한 분 더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 변두리 부족의 족장인지, 족장의 딸인지를 말씀하시나요? 네, 저도 두어 번 마주쳤습니다. 하지만… 도통 이런 사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어서요.”

“독특한 분이시라는 소문은 저도 들어서 알고 있답니다.”

‘독특한 분 좋아하네. 속으로는 누구보다 경멸하고 있을 텐데.’

루이제는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찻잔을 들었다.

“폐하께서… 그분께 말 타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워낙 천방지축이니 그러셨겠죠. 말을 타고 멋대로 정원을 내달리며 꽃을 망치지 말라는 분부가 아니셨을까요? 뭐, 그런 의도를 눈치챘을 것 같지는 않아요. 힐데 양이 신경 써야 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지요.”

“그럼 루이제 양은 제가 신경 써야 하는 인물이신가요?”

조용한 미소를 띤 채 힐데트로스가 말했다. 루이제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감추는 것도 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농담입니다. 실례했어요.”

작게 웃음을 터뜨린 힐데트로스가 예의 우아한 태도로 찻잔을 기울였다.

루이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힐데트로스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다가, 금세 녹아내릴 것 같은 표정으로 미소를 띠었다.

“힐데 양에 비하면 저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거예요.”

“물론, 그러셔야지요. 자신의 본분을 잘 아시는 분이로군요.”

비웃고 무시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표정은 여전히 온화하다.

루이제는 힐데트로스를 고지식하고 앞뒤가 꽉 막혔다고 평가했던 것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결코, 소문대로 말 없고 조용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루이제는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차를 마시자고 제안한 것이 힐데트로스였으므로 그것은 무척 실례되는 행동이었지만, 어차피 교사가 없는 자리에서 예의를 차려봐야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힐데트로스는 루이제의 그런 행동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면 같은 표정만 지은 채 멍하니 다른 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또 다른 후녀, 아르사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황제는 그녀의 어떤 점을 보고 후녀로 데려온 것일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 * *

아르사크의 교육과 심사를 담당하게 된 교사는 무척 나이가 많은 인물이었다. 정중하게 표현해야 노인, 그렇지 않으면 당장 관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늙은이다.

하급 귀족의 신분이지만 학식이 빼어난 편이었고, 그래서 자주 황실이나 고위 귀족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세월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아르사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난 제국 계보도 같은 건 관심 없다니까. 이미 죽은 사람들 이름을 읊어서 어디다 쓸 건데?”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느라 아르사크의 머리꼴은 엉망이었고 드레스도 흐트러져 있었다. 거기까지는 늙어서 눈이 어두운 척 참아줄 만도 했으나 수업에 전혀 따라오려 하지 않는 것은 문제였다.

뭔가 하려는 의욕이라도 보여야 평가를 할 수도 있는데, 하는 말이라고는 들을 생각도 없으니 늙은 교사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투덜거리기는 했으나 시키는 대로 하려는 척이라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로즈안나의 존재 덕분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이 환장할 상황에서 그를 구해줄 로즈안나는 어제 오후부터 쭉 부재중이었다.

“아르사크 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제가 폐하께 아르사크 님에 대해 뭐라고 말씀을 드릴지 걱정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협박하는 거야? 안 됐지만 난 걱정 같은 것 안 해. 난 빨리 이 지겨운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이야.”

아르사크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인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었다. 평생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좋습니다.”

수염을 푸들푸들 떨면서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슬그머니 올려다보는 아르사크의 눈빛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무구했다.

차라리 다른 귀족들처럼 기싸움이라도 하려는 의도라면 자존심이고 뭐고 숙여주는 척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아르사크에게는 아무런 의도도 없다는 것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아르사크는 정말로, 그냥, 하기 싫어서 뻗대고 있을 뿐이었다.

“좋습니다! 이 늙은 것은 아르사크 님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겠군요!”

교사는 문을 쾅 닫으며 아르사크의 방에서 나갔다. 시녀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저희들끼리 속닥거리다 그만 사라졌다.

아르사크는 소파에 드러누운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로즈안나로부터는 아직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다.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두겠다니,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지?”

턱을 괸 에리히의 싸늘한 시선이 늙은 교사의 이마로 날아와 꽂혔다. 평소였다면 감히 말 한마디 붙여보기도 힘든 분위기였지만, 이미 아르사크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터라 그는 이제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폐하. 아르사크 님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질이 너무 빼어나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어지간히 버티고 있나 보군. 로즈안나는 뭘 하고 있지?”

“어제부터 자리를 비웠습니다. 행선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주인이나 시녀나 제멋대로군. 나한테 보고도 없이.”

에리히의 손끝이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 냉랭하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더욱더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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