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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2화 (12/191)

12화

만약 아르사크의 신변에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다면, 지금쯤 에리히는 땅에 나뒹구는 그의 목을 발로 걷어차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죽이라는 것도 에리히 나름대로는 주변을 의식한 것이었다.

장갑을 벗은 아르사크가 가벼운 웃음소리를 낸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이미 멀찌감치 끌려간 기수와 에리히를 번갈아 보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황후의 미덕 같은 것은 전 모릅니다. 다만, 패자를 자비롭게 대하는 방식이라면 좀 알고 있지요.”

“용서해 주라는 말을 어렵게 돌리는군.”

“용서라뇨? 전 비겁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쩌라는 말이야?”

“레이스 백 벌을 뜨게 하세요. 그걸로 발깔개를 새로 만들어야겠군요.”

아르사크의 말에 테오도르와 로즈안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잠시,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에리히가 갑자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하지. 아주 자비로워서 돌아가시겠군.”

“그리고 폐하께서 제게 약속하신 것은요?”

“그대도 하루 두 번까지는 말을 타고 달려도 좋다. 단, 정원은 안 돼. 기마대의 훈련장을 사용하도록.”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턱 아래를 손으로 받쳤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턱이 빠져버리고 말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르사크가 말했다. 흙먼지로 지저분해진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리히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6장 심사

성으로 돌아오는 내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리히는 서재의 문을 닫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훌륭한 기수를 데리고 오라고 했지, 테오도르. 협잡질이나 하는 사기꾼을 데려오라고 했나?”

요즘 들어 하는 것마다 엉망진창이 된다. 테오도르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얼굴을 봤어? 말채찍으로 얼굴을 반쯤 날려놨다고. 수틀리면 내 뺨도 그렇게 후려칠 거야.”

그러게 왜 그런 사람을 데려오라고 해서는. 테오도르는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폐하, 지금이라도 후녀를 바꾸시는 것은…….”

“아니, 안 바꿔. 저 설쳐대는 꼬락서니를 볼핀과 홀드빅에게도 보여주고 싶군.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려 하지 않을까? 볼만한 광경일 텐데.”

이제는 테오도르도 에리히의 의중이 알쏭달쏭했다. 아르사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을 때마다 당장 죽여버릴 것처럼 길길이 날뛰면서, 결코 아르사크에게 직접적으로 벌을 주지는 않는다.

평소 에리히의 성격을 잘 아는 테오도르로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황제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들고서도 목이 붙어 있다니, 다른 귀족들이 알면 정말 기절초풍할 노릇이기는 했다.

“토르갈이 대군을 둘 만한 여력이 없어 다행이군. 큰 위협이 될 뻔했어.”

“토르갈의 인구수가 줄어든 것은 역병 때문이었지요?”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리히는 별안간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버님이 아직 살아계실 때의 일이지.”

“그때… 토르갈의 족장, 그러니까… 지금 아르사크 님의 부친이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셨다 들었습니다.”

“맞아. 하지만 제국은 그 요구를 묵살했지. 그러니 나에게 이를 갈고 있을 거야.”

“그렇지만, 에리히 님. 그건 에리히 님께서 대리청정을 하시기 전의 일이지 않습니까.”

창밖을 내다보던 에리히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그는 잠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맞아. 그때는 나도 어렸으니까. 숙부님께서 잠시 대리청정을 하고 계셨어.”

“위든 님께서요? 그분은 온화한 분이신데, 어째서 그런 요청을 거절하셨을까요?”

“글쎄, 그때는 아버님의 병 때문에 온통 술렁거렸을 때니까. 숙부께서는 수도의 귀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셨을 거다.”

에리히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테오도르는 그의 속내에 무언가 말하지 못한 것이 더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보일 듯 말 듯 하게 찡그린 미간에서 그 꺼림칙함이 엿보였다.

“그러고 보니 숙부를 뵌 지도 오래되었군.”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에리히가 말했다. 테오도르는 위든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다.

에리히의 부친, 그러니까 지금은 죽고 없는 선대 황제의 손아래 동생인 그는 인정스럽고 온화해 영지의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가 대리청정을 했을 때, 오히려 에리히보다도 그가 황제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말하는 귀족들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원칙상 황제의 직계 자손이 살아있는 한 형제가 그 자리를 물려받을 수는 없다.

위든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험악한 소문도 돌았지만, 에리히가 대리청정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에리히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의 영지로 내려가 버렸다. 그러고는 괜한 소문을 막아야 한다며 수도에는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테오, 네가 가서 숙부를 모셔 오도록 해라. 어차피 심사가 시작되면 오셔야 할 테지만, 좀 더 일찍 뵙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안부도 여쭐 겸.”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토르갈의 남은 부족민들은 어떻게 됐나?”

“…에리히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처리해 두었습니다.”

“좋아, 나가봐.”

테오도르는 조용히 서재를 나갔다.

에리히는 팔짱을 낀 채 다시 바깥을 내다보았다. 토르갈의 부족민들에 대한 소식을 아르사크가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만약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어차피 황후가 되지 않겠다고 뻗댈 게 뻔하니, 나도 뭔가 수를 써야겠지.’

주변을 둘러봄과 동시에 에리히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을 알아도 별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에리히는 못 박힌 듯 서서 끝도 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을 내다보았다. 멀찍이, 마치 환상처럼 곧게 뻗은 지평선에서 모래 먼지가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뭐 해! 빨리 오라니까!’

쨍하니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인 에리히의 허리께로 아이들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어갔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다. 남자아이는 아무리 해도 여자아이를 완전히 앞지르지 못해 분한 표정이었다.

‘반칙이야! 난 신발이 불편하다고!’

남자아이가 외쳤다. 에리히는 순간적으로 그 아이가 신은 신발을 쳐다보았다. 별로 불편할 만한 신발은 아니다.

여자아이는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변명하지 마. 넌 그냥 느림보라는 걸 인정하지 그래?’

‘너, 언젠가 내가 아버님의 뒤를 이으면 무진장 때려줄 거야.’

분을 못 이긴 남자아이가 씨근덕거렸다. 그 아이의 머리카락은 발밑에 깔린 모래 바닥과 비슷한 색으로 반짝거렸다.

때려주겠다는 위협을 하는데도 여자아이는 깔깔거리며 소리 높여 웃기만 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안다.

몸을 움직인 순간, 에리히는 잠에서 깨었다.

아직 해가 뜨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무척 조용했다. 종을 울려 시종들을 깨우려다 말고, 에리히는 아직 나른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오늘은 후녀 심사가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 * *

“아르사크 님, 좀 더 턱을 치켜드십시오.”

깐깐한 얼굴의 교사가 손에 들고 있던 가느다란 지휘봉을 탁 휘둘러 소파를 내리쳤다.

아르사크는 짜증이 덕지덕지 엉긴 표정으로 턱을 좀 더 치켜들었다. 자연스러운 자세가 아니어서 어깨와 목이 부들부들 떨리고 허리가 뻐근했다.

“이렇게 바보같이 걷는 인간이 어디 있어?”

“정숙한 자태입니다.”

‘정숙한 자태 좋아하네. 사람 잡는 고문이겠지.’

아르사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양쪽 어깨에 얹힌 얇은 책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부들부들 떨렸다.

균형 감각이 아무리 좋은 아르사크라도 이건 정말 힘들었다. 첫날부터 이 지경이니 이후의 심사가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다.

“교육을 받으시는 모든 과정이 심사에 포함됩니다, 아르사크 님. 교육 중에 아르사크 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 행동거지, 태도 등이 모두 폐하께 보고된다는 이야기이지요.”

늙은 교사는 이것이 마치 대단한 영광이라도 된다는 양 엄숙하게 말했다.

아르사크는 그깟 보고 따위야 안중에도 없었다. 차라리 이 늙은이를 걷어차고 뛰쳐나가서 한방에 탈락해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로즈안나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바로 옆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무서울 것 없는 아르사크였지만 로즈안나에게는 약했다.

“좋습니다. 잠시 휴식하지요.”

몇 번의 실패 끝에 아르사크가 마침내 정해진 거리를 다 돌자 교사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곧장 책을 집어 던지며 소파에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아르사크 님, 그것은 조신하지 못한 몸가짐입니다. 그리고 책을 내던지시다니요, 이것은 귀중한 수업 자료로써…….”

“휴식이라고 하지 않았어? 휴식의 말뜻을 안다면 날 좀 내버려 둬야 한다는 사실을 알 텐데.”

아르사크가 말을 잘라버리자, 나이 많은 예절 교사는 마치 모욕이라도 당한 듯이 수염을 푸들푸들 떨다가 방을 나가버렸다.

로즈안나는 물수건을 적셔 와 아르사크의 이마께를 닦아주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르사크 님, 짜증 나신 건 알겠지만 그렇게 행동하시면 득 될 것이 없습니다.”

“내가 득 봐야 할 일도 없어, 로즈.”

“볼핀과 홀드빅의 딸들을 심사하는 교사들은 모두 다 그 가문에서 입김을 불어넣은 자들일 겁니다. 지금으로써는 아르사크 님이 아무리 잘하셔도 불리한 상황이에요.”

“글쎄 난 아무 상관도 없다니까. 제발 나갔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다고.”

아르사크가 정말로 짜증 난 듯이 투덜거리자 로즈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겨우 첫 수업인데, 벌써부터 아르사크는 도망갈 틈만 노리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별수 없이 그녀의 옆을 하루 종일 감시하는 것은 고스란히 로즈안나의 몫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아르사크의 수발을 드는 것이 좀 까다롭기는 해도 도망갈까 전전긍긍하는 것은 좀 덜했는데, 이제 대리청정와서는 차라리 수발을 들며 그 경박한 투덜거림을 다 받아주던 일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또 이렇게 나뭇가지처럼 걷는 연습만 해야 해?”

“아뇨, 이후부터는 또 다른 수업이 있습니다. 왕가의 계보도를 외우는 수업도 있고, 기초적인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책을 읽고 토론도 하지요. 그 외 음악이나 시도…….”

“난 미쳐버리고 말 거야.”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로즈안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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