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1화 (11/191)

11화

로즈안나는 진짜로 전쟁이 난다면 귀부인들은 남편의 갑옷을 닦아주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러 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르사크에게 그런 말을 해봐야 시간 낭비였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아르사크 님.”

테오도르가 말했다. 말 위에 올라앉은 아르사크는 투레질을 하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준비됐어.”

“규칙은 간단합니다. 설치된 장애물을 넘어 깃발을 돈 후, 이곳으로 빨리 돌아오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아르사크는 멀찌감치 꽂힌 깃발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히 멀어 보였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금방일 것이다.

달리는 중간에는 말들이 넘어야 할 장애물도 있었다. 그중에는 사람의 키와 엇비슷한 높이로 설치된 것도 있었다.

“명예를 걸고 정당한 승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출발선에 선 아르사크는 자신의 옆에 있는 기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긴장, 불안, 초조함. 그런 것들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한편, 말 등에 올라앉은 자세만큼은 흠잡을 데 없었다.

“준비하십시오. 깃발이 내려가면 출발하시는 겁니다.”

아르사크는 속으로 천천히 수를 세었다. 숨을 내쉰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깨를 낮춘다. 커다란 깃발이 힘차게 펄럭거렸다. 두 필의 말이 단숨에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로즈안나는 뿌연 모래 먼지 너머로 순식간에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것은 옆에 서 있는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말을 잘 타는 편이었지만, 저렇게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어 달릴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테오도르 님… 만약 아르사크 님이 지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로즈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테오도르는 이미 멀어져서 잘 보이지 않는 아르사크와 기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스 백 벌을 뜨게 되시겠지.”

아르사크는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몸을 바짝 낮춘 기수는 출발한 후 단 한 순간도 아르사크와 나란히 선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여유가 있었다면 칭찬이라도 한마디 해주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아르사크도 그럴 만한 틈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 말을 달려본 것은 언젠가 티리야와 시합을 했던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높은 장애물 앞에 선 아르사크가 말 등에 바짝 붙을 정도로 몸을 낮췄다. 검은 갈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가 싶더니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바닥으로 착지하자마자 곧장 쏜살같이 내달리는 말을 가볍게 토닥인 아르사크는 다시 옆으로 고개를 힐끔 돌렸다.

착지하면서 잠시 움직임이 엉켰는지, 기수는 이제 한 발 정도 뒤처져 있었다. 내달리는 속도를 감안했을 때 그 정도의 차이는 컸다.

“내가 이길 것 같은데?”

아르사크가 외쳤다. 그러자 뒤처진 기수가 이를 악물며 마편을 휘둘렀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긴 울음을 운 말이 좀 더 속력을 냈다.

땅을 울리는 묵직한 발굽 소리 때문에 아르사크는 점점 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온통 얼룩덜룩해진 얼굴을 한 채 아르사크가 별안간 소리 높여 웃었다.

“기를 쓰고 쫓아오는군!”

“입… 다물어! 천한 여자 주제에!”

기수가 악에 받친 소리로 외쳤다. 귀에 거슬릴 정도로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다.

모욕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사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수는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

테오도르로부터 승마 시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솔직히 말해 자존심이 상했다. 정예 기마대에서도 따라올 사람이 없는 자신이, 고작 변방에서 온 후녀와 나란히 말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이제 갓 기마대에 들어와 마편 쥐는 법이나 배워야 하는 애송이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황제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뿐이다.

‘고작 저따위 것과 승부를 하라니.’

아르사크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까짓 여자가 뭐라고. 만약 에리히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몇 마디 충고라도 해주었을 것이다.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지고 싶지 않거들랑 지금이라도 패배를 인정하라고. 아르사크가 장식이 달린 안장을 내치고 병사용 안장을 얹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비웃었다. 유치한 허세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상황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르사크가 앞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는 말이 비명을 지르도록 세차게 마편을 휘둘렀지만 좀처럼 아르사크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어. 저까짓 것에게…….’

기수는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장애물이 코앞에 있었다. 만약 저기서 따라잡지 못하면 이제 더는 달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뒷주머니에서 조그만 막대를 꺼냈다.

불규칙한 구멍이 뚫린 그것은 말들을 조련할 때 사용하는 피리였다. 사람에게는 별 타격이 없지만 말들은 이 소리를 정확하게 듣는다.

기마대에서 훈련한 말이 아니라면 갑작스러운 소음에 당황해 방향 감각을 잃을 것이다. 날뛰기라도 한다면 더욱 좋겠지.

기수는 자신이 탄 말의 귀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귓구멍을 단단히 막은 솜덩어리를 확인한 그는 아르사크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망설이지 않고 피리를 불었다.

“앗!”

아르사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삐를 확 움켜쥐었다. 최고 속력으로 내달리던 말이 갑작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앞발을 번쩍 치켜든 것이다.

아르사크의 몸이 휘청거렸다.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직전에, 그녀는 고삐를 있는 대로 움켜쥐며 말 등에 매달렸다.

“시건방 떨지 마, 여자! 네까짓 건 내 상대가 안 돼!”

그 순간 기수가 탄 말이 아르사크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말 등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느라, 아르사크는 그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나는 제국의 기마대에서 가장 뛰어난 몸이다! 질 것 같은가!”

그리고 기수는 다시 한번 피리를 불었다. 아르사크의 말은 더욱더 험하게 날뛰었다.

‘이대로라면 떨어져.’

아르사크는 이를 악물며 고삐를 잡고 버텼다. 그리고 기수의 입에 조그만 막대가 물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저런 피리는 주로 기마대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것이지만, 유목민 중에서도 말을 거칠게 다루는 이들은 저런 피리를 가지고 있었다.

“비겁한 놈!”

아르사크가 외쳤다. 기수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보며 야비하게 웃었다. 이제 곧 떨어질 것이다. 말발굽에 머리나 콱 밟히라지.

그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지막 장애물만 넘으면 깃발을 돌아 달리기만 하면 된다.

아르사크는 말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흥분한 말의 귀를 더듬고 그의 목을 아래로 눌렀다. 뻗대는 말의 힘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지만, 아르사크는 있는 대로 이를 악물며 말을 진정시켰다.

푹 하는 한숨 소리가 들리고 앞발이 내려갔다. 아르사크는 말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그대로 옆구리를 박찼다.

완전히 멀어졌어야 할 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장애물을 넘으려던 기수는 순간적으로 주춤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진작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어야 할 아르사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을 쫓아와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감히 내게 수작을 부렸겠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러나 기수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당황한 그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피리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마자 아르사크는 한 손으로 고삐를 쥔 채, 마치 말 등에서 일어서기라도 할 것처럼 순간적으로 몸을 치켜세웠다.

저 정도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저런 짓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믿을 수가 없어, 기수의 속도가 잠시 느려졌다. 그 순간, 아르사크는 마편을 쥔 손을 바꾸어 번개같이 기수의 뺨을 후려쳤다.

“아악!”

얼굴이 그대로 찢겨나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지른 기수가 고삐를 놓치고 나가떨어졌다.

아르사크는 날뛰는 말의 목을 힘 있게 두드리며 속도를 약간 늦추었다가, 장애물 앞에서 고삐를 빠르게 휘둘렀다. 거칠게 콧김을 분 말이 땅을 박찼다. 깃발을 먼저 돌아온 것은 아르사크였다.

한 바퀴를 돌아 아르사크가 도착했을 때, 에리히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아르사크를 노려보았다. 저만치에서 얼굴이 찢어진 기수가 피를 줄줄 흘리며 사람들에게 업히다시피 해 오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에리히가 말했다.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마저도 아르사크를 힐난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마편을 꺼내 가볍게 휘두르면서, 서슬 퍼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기수를 향해 가소롭다는 시선을 보냈다.

“저자에게 물어보십시오, 폐하.”

“내 말에 대답이나 해.”

“폐하, 이런 것이…….”

기수를 데려온 병사가 에리히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피리를 본 에리히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는 물론이거니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르사크의 말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아르사크가 말에서 떨어질 뻔했을 때,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은 테오도르뿐이었으나.

“내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에리히가 기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온기라고는 없는 목소리다. 피를 흘린 기수는 통증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덜덜 떠는 왜소한 몸뚱이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에리히가 말했다.

“황제가 주관한 시합에서 부정을 저지르다니 네놈의 간덩이가 얼마나 큰지 직접 봐야겠다. 끌고 가서 이놈의 간을 꺼내 와라.”

“폐하! 살, 살려주십시오! 부디 자비를 베푸십시오!”

기수가 처참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르사크와 에리히를 제외한 모두가 사색이 된 채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끌려가는 기수의 발버둥을 노려보던 에리히는 덤덤한 표정의 아르사크를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후녀라는 자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청도 하지 않나?”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저자가 먼저 절 죽이려고 했는데요.”

“온화함과 자비로움이 황후의 미덕이니까.”

“저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지요.”

로즈안나가 조심스럽게 아르사크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아주 조그만 움직임이었지만, 거기에는 방금 끌려가 내장이 다 튀어나오게 생긴 기수보다도 훨씬 절박한 비명이 깃들어있었다.

“그래서 정말 저자의 간을 구경하겠다고?”

“명령을 내리신 것은 폐하이십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에리히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불이 튀는 것 같은 눈으로 핏자국이 떨어진 땅바닥을 노려보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