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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0화 (10/191)

10화

‘기품이라니. 저분에게 제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인데.’

로즈안나가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기품은 다분히 귀족적인 것들뿐이었다. 사뿐한 걸음걸이, 소리조차 나지 않는 움직임, 우아한 몸가짐과 찻잔이나 겨우 들 수 있을 가느다란 손목. 희고 뽀얀 얼굴을 치장하고 보석으로 장식된… 그런 것들이 있어야 사람들은 ‘기품이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궁의 어떤 누구도 로즈안나의 말에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사크는 달랐다. 걸음걸이는 빠르고 거침없는 데다가 움직임도 컸다. 좋게 말해 호탕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천방지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우아한 몸가짐은 바랄 수도 없었다. 커튼 봉을 뜯어내서 휘둘러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게다가 몸집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귀족 영애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병약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겨울, 눈이 쌓인 들판 한복판에 코트도 없이 서 있더라도 기침 한 번 하지 않을 것 같은 여자다.

“아르사크 님, 이제 그만하세요. 빗질하시다가 날이 새겠습니다.”

“성격도 급하긴. 뭐가 그리 바쁘니? 어차피 들어가 봐야 할 일도 없는데. 말도 사람과 똑같아. 정성을 들여야 해. 네 발 달린 동물이지만, 자존심은 누구보다 세거든.”

“짐승에게 무슨 자존심이 있어요?”

“모르는 소리.”

아르사크가 로즈안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표정은 한창 장난이 심한 나이의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도 보였다. 궁에 들어온 후, 아르사크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갑작스레 심장이 덜컹거리는 기분에 로즈안나가 말문을 잃은 사이, 흥얼거리던 아르사크의 콧노래가 뚝 멎었다.

“아르사크 님?”

“저쪽으로 가, 로즈.”

낮은 목소리로 아르사크가 말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던 로즈안나는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에리히의 모습을 보고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며 멀어졌다.

아무리 황제의 명령이었다지만, 후녀가 진짜 마구간 청소를 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을 알면 로즈안나에게 먼저 벼락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진짜로 마구간 청소를 하고 있어?”

에리히가 말했다. 그의 시야에서 달아나는 것에 실패한 로즈안나는 건초더미 옆에 선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르사크는 에리히를 보고서도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을 보듯, 아무렇지 않은 시선을 던지고 빗질을 계속할 뿐이다.

옆에 서 있던 테오도르는 또 한 번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뜻밖에도 에리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천직인 것 같은데, 이제라도 새 일자리를 줄까?”

“그러시느니 절 여기서 내보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웃기는 소리. 자기가 어떤 처지인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제 처지가 어떤 처지인지 폐하께서 직접 설명해 주시지요. 저는 멍청하고 약간 미친 여자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절 데려오셨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는 것이 없더군요.”

에리히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받아 비꼬았다. 아르사크의 말에 일순간 싸늘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불안한 기운을 느꼈는지, 얌전하던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르사크는 말들의 목을 다독이면서 다정하게 쉬, 하는 소리를 내었다.

에리히는 그마저도 눈꼴시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황제인 자신을 쳐다볼 때는 동네 망나니를 보듯 하면서, 말을 쓰다듬을 때는 저토록 부드러운 눈빛을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말과 살림을 차릴 생각인가?”

“부러우십니까?”

“뭐가 부러워. 그 무쇠 같은 손으로 토닥거려 주길 바라냐고 묻는 거야, 지금?”

“원하시면 폐하께도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제게 부탁해 보세요.”

“목숨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기라도 하나 보군.”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말을 무시했다. 빗질을 마친 갈기에 윤기가 흐르는 것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아르사크는 가죽신을 신은 발끝으로 바닥에 남은 건초를 죽 밀었다.

“내기 하나 할까?”

에리히의 느닷없는 말에, 아르사크는 물론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도 놀란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금세 도전적인 눈빛으로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전 내기에 결코 져본 적이 없답니다.”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군. 내 기수와 겨뤄봐. 제국에서 가장 훌륭한 기수보다 그대가 더 말을 잘 타는 것을 증명한다면, 하루에 한두 번쯤 말을 타고 천방지축으로 날뛰어도 못 본 척해주지.”

헉, 하고 놀란 숨소리를 낸 것은 아르사크가 아니라 로즈안나였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로즈안나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은 순간, 별안간 드높은 목소리의 폭소가 마구간을 채웠다.

의례적인 미소조차 띠지 않은 에리히의 눈앞에서 이렇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인물을 이 중 단 한 명뿐이었다.

“이 내기 때문에 폐하의 안목에 대한 평판이 땅에 떨어져도 괜찮으시겠어요?”

“건방 떨지 마. 만약 진다면 그 벌로 레이스를 백 벌쯤 뜨게 할 테다. 하루 종일 방 안에서 꼼짝도 못 하도록 말이야.”

“좋습니다.”

아르사크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에리히는 눈썹만 꿈틀한 채 아르사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수도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건강한 빛의 피부와 생기 있게 또렷한 눈동자, 입을 다물고 웃지 않으면 냉랭하고 위엄이 있을 법한 얼굴이라 과연 혈통이 어디 가진 않는다 싶으면서도, 흐트러진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면 도저히 그 침착하던 족장의 딸이라 믿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하긴, 원래 그랬지.’

“그럼,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러고는 에리히가 허락을 하기도 전에 몸을 휙 돌려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쩔쩔매며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로즈안나는 에리히의 눈치를 살피다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르사크의 모습이 별궁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테오도르는 그때까지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가장 빠르고 능숙한 기수를 데려와, 테오. 저 코가 납작해지는 꼴을 봐야겠으니까.”

“…폐하,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토르갈 부족은 오랜 옛날부터 달리는 말 위에 올라서서 활을 쏠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르사크 님은 틀림없이…….”

“계속 떠들고 있을 거냐? 아니면 내 명령에 따를래?”

“…다녀오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테오도르가 황급히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호위병 몇몇과 함께 마구간에 남은 에리히는 깨끗하게 정리된 건초더미와 윤이 흐르는 말들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아르사크 님, 지금이라도 폐하께 용서를 비세요.”

“잘못한 게 있어야 용서를 빌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고 해본 소리였지만, 딱 잘라 거절하는 아르사크의 태도에 로즈안나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가죽으로 된 벨트로 바지를 고정하고 조끼를 입는 동안 아르사크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들뜬 사람처럼 연신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부산한 기색이었다.

“제국의 기마병들은 모두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을 타요. 오죽하면 말 등에 요람을 얹어놓고 아이를 재운다고 하겠어요?”

장갑의 버클을 채워주면서 로즈안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작게 코웃음을 쳤다.

“우린 진짜로 말에 애들을 매달고 다니거든. 내가 어디서 왔는지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지?”

“거짓말이신 것 다 알아요.”

“거짓말 아니야. 매달고 달리진 못하지만,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 때는 가죽으로 된 강보에 아이를 집어넣고 말에 매달고 간다고. 부모가 말을 몰면서 말이야.”

“아르사크 님도 그렇게 크셨어요?”

“그랬겠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얌전히 누워서 잠을 못 자 애가 이렇게 됐구나. 로즈안나는 별안간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 속으로 내 욕하고 있는 것 다 들려.”

“숙녀는 함부로 남을 모함하지 않는 법입니다. 자, 다 되셨어요. 움직이기 불편하진 않으세요?”

아르사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부족에서 말을 탈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말을 타는 것이 워낙 일상이었으므로, 굳이 옷을 차려입을 일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몸에 딱 맞는 부드러운 바지와 셔츠, 잠금쇠가 달린 조끼는 우스꽝스럽기는 해도 제법 편안했고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너풀거리는 드레스보다는 나았다.

“좋아. 그럼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러 가 보자.”

“아르사크 님,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폐하의 체면을 세워주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아르사크는 허리춤에 마편을 꽂으며 경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없어.”

기마병들이 훈련하는 빈터가 시합장이 되었다. 아르사크는 날카롭고 초조한 눈빛을 한 기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말을 타기에 제격인 몸집이기는 하지만, 여유로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기마대 중 가장 출중한 기수입니다. 말을 달리는 실력만큼은 누구보다도 훌륭하지요.”

팔짱을 끼고 선 에리히의 뒤에서 테오도르가 작게 말했다.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도 시합을 준비하고 있는 기수와 별다를 것 없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에리히만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르사크와 기수를 번갈아 내다보고 있었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다. 만약 진다면 그대로 강등시킬 테니까.”

“폐하…….”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하지 않는 에리히 때문에 테오도르는 복통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아르사크는 확실히 에리히의 말을 들었다.

로즈안나가 낑낑거리며 안장을 들고 왔다. 아르사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로즈안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뭐야?”

“숙녀용 안장입니다, 아르사크 님.”

둥그런 곡선이 아름다운 안장이다. 한눈에 보아도 얼마나 훌륭하게 마감이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테두리에 박힌 보석이며 쓸데없는 장식들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안장을 얹고서는 제대로 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필요 없어, 로즈.”

“네? 무슨… 그러면 저 안장을 얹고 말을 타시겠다고요?”

로즈안나가 경악한 목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아르사크 쪽을 향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마대의 병사들이 쓰는 안장을 한 손으로 휙 들어 말 위에 얹었다.

“그 안장은 말을 타고 한가롭게 걸으라고 만든 안장이지. 겸사겸사 보석 자랑도 좀 하고 말이야. 난 지금 산책하려고 말을 타는 게 아니잖아.”

“말도 안 됩니다! 이 안장을 쓰셔야 해요. 그래야……!”

“숙녀다운 행동이라고? 로즈, 말을 탈 때는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어. 전쟁이 났는데 예쁜 안장이나 챙기고 있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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