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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9화 (9/191)

9화

이대로 별궁을 벗어나 어디로든 달려 나가면 로즈안나는 거품이라도 물고 기절을 하겠지. 약 올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르사크는 고삐를 쥔 채 방향을 휙 틀었다.

“아!”

세차게 말을 달리던 아르사크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고삐를 확 잡아챘다. 아르사크보다 더 놀란 말이 앞발을 들며 길게 울었다. 말 등이 휘청거렸지만 아르사크는 용케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말을 진정시켰을 때, 아르사크는 입을 쩍 벌리고 선 테오도르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리히를 볼 수 있었다.

5장 승마 시합

“아, 아르사크 님, 이게 무슨…….”

테오도르가 입술을 달싹이자 에리히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어디, 어쩌나 보기라도 하자는 듯이 그는 침묵을 지킨 채 아르사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말 위에 앉은 채 지지 않고 그를 쏘아보던 아르사크는 사색이 된 채 뛰어오는 로즈안나를 발견하고 말 위에서 휙 뛰어내렸다.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이 펄럭 휘날리다 꽃송이처럼 내려앉았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전혀 반성하는 표정이 아닌데?”

아르사크의 말을 곧장 받아친 에리히의 눈이 좀 더 날카롭게 빛났다. 아르사크는 손만 다소곳이 모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여긴 말 타고 날뛰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야. 그대도 물론이고. 미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라고 데려다 놓은 줄 아는가?”

“미쳐서 고삐 풀린 망아지를 억지로 마구간에 욱여넣으시니 사달이 날 수밖에요.”

아르사크의 대꾸에 테오도르는 물론, 때맞춰 도착한 로즈안나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얼마나 놀랐는지 턱까지 차오른 숨을 도로 삼켰을 정도다.

이제 곧 에리히의 손에 의해 아르사크의 목이 떨어지기만을 참담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찰나, 뜻밖에도 에리히는 헛헛한 소리로 웃었다.

“후녀를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웬 미친 여자를 데리고 왔군, 테오도르. 이따위로 일을 해?”

“폐하, 아르사크 님께서는…….”

“왜 애꿎은 신하를 질책하시나요? 그는 분명 폐하의 명령을 받아 저를 데리러 왔다고 했습니다. 저를 데려오고자 부족을 몰살시키려 하신 분이 누구시지요?”

“겁이 없군. 네 입을 여기서 찢어놓을 수도 있다.”

“그것 또한 폐하께서 감당하실 일입니다. 납치하다시피 데려온 후녀의 입을 찢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후대가 장차 폐하를 어찌 평가할지 궁금하군요.”

단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아르사크가 그렇게 당돌한 대꾸를 하고 있을 때, 루이제 홀드빅은 에리히의 모습을 보고 별궁에서 나왔다가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채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그 말도 안 되는 폭언을 전부 다 들었으면서도 언성 한번 높이지 않는 에리히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모양인데, 좋아. 그럼 너에게 별궁의 마구간 청소라도 맡기지.”

“후녀가 필요하신 게 아니라 마구간지기가 필요하셨던 모양이군요.”

“그렇게 말들이 좋으면 마구간에서 살아봐, 어디.”

에리히가 돌아섰다.

뒤에 서 있던 루이제는 살풋이 웃으며 허리를 숙였지만, 그는 루이제를 향해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목숨을 건진 것이 일단 다행스러웠지만, 마구간을 청소하라는 에리히의 명령을 뒤늦게 떠올리고 거의 쓰러지기 직전인 표정이었다.

“아르사크 님, 제가 테오도르 님께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구간 청소라니…….”

“뭐 어때? 어차피 앉아만 있기도 심심하던 참이었어.”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루이제는 씩씩하게 걸어가는 아르사크의 모습을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루이제 님, 아무래도 정말 미친 여자인가 봐요.”

하녀가 소곤거렸다. 루이제도 그 생각에 동의했지만, 그보다는 에리히의 애매한 태도가 신경 쓰여서 거기에 고개를 끄덕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 찢어진 옷을 걸친 채 산적처럼 말을 몰고 성으로 들어왔다는 후녀가, 하루아침에 마구간이나 청소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소문이 온 궁에 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후녀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마구간지기가 되었다는 말도 있었고, 그게 아니라 족장의 딸인 줄 알고 데려왔는데 알고 보니 마구간지기의 딸이더라는 해괴하고 출처 모를 말들이 안개처럼 떠돌았다.

모든 소문을 다 들으며 속이 뒤집히는 것은 로즈안나였다. 정작 장본인인 아르사크는 소문 따위야 알 바도 아니고 알지도 못한다는 듯 태연자약했다.

“아르사크 님, 안 됩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가 테오도르 님께 말씀을 드려서 폐하께서 명령하신 것을 거두시게 하겠습니다.”

“넌 날 지키고 싶은 거야? 아니면 너 자신을 지키고 싶은 거야?”

드레스를 벗고 허름한 옷을 입은 아르사크의 몰골은, 평생 궁에서만 일하며 살아온 로즈안나의 기준으로는 눈 뜨고 보기 힘든 꼴이었다.

난데없는 아르사크의 질문에 로즈안나가 말문을 잃은 사이, 아르사크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양쪽으로 나눴다가 위로 한꺼번에 틀어 올렸다. 가죽으로 된 머리끈을 이로 물어 당기자 둥그렇게 말린 머리카락이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날 지키고 싶다면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보고만 있으면 돼, 로즈.”

“이게 어떻게 아르사크 님을 지키는 길이라고 할 수 있나요? 후녀의 신분으로, 장차 황후가 되실 수도 있는 분이 마구간을 청소하시다뇨!”

“황후가 마구간 청소를 하면 팔이 떨어지기라도 해? 난 정말 상관없으니 소란 떨 것 없어. 아마 이 궁에서 나만큼 마구간 청소를 잘하는 사람도 없을걸.”

그런 건 자랑거리도 뭣도 아니라는 말을 하려던 로즈안나는 이마를 짚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하든, 아르사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마구간으로 내려가는 길에 루이제 홀드빅을 마주쳤지만, 그녀는 아르사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얼굴을 아는 사이건 모르는 사이건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도 귀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도리다.

그러나 루이제는 마치 다른 하녀들과 다름없다는 듯이 아르사크를 스쳐 지나갔다.

기가 막힌 로즈안나가 몸을 돌려 그녀를 부르려는 순간, 아르사크가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란 떨 것 없다고 했잖아, 로즈.”

“하지만 이건 무례한 짓입니다, 아르사크 님.”

“눈 마주칠 때마다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시답잖은 안부나 묻는 건 시간 낭비야. 어차피 서로 관심도 없는걸.”

“홀드빅 자작가의 루이제 님은 얌전한 성품에 예의 바른 분이라 들었는데 소문도 다 믿을 것은 못 되는군요.”

“조금 전까지 나에 대한 소문이 어쩌고 했던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재미있구나.”

아르사크가 악의 없이 깔깔 웃자, 로즈안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움츠렸다.

별궁의 마구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애초에 형식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일 뿐, 후궁이나 아니면 공주들이 주로 거처하는 곳이니 말을 많이 둘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마구간에 있는 세 필의 말은 모두 훌륭한 혈통의 준마들이었다. 아르사크만이 그 말들의 진가를 알아볼 눈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는 들어올 필요 없어.”

아르사크가 말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주춤거리고 있던 시녀들은 로즈안나가 손짓하자 황급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르사크는 손수 연장을 가져다 바닥을 치우고 건초를 쌓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국적인 음이다.

“족장의 따님이시라면서, 왜 이런 일에 익숙하시지요?”

코를 찌르는 냄새에 미간을 찡그린 로즈안나가 물었다. 그녀는 너저분한 건초 더미 옆으로는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르사크는 옷이 지저분해지든 말든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마구간을 치우게 된 것이 진짜로 즐거운 것 같았다.

“우리 부족은 사람이 적었어. 누구든 일을 해야 했지. 족장이든 족장의 딸이든, 부족민들과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야. 뭐, 내가 일을 잘하는 탓도 있지.”

“사람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으세요?”

“로즈, 내 말 믿어. 비웃음 같은 건 무서운 게 아니야.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으니까.”

과연 저 사람에게도 무서운 게 있긴 할까. 로즈안나는 푸르륵 거리며 투레질을 하는 말을 피해 구석으로 물러서면서 입술을 움츠렸다.

“말을 겁내면 안 돼. 걔들은 초조해하는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거든.”

“어떻게 겁을 안 낼 수가 있나요? 이렇게 커다랗잖습니까. 발에 걷어차이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어버린다고요.”

“네가 말을 괴롭히지만 않으면 말은 절대로 널 걷어차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 애들은 순한 애들이야. 말썽부릴 만한 애가 없어.”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말과 대화라도 나눌 수 있는 거냐고 물으려던 로즈안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르사크라면 말과 대화가 통한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내가 있던 부족에서는 아주 어린 아이들도 말을 타. 그리고 활을 쏘는 연습을 하지.”

“달리는 말에서 활을 쏜다고요?”

“그래. 그래야만 사냥을 할 수 있거든. 채찍을 휘둘러서 가축을 노리는 맹수도 쫓아내야 하고.”

“아르사크 님도 그런 것을 할 줄 아십니까?”

“내가 제일 잘해.”

황후가 될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말도 아마 먹히지 않을 것이다. 로즈안나는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아르사크의 팔과 어깨를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도적을 사정없이 베어버리는 것을 로즈안나도 보았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하는 한복판에서 아르사크는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몸놀림이 가벼웠다. 특별히 심약한 사람이 아니라도 대개는 사색이 되어 기절할 만한 살벌한 싸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사크는 주춤하거나 겁을 먹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로즈안나를 지켜주라고 말했다.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여물통에 건초를 채워 넣던 아르사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적떼가 습격했을 때요. 아르사크 님 덕분에 제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로즈안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사크는 즐거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무너지려 하는 건초 더미를 발로 꽉 밀었다.

눈 깜짝할 사이 청소를 끝낸 아르사크는 말들을 씻기고 빗질하는 일도 손수 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아르사크의 키보다도 훨씬 더 큰 말들이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을 보던 로즈안나는 기분이 미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말들의 갈기를 빗질하고 있는 아르사크는 허름한 옷차림이며 지저분해진 손이며, 흐트러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까지 무엇 하나 황후 후보가 될 여자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등을 만지면서 콧노래를 부르는 그 모습에는 다른 귀족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기품 같은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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