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내가 창문 깨고 달아나지 않았나 물어본 거겠지.”
“그러실 예정인가요?”
“자꾸 잔소리하고 답답하게 굴면 오늘 밤에라도 그럴 거야.”
“그럼 저는 일찌감치 고향으로 달아나는 편이 좋겠군요. 목이 떨어질 테니까요.”
아르사크가 어깨를 숙이며 키득거렸다.
로즈안나는 장식이 달린 산호 빗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부터 천천히 빗어 내렸다.
“전 아르사크 님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에 대한 오해?”
“만약, 아르사크 님이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그 산속에서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들 아르사크 님이 황후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강하고 기품 있는 황후가 되실 수 있는 분이세요.”
“왜 이래, 로즈. 오늘은 아첨으로 날 달래보려는 작전인 거야?”
“진심입니다.”
로즈안나의 손이 힘 있게 움직였다. 엉킨 머리가 빗살에 걸리자 아르사크는 아야! 하고 조그맣게 소리를 질렀지만, 로즈안나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못된 계집애.”
입술을 뾰족하게 모은 채, 아르사크가 불만스레 종알거렸다. 민간의 어린애들이나 쓸 법한 말에, 로즈안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입매를 단정히 굳혔다.
“속된 표현은 삼가셔야 합니다. 숙녀이시니까요.”
“이것보다 더 속된 말도 할 거야. 자꾸 내 머리를 아프게 빗질하면 말이야.”
“죄송합니다, 아르사크 님. 죽여주세요.”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로즈안나를 힐끔 쳐다보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홀드빅 자작에게는 딸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루이제의 미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주변의 숱한 귀족 영애들을 다 합쳐도 그 탁월한 아름다움을 따라가기는 어렵다는 말들이 자자했다.
어렸을 때부터 칭송에 익숙했던 그녀는 자신이 장차 황후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볼핀 후작의 입김이 거센 것이 다소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의 딸인 힐데트로스는 루이제에 비해 침착하기는 해도 눈길을 잡아끄는 매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루이제 님, 곧 황궁입니다.”
시중을 드는 하녀가 마차 밖을 힐끔 내다보더니 소곤거리듯 말했다. 오로지 오늘을 위해 갖춘 최고급의 옷과 장식들은 어둑한 마차 안에서도 루이제를 별처럼 빛나 보이게 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하게 장식한 머리를 희디흰 손끝으로 가만히 매만지던 루이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 일부러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힐데트로스는 날짜를 맞춰서 들어온다지?”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영지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고지식하기는.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혀서야 무슨 수로 폐하를 보필하겠어?”
“맞아요. 루이제 님은 재치 있으시잖아요. 단연 루이제 님이 볼핀의 딸보다 더 나으세요.”
입에 감기는 칭찬이지만 루이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랫것들이 굽신거리며 비위를 맞추려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녀의 취미였다.
“그나저나 그 소문의 여자는?”
루이제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하녀가 금방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숨을 죽여 웃었다.
“거지꼴로 입성했다던 그 여자 말씀이시죠? 별궁에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 여자가 후녀가 됐단 말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아마 폐하께서 루이제 님을 더 돋보이게 해주시려고 데려오셨을 거예요.”
“그런 것이랑 비교해서 돋보이기나 하겠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네.”
루이제가 불쾌하다는 듯이 콧잔등을 씰룩였다. 하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루이제의 말에 동의했다.
마차가 멈췄다. 어렸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를 따라 몇 번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에 온 적은 있지만 별궁이 있는 쪽으로는 처음이었다.
과연 궁궐은 귀족가의 저택과는 차원이 달랐다. 별궁마저도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뒤쪽으로 난 숲으로 잘못 들어갔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루이제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걸.”
“이곳이 가장 조용한 별궁이라고 해요. 다른 곳에도 별궁이 있는데, 그쪽은 규모가 더 크다고 하네요.”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아는 체니?”
툭 쏘아붙이는 말에 하녀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루이제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별궁으로 들어가는 동안, 아르사크는 창문을 통해 그 요란한 행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리는 정원을 함께 내려다보던 로즈안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분이 루이제 님이십니다. 홀드빅 자작의 막내 따님이시죠. 외모가 굉장히 빼어나신 분이라고 하더군요.”
“얼굴 뜯어먹고 살 신붓감을 구한다면 예쁘고 순종적인 게 딱이지.”
아르사크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표정이었다. 너무 덤덤해서 로즈안나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기 경쟁자를 보고, 그것도 어쩌면 자신은 상대조차 할 수 없을지 모르는 사람을 보고도 이렇게까지 태연하다니. 담이 세다고 해야 할지 무신경하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아르사크 님께서도 내일부터는 몸단장에 좀 더…….”
“난 황후 같은 게 되려고 여기 들어온 게 아니라니까. 말했잖아. 내가 단장을 할 필요가 있어? 황제가 날 원해서 데려온 게 아니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니?”
“…폐하께서는 무의미한 일은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르사크 님을 굳이 모셔왔다는 것은, 나름대로 생각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이실 겁니다.”
로즈안나가 못을 박듯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아르사크는 그 말조차도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에리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만이 아르사크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아르사크도 물론, 에리히가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이토록 귀찮은 짓을 할 만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여쁘고 화려한, 누가 봐도 황후가 되기에 부족함 없는 여자 둘에 전혀 그렇지 않은 여자 하나를 세워 놓고 광대놀음을 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그런 악취미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굳이 아르사크처럼 귀찮은 인물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도대체 왜 나지?’
어쩌면, 광대놀음을 하는 데도 어느 정도 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수도 귀족의 딸을 아무나 데려다 놓았다가는 원성을 피하기 힘들었을 테고, 그렇다고 민간의 여자를 데려올 수도 없었을 테니 고르고 고른 것이 어쩌면 변방 족장의 딸인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아르사크는 습관적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가 로즈안나에게 또 한차례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시면 머리카락이 상한다니까요.”
“너 때문에 내 속이 먼저 상하겠어. 머리카락이 아니라.”
빗을 들고 덤벼드는 로즈안나를 피해 방 한쪽으로 훌쩍 몸을 날리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로즈안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오기가 난 표정으로 팔짱을 척 꼈다.
“얌전히 머리를 빗으시면 말을 구경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말? 여기도 말이 있어?”
“뒤쪽에 작은 마구간이 있어요. 하지만 머리를 빗지 않으시면 절대로 나갈 수…….”
“빗어, 얼른.”
아르사크는 냉큼 의자에 앉아 무릎 위로 얌전히 손을 모았다. 로즈안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머리를 빗는 동안 아르사크는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꼼지락거리기는 했으나 로즈안나가 어깨를 가만히 쥐자 금세 얌전해졌다.
“말을 타고 한 바퀴 돌게 해줘. 그럼 앞으로 머리도 얌전히 빗을 테니까.”
“말을 타신다고요? 그 말들은 공주님들이 타시던 말이에요!”
“여기 공주님이 살아?”
할 말이 없었다. 로즈안나는 입을 경솔하게 놀린 자기 자신을 속으로 마구 쥐어박았다.
루이제 홀드빅은 별궁의 여러 방 중에서도 가장 넓고 채광이 좋은 방을 차지했다.
따로 배정된 것은 아니고 후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한 방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었는데, 말이 자유롭게 고르는 것이지 대체로 권력관계에 좌우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홀드빅 자작의 힘이 결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머리를 고치고 있던 루이제가 말했다. 장신구를 정리하고 있던 하녀의 귀에도 그제야 멀리서 울리는 발굽 소리가 들렸다.
“누가 말을 타고 있는 모양인데요?”
“이 근처에서 누가 말을 타?”
창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던 루이제의 푸른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뒤따라 달려온 하녀도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루이제 님, 저게 설마…….”
하녀가 더듬더듬 말했다.
창밖으로 길게 뻗은 정원의 테두리로 말을 달리는 아르사크의 모습이 보였다.
용케도 드레스는 입고 있었지만 휘날리는 치맛자락 아래로 남자들이나 입을 법한 승마용 트라우저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머리카락은 이미 바람에 휘날려 엉망진창으로 풀어진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말도 안 돼요. 폐하께서 저런 걸 가만두실까요?”
“심사 시기가 오면 하루도 안 되어서 쫓겨나겠지. 내버려 두렴.”
로즈안나는 차마 뒤따라가지도 못한 채 정원에 서서 불안스레 발을 구르고 있었다.
뒤따라 나온 다른 시종 몇몇이 무례하다는 것도 잊고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아르사크는 벌써 저만치 말을 달려 정원의 거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있었다. 재빨리 내달리는 말발굽 아래에서 뽀얀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르사크 님! 이제 그만하고 내려오세요!”
다각 거리는 발굽 소리가 가까워지자 로즈안나가 부끄러움도 잊고 소리를 꽥 질렀다.
말의 움직임이 약간 느려지는가 싶었지만, 아르사크는 로즈안나를 약 올리듯이 혀끝을 가볍게 빼물고 다시 그녀의 앞을 휙 스쳐 지나갔다.
“쫓아오고 싶으면 너도 말을 타지 그래?”
아르사크의 외침 소리가 멀어졌다. 로즈안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분해 죽겠다는 듯이 발을 굴렀다.
“아르사크 님!”
“한 바퀴만 더 돌고 올 테니까 그만 잔소리해!”
아르사크는 손에 쥔 고삐를 세차게 내리치며 몸을 숙였다. 온몸으로, 정통으로 바람을 맞으며 달리자 갑갑한 코르셋의 존재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은 온순하고 얌전했지만 발이 빨랐다.
“넌 이름이 있니? 없다면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
말의 머리를 토닥이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말은 기분이 좋은 듯 숨을 훅 몰아쉬며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요란한 바람 소리 때문에 아르사크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