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적을 상대하고서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자가 맞붙어 이길 자신이 없다니, 토르갈의 선대 족장은 도대체 딸을 어떻게 키운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후녀가 아니라 새 호위기사로 들이는 게 낫겠군.”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농담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폐하.”
만약 아르사크의 실력을 눈앞에서 봤더라면 에리히는 정말로 그녀를 호위기사로 들였을지 모르는 일이다. 테오도르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실력은 확실하겠지만 호위기사치고는 너무 살벌한 솜씨다. 만약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목을 따고자 한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없을 것 같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제가 더욱 실력을 갈고닦겠습니다. 계속 폐하를 호위하게 해주십시오.”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지금 너한테 사랑 고백 듣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옆에 하루 온종일 붙어 있다는 생각만 해도 테오도르는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토르갈에서 처음 그녀와 마주했을 때, 그녀가 자신과 맞붙어 싸운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은 것을 약간은 감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어디로 보나 토르갈에 불리한 상황이었으니 결국 결과는 같았겠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덤벼들었다면 아르사크를 수도로 데리고 오는 것은 자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가, 꼴 보기 싫다.”
에리히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손짓했다. 테오도르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별실을 나섰다.
4장 별궁의 후녀
아르사크의 일과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심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까지는 아직 며칠의 시간이 있었지만, 옷을 맞추는 일부터 황궁 내부의 사소한 예절을 몸에 익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심드렁한 태도여서, 때아닌 고생을 뒤집어쓴 것은 로즈안나였다.
“아르사크 님,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소파는 눕는 자리가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데 뭐가 어때서 그래? 깐깐하긴.”
“가장 사소한 몸가짐부터 조심하셔야 합니다. 빨리 일어나세요. 자꾸 이러시면 소파를 치워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젠 협박까지.”
투덜거리면서도 아르사크는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풍성하게 펼쳐진 드레스 자락 아래로 쩍 벌리고 앉은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르사크 님, 다리를 오므리세요.”
“어차피 보이지도 않아.”
로즈안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르사크의 발치에 꿇어앉아 그녀의 무릎을 모아 붙였다. 아르사크는 뚱한 표정으로 로즈안나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여기서는 어떻게들 사는 거야? 숨 쉬는 것도 규칙을 지키라고 할 셈인가?”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기가 막히는구나.”
“아르사크 님, 조만간 홀드빅과 볼핀 가문의 영애분들께서도 후녀로서 궁에 들어오실 겁니다. 두 분 다 어릴 때부터 조신하고 흠 잡을 데 없기로 소문난 분들이세요. 그런 분들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셨다가는 당장 쫓겨나실지도 모릅니다.”
그거야말로 아르사크가 바라던 바였으나 로즈안나로서는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속이 탈 만도 했다.
거의 울기 직전인 로즈안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르사크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면서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칭얼거려.”
“아르사크 님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알았다니까.”
아르사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에리히의 별실 앞에서, 로즈안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손끝을 모았다. 시종장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더더욱 굳은 얼굴을 한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했다. 창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선 에리히 옆에 테오도르가 서 있다는 것이 사소한 위안이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에리히의 몸이 로즈안나를 향해 천천히 돌았다.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눈초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더 가까이 와라.”
에리히가 말했다. 조심스럽게 두어 걸음을 다가서자, 그의 미간이 희미하게 찡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옆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더 다가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손을 뻗으면 멱살도 잡을 수 있을 거리까지 다가가자 에리히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 망아지는 얌전한가?”
로즈안나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 여자 말이야. 정신 나간 야생마처럼 날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기에 널 불렀다.”
아르사크 얘기구나. 로즈안나는 입을 달싹거리며 잠시 할 말을 고민했다.
“아르사크 님은… 나름대로 잘 적응하고 계십니다.”
“‘나름대로 잘 적응한다.’는 게 어떤 의미지? 제대로 심사를 받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닫긴 했다는 건가?”
“그것은…….”
에리히의 시선은 로즈안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던 로즈안나가 테오도르를 흘긋 쳐다보았지만, 안타깝게도 테오도르 역시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것은, 뭐?”
“…아르사크 님은 총명한 분입니다. 제가 알려드린 예법을 불과 하루도 지나기 전에 모두 외우셨고, 드레스 입는 법이나 걷는 법, 별채의 모든 구조를 벌써 알고 계십니다. 그런 분이시니, 분명 심사가 시작되면 누구보다 훌륭하게 맡은 일을 해내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사실이긴 했지만 왠지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비스듬히 턱을 괸 채 로즈안나를 쳐다보던 에리히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깥을 내다보던 에리히가 말했다.
“홀드빅의 딸이 오늘 저녁 도착한다고 하더군.”
“…….”
“괜한 소문이 더 퍼지지 않도록 제대로 단속해라. 이미 퍼진 소문만으로도 충분히 골치가 아프니까.”
“알겠습니다.”
로즈안나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에리히가 손짓을 하자, 그녀는 도망치듯이 방을 나섰다.
홀드빅의 딸이 예정된 날짜보다 일찍 들어오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볼핀의 딸보다 먼저 눈에 띄고 싶어서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분위기를 보고자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아르사크 님에 대해 알아보러 오는 거겠지.’
아르사크에 대한 소문은 궁 안은 물론 수도 전체에 쫙 퍼져 있었다. 얼마나 황당한 꼴이었으면 죄수라는 헛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욕을 보이기 위해서 그런 꼴로 말에 태웠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르사크가 수치심이나마 느낄 수 있는 여자였으면 상황은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로즈안나는 치미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다다른 로즈안나는 안에서 들려오는 휙 하는 소리에 잠시 발을 멈추었다. 무엇을 들고 휘두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아르사크 님?”
문을 연 로즈안나의 표정에 기겁한 빛이 떠올랐다.
아르사크가 손에 들고 있던 막대를 한 번 더 세게 휘두르자 쐑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아르사크 님! 대체 무슨… 어서 내려놓으세요!”
“가만히 앉아 있자니 답답하단 말이야.”
로즈안나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아르사크가 말했다.
‘도대체 저 막대는 어디서 난 거지?’
황당하다는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던 로즈안나는 길쭉한 창문 아래에 커튼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져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창문 꼭대기에 가로로 매달려 있던 커튼 봉을 뜯어내서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저걸 무슨 수로 내린 거야?’
“아르사크 님, 그러다 다치십니다! 내려놓으세요!”
다시 쐑 하는 소리와 함께 봉이 허공을 갈랐다. 아르사크는 길쭉하고 가느다란 커튼 봉을 마치 검처럼 든 채, 그 끝이 향하는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아르사크가 누구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지는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넌 정말 잔소리가 많구나?”
아르사크가 커튼 봉을 침대 위로 툭 집어 던졌다. 로즈안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든 말든, 그녀는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흐트러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 헤쳤다.
“사람이 운동을 해야지.”
“…정숙한 아가씨들은 마음을 단련하는 데에 힘쓰는 법입니다.”
“수나 놓으면서? 그러다 나이 들면 시녀 없이는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텐데, 그게 좋아? 눈은 올빼미처럼 어두워지고, 자기 발로는 산책도 못 가는 꼴이 되고 싶지는 않아.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어때?”
“저는 다 보고 있습니다.”
“넌 내 편이잖아.”
아르사크의 태도는 태연했다.
로즈안나는 더 말할 기운도 사라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시종들을 불러 커튼 봉을 새로 달게 했다.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해.”
로즈안나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종들이 커튼을 다는 동안,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흐트러진 머리를 새로 빗겨주려 했지만 아르사크는 한사코 거절했다.
“내버려 둬. 계속 완벽한 머리를 하고 있을 순 없단 말이야.”
“얌전히 앉아서 책을 읽으시면 머리가 흐트러지실 일도 없을 텐데요.”
“좀 재미있는 책을 가져다주면 읽을게. ‘사교 예절’ 같은 것 말고.”
“아르사크 님께 가장 필요한 책으로 골라 놓았습니다. 그리고 재미와 관계없이 모두 읽으셔야 하고요.”
아르사크는 들은 척 만 척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심성이라고는 몸가짐에 시종들이 흘끔거리며 시선을 던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로즈안나만이 안절부절못하며 아르사크의 옆을 서성거리다가 빗을 들고 머리를 빗기는 척했다.
“아르사크 님, 홀드빅 자작가의 영애분이 오늘 도착하실 겁니다.”
“누군지 몰라.”
“루이제 홀드빅이라는 분입니다. 홀드빅 자작의 막내 따님이시고, 얌전한 분이시라고는 하지만 명심하세요. 이곳은 소문이 빠릅니다. 주의하시지 않으면 아르사크 님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말 타고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더 떨어질 평판도 없는 것 아니야?”
‘그거라도 알고나 있으니 다행이네.’
로즈안나는 흐트러진 아르사크의 머리를 풀어 내렸다. 몇 번을 만져봐도 놀랄 정도로 관리가 안 된 머릿결이다.
그나마 궁에 있는 며칠 내내 로즈안나가 밤낮으로 다듬고 매만져 그럭저럭 윤기가 흐르도록 할 수 있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보기 딱할 정도로 엉키고 흐트러지는 꼴은 면했다.
“폐하께서 아르사크 님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로즈안나의 말에, 아르사크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