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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6화 (6/191)

6화

겨우 살아남아 날뛰는 말들을 진정시키느라 병사들이 애를 먹는 사이,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아르사크의 몰골을 바라보고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

아르사크의 말에, 테오도르는 물론 병사들조차도 경악한 표정으로 주춤대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뭘 봐?”

“…아르사크 님, 상처는… 없으십니까?”

“없어. 로즈안나는?”

덤불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떠는 로즈안나와 병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로즈안나, 무사하니?”

“…….”

아르사크가 물었지만 로즈안나는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말을 하지 못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놀란 모양입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 자식, 입 냄새가 장난이 아니더라고. 문만 열었는데도 냄새가 어찌나 심하던지.”

태연한 태도로 아르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입 냄새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반박하려던 테오도르는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말에 오르십시오. 마차는 더 이상 탈 수 없겠습니다.”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말을 달라고 했잖아.”

아르사크가 말했다.

테오도르는 뭔지 모르게 부아가 치민 표정을 지은 채, 말의 등으로 훌쩍 뛰어오르는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다 찢어진 드레스 자락 아래로 드러난 속옷 안으로, 쭉 뻗은 다리가 힘차게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좀 더 올라가면 계곡이 있습니다. 거기서 피를 씻으십시오.”

테오도르는 차마 아르사크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과연, 폭포라도 있는 것인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사크는 피가 굳어 끈적거리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기면서 테오도르를 힐끔 쳐다보았다.

“못 볼꼴을 봤다는 표정이군.”

‘알긴 아네.’

“…놀랐습니다. 어디서 그런 검술을…….”

“떠돌며 사는 건 생각보다 위험천만한 일이거든. 너 같은 온실 속 화초들하고는 다르지.”

아르사크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테오도르는 순간 발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기준에 댄다면 자신은 온실 속 화초가 맞았다. 황제의 호위병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전쟁에 나가본 적은 없으니까.

“…검만 다루십니까?”

“검은 두 번째로 잘 다루는 거야.”

그게 두 번째라니. 첫 번째로 잘 다루는 게 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활은 검보다 더 낫지. 하지만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라면 활보다는 검을 쓰는 편이 유리해.”

“궁에서는 훈련받은 병사 이외에는 활을 다룰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 내가 지붕 위에서 황제를 암살이라도 할까 봐 말해주는 거야?”

이 사람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테오도르는 돌아가자마자 에리히 주변의 경계를 더 강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폐, 폐하.”

“뭐냐? 수선 떨지 마라.”

에리히의 싸늘한 말투에 시종장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의 기분이 좋기만을 기도하며 긴긴 복도를 달려왔는데, 아무래도 신은 오늘 시종장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황제의 기분이 어떻든 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시종장의 역할이었지만, 불쾌한 에리히를 상대하는 일이 누군들 쉬울 리가 없었다.

“저, 자, 잠시, …잠시.”

“뭐냐고?”

“테, 테오도르 님이 오, 오셨습니다. 이, 이제 곧 궁문을 통과하실, 거라고…….”

“근데? 뭐? 왜 그렇게 부들부들 떨고 있어? 테오도르에게 빚이라도 졌나?”

“그, 그런 게 아니옵고… 저, 테, 테오도르 님이 데리고 오신, 후, 후녀가, 그것이.”

에리히의 몸이 벌떡 솟구쳤다. 시종장은 거의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 된 채,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녀를 데리고 오지 못했나?”

“아닙… 아닙니다. 데, 데리고 왔습니다.”

“근데 뭐가 문제야? 한 번만 더 말을 더듬으면 혓바닥을 잘라버리겠다.”

“폐하께서 직접, 보셔야만… 합니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에리히는 짜증이 솟구친 얼굴로 복도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갔다. 황궁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열리고, 멀리서 다가오는 대열이 보였다. 에리히 이외에도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차가 없잖아.”

에리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시종장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침묵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찢어진 깃발 한 대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뒤이어 에리히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폐하를 뵙습니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테오도르는 에리히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나 에리히는 테오도르의 인사 같은 것을 받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말 위에 앉은, 머리는 다 헝클어지고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아르사크만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나마 지저분한 천으로 속옷이 드러나는 것만은 막았지만, 그 아래의 옷이 무슨 꼴이 되어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설명해라.”

에리히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테오도르는 차게 식은 손을 꾹 움켜쥐었다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산길에서 도적떼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기습이었고 수가 많아 몇 명의 병사가 죽었고, 마차와 짐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저 꼴로 여기까지 왔다?”

“…시간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폐하.”

“시간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저 여자는 이 사태에 대해서 아무 수치심도 못 느끼는 것 같은데.”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알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말 위에 올라앉아 에리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적떼에게 당해 눈이라도 멀었나?”

“예? 아닙…아닙니다. 로즈안나, 어서 아르사크 님을.”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테오도르가 급하게 눈짓을 했다. 사색이 된 채 굳어있던 로즈안나가 허둥지둥 아르사크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의 도움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다는 듯, 온몸에 지저분한 천을 두른 그대로 말 등에서 휙 뛰어내렸다. 여기저기서 경악스러운 비명이 작게 터져 나왔다.

“당장 별궁으로 데려가. 깨끗하게 씻기고 정신 차리게 만들어 놔.”

“전 제정신입니다만, 폐하.”

돌아서는 에리히의 뒷덜미를 아르사크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테오도르는 달려들어 그녀의 입이라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런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에리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슬 퍼런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황제 앞에서도 아르사크의 태도는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했다.

“제국의 신민을 갉아먹는 좀벌레들을 몰아내고 온 신하들에게 치하가 너무 인색하시군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로즈안나는 허리를 숙인 채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기회를 한번 주지.”

에리히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무슨 기회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 무릎이 닳도록 빌 기회 말이다. 하지만 빈다고 해서 꼭 살려준다는 말은 아니야.”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무릎을 꿇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 가르쳐 주지. 당장 무릎을 꿇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그때였다. 테오도르가 에리히의 앞을 가로막듯이 무릎을 꿇었다.

“비켜, 테오.”

“폐하, 아르사크 님은 먼 길을 오시느라 피로하십니다. 도적떼에 놀라셨을 테니 아량을 베푸십시오. 로즈안나, 빨리 아르사크 님을 별궁으로 모시고 가라.”

로즈안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뻗치다시피 서 있던 아르사크를 질질 끌다시피 해 사라지는 것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에리히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헛웃음 소리를 내었다.

“테오, 넌 내 손에 죽었어.”

“…죽을 때 죽더라도 해명은 하게 해주십시오. 옛정을 보셔서요.”

“내 얼굴을 우습게 만들어도 유분수지. 당장 따라와.”

에리히가 돌아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테오도르를 뒤로 한 채,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사라진 별궁 쪽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진짜 설명해.”

아무도 없는 별실로 들어오자마자, 에리히는 테오도르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테오도르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잠깐 고민하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산속에 도적떼가 매복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세력을 길렀는지, 수가 상당했습니다.”

“국경 주변의 도적떼 출몰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 몇 번이고 소탕을 하려 했는데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는 통에 그러지 못했어.”

에리히가 말했다.

테오도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정도의 규모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고, 병사에게 말했던 것처럼 황제의 깃발과 병사들을 보면서도 튀어나올 만한 담력이 있으리라고는 더욱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화근을 따지자면 상상력이 부족한 자신이었다.

“단거리로 오려다 보니 민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도에 입성한 후부터는 이미 사람들의 눈에 띄어…….”

“그래서 저 꼴로 내 궁까지 오게 했다는 거군. 마차는 어쨌나?”

“…전투 중에 부서져서 이동이 불가능했습니다.”

“기가 막히는군.”

에리히가 헛헛한 소리로 말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는 그다지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부상당하진 않은 것 같던데.”

“아르사크 님 말씀이십니까?”

“그럼 네 얘기겠어?”

테오도르는 잠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뭐야?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부상은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뭐.”

“도적을 거의 다 소탕하신 것은 아르사크 님이십니다.”

에리히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듣고도 믿지 못할 소리였다. 하지만 테오도르가 이런 때에 시시하게 농담 따먹기나 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도적을 다 소탕해?”

“…부끄럽습니다만, 저도 그분과 맞붙어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 그게 내 호위기사로서 할 소리냐?”

“사실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에리히 님.”

에리히는 이번에야말로 기가 막혀 웃어야 할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테오도르가 자신의 실력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에리히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진중하고 겸손하지만 누구보다 실력이 좋았고,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아무 데서나 검을 뽑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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