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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5화 (5/191)

5화

“나는 말을 타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해.”

“이제는 마차에 익숙하고 편해지셔야 합니다.”

로즈안나와 똑같은 투로 테오도르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띠꺼운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본 뒤 마차에 탔다.

그러나 구두도 익숙지 않거니와 풍성한 치맛단에 자꾸만 발이 걸려서 결국 몸을 다 싣기도 전에 아르사크는 팔을 내저으며 휘청거렸다.

넘어지지 않으려 억세게 붙든 손잡이가 뚝 떨어지는 것을 느낀 순간, 테오도르가 양팔로 아르사크의 어깨를 받쳤다.

“괜찮으십니까?”

테오도르는 아르사크가 넘어질 뻔한 사건보다 떨어져 나간 손잡이가 더 황당한 듯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즈안나조차도 무미건조하던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아르사크는 손에 쥔 손잡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테오도르에게 툭 던지듯이 건넸다.

“마차 좀 튼튼하게 만들지 그랬어?”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만…….”

저도 모르게 변명을 한 테오도르는 아르사크가 마차 문을 닫고 들어간 후에야 떨어진 손잡이를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섬세하게 세공한 손잡이는 이제 영영 제구실을 못 할 것이 분명했다.

“무사히 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네.”

아르사크의 부족이 있는 북쪽 국경에서 수도까지는 대략 사흘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큰길을 따라가면 그랬고, 산 쪽으로 난 길을 돌아가면 좀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고민하던 테오도르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마차의 창을 열고 아르사크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을 때, 자다 깬 아르사크는 나에게 그런 것을 왜 시시콜콜 말하느냐는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산길도 정비는 되어 있지만, 큰길보다는 좀 더 험해서 불편하실 수 있어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르사크 님께서 불편하시다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걸어가라고 해도 갈 수 있으니까 빠른 길로 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대꾸가 날아왔다.

금세 닫혀버린 창문을 보면서 테오도르는 과연 에리히가 몇 시간 만에 아르사크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할지 가늠해 보았다. 아직 만나지도 않은 사이지만, 에리히와 그녀가 죽도록 상성이 안 맞을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했다.

“산 쪽으로 올라간다.”

병사들은 테오도르의 명령을 따라 말머리를 돌렸다. 마차 바퀴가 덜걱덜걱 소리를 내며 구르는 것을 들으며 천천히 말을 몰던 테오도르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병사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나?”

“네, 테오도르 님. 그게… 요즘 이 부근의 산에 도적떼가 자주 출몰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큰길로 가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가까이에 누구의 영지가 있는지 알아보고…….”

“황제의 깃발을 보고도 간 크게 나서는 도적이 있겠느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알겠습니다.”

병사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거기서 잘못 반박했다가는 황제를 모욕했다는 죄를 덮어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한 산길을 바라보며 잠시 눈살을 찡그렸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병사에게 말했던 대로, 아무리 다급한 도적떼라 한들 황제의 병사들을 보고도 달려들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마차 주변을 바짝 경계하도록 해. 선두의 감시는 나로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테오도르 님.”

말 위에 앉은 테오도르는 아르사크가 탄 마차 안을 힐끔 돌아보았다.

로즈안나가 같이 있기는 했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아르사크가 탈출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러겠다는 마음만 먹는다면 로즈안나 같은 평범한 여자가 아르사크를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차 손잡이도 뜯어내는데, 로즈안나쯤은 절벽 아래로 내던져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어쩌면 폐하는 저 여자를 이용해서 홀드빅과 볼핀의 딸들이 겁먹고 도망치게 만드시려는 게 아닐까?’

테오도르는 허무맹랑한 망상에 빠질 지경이었다.

산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돌부리에 발굽이 걸리고 미끄러질 때마다 투레질을 하는 말을 어르면서, 테오도르는 연신 긴장한 표정으로 뒤를 따르는 마차를 돌아보았다.

“중턱에서 휴식한다.”

테오도르가 위쪽으로 턱짓을 하자 병사들의 표정이 희미한 활기를 띠었다.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그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마차 바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발굽이 땅을 딛는 소리, 갑옷이 맞물리며 철컥거리는 소리만 잠시 이어졌다.

무척 조용한 숲이다. 한두 명 있을 법한 여행자나, 짐을 이고 다니는 장사꾼도 없다.

순간, 나뭇가지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흔들렸다. 새들이 퍼드덕거리며 날아오른 순간, 여러 대의 화살이 테오도르가 탄 말 바로 앞에 날아와 꽂혔다.

“기습이다!”

테오도르의 함성이 고요한 숲을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들고, 당황한 병사들이 허둥거리며 대열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길옆으로 자란 나무와 덤불 사이에서 날아든 화살에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다급하게 마차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려 했으나 한 떼의 도적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저 그런 도적떼가 아니야.’

치켜든 무기를 보며 테오도르는 순간적으로 그런 판단을 내렸다.

기껏해야 오래되고 투박한 도끼 따위나 가지고 다니는 그런 놈들이 아니었다. 검과 활, 창으로 무장했고 심지어 무기의 질도 어지간한 병사들이 쓰는 것과 맞먹을 것 같았다.

“마차를 지켜!”

테오도르가 외쳤다. 말을 몰던 병사는 이미 바퀴 아래로 굴러떨어져 있었다.

테오도르는 달려드는 도적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내면서 내리막길을 거꾸로 달려 내려갔다. 커다란 검을 든 도적이 마차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큰일이다.’

“아르사크 님!”

로즈안나의 비명 소리가 터졌다. 마차는 바로 지척에 있었다. 테오도르가 검을 크게 치켜들었고, 도적의 어깨를 향해 그대로 내리그으려던 순간이었다.

“억!”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몸뚱이가 뒤로 붕 날았다. 테오도르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그와 동시에 문이 뜯어져 나간 마차의 발판을 딛고 아르사크가 잽싸게 뛰어내렸다.

도적들은 갑자기 날아간 동료가 굴러떨어진 절벽을 내려다보다가, 험악한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르사크 님, 위험……!”

그 순간, 아르사크는 죽어 넘어진 병사의 허리춤에서 뽑아낸 검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도적의 가슴팍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컥……!”

툽툽한 입술 밖으로 피가 터졌다. 칼에 찔린 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잠시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테오도르와 병사들도 손을 멍청히 늘어뜨린 채, 지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가늠하느라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뭘 멍청하게 섰어!”

아르사크가 외쳤다. 그러고는 그대로 발을 들어 그의 몸을 걷어차 칼을 뽑은 뒤, 몸을 돌려 그 옆에 있던 자의 어깨를 세로로 내리그었다. 팔이 땅으로 뚝 떨어지고, 분수처럼 피가 솟구침과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테오도르, 로즈안나를 안전한 데로 옮겨!”

외침과 동시에 아르사크의 몸이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아름답게 부푼 드레스 자락이 펄럭이고, 햇빛을 받아 허옇게 빛을 뿌리는 검이 도적들의 목을 사정없이 찔렀다.

숲속에서 화살이 다시 날아오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병사! 로즈안나를 데리고 피신해! 나머지는 아르사크 님을 지켜라!”

“아, 알겠습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요하던 숲을 뒤흔들었다. 아르사크는 거추장스럽게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을 칼끝으로 죽 찢어낸 뒤 뒤에서 달려드는 도적의 코를 검 손잡이로 후려쳤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싸쥐고 뒹구는 그의 몸 위로 곧장 검을 찔러 넣자, 아르사크의 온몸에 시뻘건 피가 튀었다.

‘에리히 님은 절대로 이 여자를 황후로 앉히시지 못할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채 놀랍도록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아르사크의 몸놀림을 보며 테오도르는 생각했다.

무기를 장난감 삼아 자라났고 검술로는 따라갈 자가 거의 없는 그로서도, 아르사크와 단둘이 맞붙었을 때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아르사크의 움직임은 예측불허였다. 규칙이라고는 없다. 그러나 무섭도록 정확하고 매서웠다.

“일어서라!”

검을 휘두르며 테오도르가 외쳤다. 허둥거리던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르사크는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움직임으로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넘기고 있었다.

‘정말로 족장의 딸이 맞나? 토르갈에서 사력을 다해 길러낸 암살자가 아니라?’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르사크 때문에 테오도르는 계속 집중력을 잃었다.

곳곳에 숨어 있는 도적떼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으나, 그사이를 파고들어 재빨리 베어내면서 숨 한번 흐트러뜨리지 않는 아르사크는 더더욱이나 예상 밖이었다.

얼핏 그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을 때, 테오도르는 그 입가에 환희와 비슷한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여자, 설마 이 상황이 즐겁나?’

테오도르가 생각했다.

그 순간 아르사크의 몸이 날쌔게 위로 솟구쳤다. 무릎 아래가 잘려 나간 도적의 어깨를 밟고 뛰어오른 아르사크가 그 뒤에 있던 놈의 머리를 무지막지하게 걷어찼다. 그것도 발끝이 아니라 정확히 발뒤꿈치로.

관자놀이를 걷어차인 도적의 거구가 휘청 흔들리자, 아르사크는 그의 어깻죽지에 검을 내리찍듯 꽂은 뒤 그것을 지지대 삼아 다시 한번 뛰어올랐다. 완전히 미치지 않고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움직임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아르사크를 멍청히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도적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도적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몇 남지 않은 잔당들이 듣기 싫은 비명을 꽥꽥거리며 달아난 후, 테오도르는 길 위에 널린 시체들과 시뻘건 강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핏줄기들을 텅 빈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사망자 인원을 확인하고 부상자를 수습해.”

“알겠습니다, 테오도르 님.”

병사가 당혹한 표정으로 물러가고 나자, 테오도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체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름답게 단장했던 머리는 봉두난발이 된 지 오래였고, 고급 옷감으로 지은 드레스는 전부 다 찢어져 속옷이 다 드러나 보였다.

“테오도르 님! 짐들이……!”

“뭐?”

헐레벌떡 뛰어온 병사가 잿빛이 된 얼굴을 숙였다. 난전이 벌어진 틈을 타 수레에 실려 있던 대부분의 짐을 빼앗긴 것이다.

아르사크와 로즈안나가 타고 있던 마차도 바퀴축이 다 부러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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