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4화 (4/191)

4화

“황제의 요구에 응하겠다. 단, 부족민들의 안위를 보장하라.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의 머리를 여기에 떨어뜨리고 말겠다.”

“…제국의 명예를 걸고 약속합니다. 족장께서 응한다면, 부족민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온몸이 떨릴 만큼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는 가장 먼저 활과 화살집을 벗어 땅 위로 내던졌다. 티리야가 울부짖으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르사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허리에 찬 검 두 자루까지 풀어 내던지고, 가죽으로 된 갑옷까지 벗어버린 아르사크는 얇은 천만을 걸친 맨몸인 채 고개를 들었다.

“병사들을 후방으로 물려. 지금부터 그쪽으로 가겠다.”

테오도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철컥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수많은 병사들이 뒤쪽으로 물러났고, 아르사크는 앞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햇빛이 아르사크를 비추었다. 테오도르는 미간을 희미하게 찌푸린 채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빛을 받으면서 오고 있어. 마치 오래된 예언 같군.’

아르사크는 거의 테오도르의 손이 닿을 만한 곳까지 말을 몰아 다가왔다.

아르사크가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나는 제국의 황후 따위가 될 생각은 없어.”

“결정권은 신에게 있습니다. 가시죠.”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아르사크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다소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구속도 하지 않고?”

“당신은 전쟁 포로가 아닙니다. 저는 황후 후보가 되실 분을 모시러 온 것이니까요.”

“국경 병사들을 다 끌고 와서는 ‘모시러 왔다’고. 제국 놈들은 전부 다 철면피로군.”

“무의미한 비난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선에 한해 답해드리지요.”

무미건조한 목소리다. 아르사크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소리를 내고는 고삐를 좀 더 세게 움켜쥐었다.

국경을 가로막고 있는 성문이 서서히 가까워지자 테오도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로 가시기 전에, 토르갈에 잠시 들르실 수 있도록 배려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아르사크의 대꾸에 테오도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아르사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단조롭게 말을 이었다.

“내가 부족으로 돌아가면, 너희들은 절대로 나를 되찾지 못할 테니까.”

“폐하께서는 뜻을 굽히지 않으실 겁니다.”

“잘됐네. 굽힐 줄 모르는 남자라면 부러뜨리는 맛도 있겠지.”

이 자리에 에리히가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앞서 나가는 아르사크의 뒷모습을 다소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볼핀 후작과 홀드빅 자작의 딸들이 유일한 황후 후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선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처음 아르사크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테오도르는 필요하다면 협박이라도 하라는 에리히의 터무니없는 명령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국경 병사들을 있는 대로 끌고 나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정말로 토르갈를 몰살할 기세로 기습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황제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폐하의 뜻대로 될 만한 여자가 아닌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테오도르가 생각했다.

국경의 성문이 열렸다. 아르사크는 견고하게 짜인 문을 개선장군처럼 꼿꼿한 태도로 통과했다.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테오도르가 아르사크의 옆으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먼저 옷부터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여기서 얼마나 머물 거지?”

“오래 머물진 않을 것입니다. 간단한 단장이 끝나면 곧장 수도로 이동할 것입니다.”

“언제?”

“오늘 당장요.”

테오도르는 작고 깨끗한 막사로 아르사크를 안내해 준 후 곧장 어디론가 사라졌다.

말에서 뛰어내린 아르사크는 제국의 문양이 수놓인 천막의 휘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3장 습격

아르사크를 위해 마련된 천막 안에는 테오도르가 미리 데려다 놓은 시종이 있었다. 티리야보다 두세 살쯤 더 많아 보이는, 아직 소녀에 가까울 나이였지만 시중을 드는 태도는 빠르고 정확했다.

무릎을 굽혔다 펴면서 자신을 로즈안나라고 소개한 그녀는 아르사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그녀의 옷부터 벗겼다.

“잠…깐만. 내가 벗으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아르사크 님의 시중을 드는 건 제가 할 일이니까요. 먼저 목욕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 다음 머리단장을 하고, 옷을 갖춰 입으시고, 마차에 오르시면 됩니다.”

“마차? 난 마차는…….”

“이쪽으로 오십시오.”

순식간에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알몸이 된 아르사크를 긴 천으로 둘러 가려준 로즈안나는 아르사크를 목욕통 안에 밀어 넣다시피 앉힌 뒤 푹신한 해면으로 어깨를 박박 문질렀다.

노상 초원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살며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아르사크지만 생판 처음 보는 남 앞에서 몸을 밀리는 것은 약간 민망한 일이었다.

“내가 하면 안 되겠어?”

“다시 말씀드리지만, 안 됩니다. 궁정으로 가시게 되면 모든 일은 시종을 부리셔야 합니다. 황후 후보가 되실 분은 고귀하고 엄숙한 귀태가 있어야 합니다. 허드렛일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자기 몸을 씻는 것도 허드렛일이라고 하는지는 처음 알았는데.”

“너무 말씀을 하시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목소리를 높이시는 일도요.”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긴 머리를 풀어 새로 받은 물에 따로 적셨다가 끄트머리에서부터 꼼꼼하게 감겨주었다.

향주머니에서 꺼낸 가루를 물에 푼 뒤, 거기에 머리카락을 한참이나 담그고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목욕통에 앉은 채 뒤로 고개만 젖히고 있던 아르사크가 투덜거렸다.

“저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향이 머리칼 안쪽까지 스며들어야 하니 조금 더 참으십시오.”

“이래 봐야 자고 일어나면 향은 다 날아가고 없을 건데 뭐 하러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매일같이 하시면 자연스럽게 향이 배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매일같이 하느니 목을 빼놓고 말겠다. 아르사크는 자신의 목을 목각 인형의 그것처럼 쑥 뽑아 물에 흔들어 씻는 살벌한 상상을 했다가 낄낄 웃었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경박하게 웃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종전과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우리 부족에도 이런 게 있긴 했지. 꾸미는 걸 좋아하는 아가씨들이 향유나 꽃을 말려서 머리를 감곤 했어.”

아르사크가 말했다.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비눗물을 헹궈내던 로즈안나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는데, 이 생고생을 하고 나니 그 애들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네.”

“왜 굳이 제국의 황후가 되고자 하시나요?”

로즈안나가 물었다. 아르사크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약간 당기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황후 따위 될 생각 없어.”

“그럼 왜…….”

“내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야. 나를 데려다 놓고 망신 주기 위해서 군대까지 끌고 왔으니 그 가상한 황제의 낯짝 구경도 할 겸.”

“…궁정에서는 절대로 그런 표현을 쓰셔서는 안 됩니다.”

“너는 내가 황후가 되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데, 내 목이 날아갈까 봐 조언해 주는 거야?”

로즈안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모욕을 당한 것처럼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고 있던 로즈안나는 그러나, 아르사크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녀의 머리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주며 말했다.

“저는 아르사크 님의 시중을 드는 사람입니다. 아르사크 님께서 황후가 되시는 것을 바라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난 솔직하게 말해주는 편이 더 좋아. 네가 계속 내 시중을 들게 된다면, 그걸 명심해 줬으면 해.”

아르사크가 말했다. 눈을 감고 있어서 로즈안나의 표정이 어떤지는 볼 수 없었지만,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끝이 긴장한 것처럼 힘이 들어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옷을 갖춰 입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아르사크의 몸이 여느 아가씨들과는 확실히 다른 탓이었다.

살집은 없었지만 활을 쏘고 말을 달리고, 일하는 것이 몸에 밴 아르사크가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 비슷한 체격일 리 없었다.

그러나 로즈안나는 머리가 좋았다. 빡빡하게 죄는 부분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뜯어내고, 그 위로 다른 옷에서 슬쩍 잘라낸 레이스를 감쳐 장식처럼 보이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르사크가 숨을 쉬기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배 위를 빠듯하게 누르는 옷을 내려다보던 아르사크가 꽉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걸 입고 살면서 잘도 숨을 쉬네.”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생각을 바꿨어. 황후가 돼서 이런 옷을 금지시킬래.”

“그러시려면 일단 이 옷에 먼저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아르사크는 문득 어릴 때 잠깐 구경했던 앵무새를 떠올렸다. 아버지에게 온 손님이 데리고 온 새였는데, 초원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깃털이 신기해서 자꾸만 쓰다듬다 혼났던 기억이 났다.

그보다도 더 신기했던 것은 새가 사람의 말을 따라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근데 얘가 꼭 그 앵무새 같네.’

아르사크는 허리를 숙이기도 펴기도 힘든 옷에 갇힌 채 생각했다.

그러나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고역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그녀를 의자에 앉힌 뒤 머리를 빗질해 말리기 시작했다. 말릴 뿐만이 아니라 매끄러운 향유를 얇게 바르고, 다시 모양을 내기까지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다.

“머리를 좀 자르시는 것도… 어떨까 싶습니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촘촘히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여러 방향으로 꼬아 틀어 올린 모양을 거울에 비춰보며 낯선 표정을 짓다가 로즈안나를 돌아보았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은데.”

“머리숱이 풍성한 것은 아름답지만, 유행하는 모양을 위해서는 약간 자르시는 게 나을 것이라서요. 머리 감는 시간도 훨씬 줄어들 테고요.”

그건 솔깃한 소리였다. 아르사크는 별다른 대답 없이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천막 밖으로 나가니 이미 출발할 준비가 갖추어진 후였다.

테오도르는 아르사크의 달라진 모습에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정중히 마차를 가리켰다.

“마차에 오르십시오, 아르사크 님.”

마차는 척 보기에도 화려하고 컸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던져나 보자는 심정으로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