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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3화 (3/191)

3화

아르사크는 손에 쥐었던 빗집을 내려놓으며 피로한 표정으로 자기 어깨를 꾹꾹 주물렀다.

“밤이 늦었어. 너무 걱정하지들 말고 다들 돌아가. 그리고 내일부터 이동할 준비를 하자. 어차피 이 부근의 풀은 거의 다 먹인 참이었잖아.”

아르사크의 말에 서로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하나둘 그녀의 천막을 떠났다.

혼자 남은 아르사크는 어둑한 천막 안을 묵묵히 쏘아보다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두 번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사실상 그녀 혼자만의 희망 사항이었다. 황제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든, 그 일에 자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아르사크는 직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고 많은 귀족 여자들을 두고 이런 변방 유목민 족장의 딸을 찾을 리가 없으니까.

그녀가 아직 어렸을 무렵, 당시 족장이었던 그녀의 아버지와 카툴라의 선대 황제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 젊었던 아버지가 막 족장의 자리에 올랐을 때 카툴라에서는 황제의 자리를 놓고 내란이 일어났다.

당시 카툴라의 황제는 내란을 평정하기 위해 토르갈의 젊은 족장에게 도움을 청한 바가 있었고, 그때만 해도 아직 세력이 융성한 편이었던 토르갈은 기꺼이 의리를 지켰다.

그러나 수십 년 후, 초원 지대에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 토르갈의 족장은 부족민을 구하기 위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황제에게서는 어떤 답도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과 가축이 무더기로 죽어갔고, 매일같이 시체를 쌓아 태우는 역한 냄새가 부족 전체를 기진하게 만들었다.

‘아르사크, 이제 우리는… 우리는 틀렸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아버지. 병은 지나갈 거예요. 영원히 계속되는 병은 없다고요.’

족장과 족장의 어린 딸은 다행히 살아남았다. 아르사크의 말대로 병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곧바로 겨울이 들이닥쳤고 끝없이 굶주려야 하는 황막한 기간은 길고 길었다.

아르사크는 열두 살 무렵부터 껍데기만 남은 아버지를 대신해 부족민들을 독려해야 했다. 가축을 먹일 만한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이사를 하고,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을 돌보고, 사냥부터 천막을 수리하는 일까지 모든 일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홀로, 매일같이 제국과 황제에 대한 적개심에 이를 갈았다.

“알린.”

아르사크가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모닥불을 피우고 있던 알린이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에게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거처를 이동할 준비를 하라고 전해줘.”

“그렇게 할게.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 잘 자.”

아르사크는 입구를 닫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불을 켜둔 채 곧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사리 편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바윗덩이에 깔린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아르사크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뒤척이다 소스라치듯 잠에서 깨었다. 밤새 미처 다 타지 않은 심지에서 묵은 기름 냄새가 풍겼다.

눈살을 찌푸린 아르사크는 입김을 훅 불어 불을 꺼버린 뒤 천막을 들추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너른 땅 위로 부연 안개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르사크는 마구간으로 가 말들을 살피고, 바닥에 흩어진 건초들을 한쪽으로 쓸어 청소했다. 그녀는 족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일을 스스로 했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부족민들 누구도 그녀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먹고사는 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토르갈의 사람들은 족장인 아르사크를 중심으로 무척이나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잠에서 깬 말의 잔등을 쓰다듬으며 하품을 하던 아르사크는 뻐근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말고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푸르스름한 여명이 깔린 마구간 안에 이따금 말들이 불안하게 내뱉는 숨소리와 더불어, 멀리서부터 금속이 땅을 밟는 듯한 울림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르사크!”

마구간 밖으로 달려 나간 아르사크는 천막을 뛰쳐나온 티리야를 붙들었다. 불길하고 낯선 소음에 깨어난 사람들도 자리옷 바람인 채 하나둘씩 천막 밖으로 나왔다.

저편에서부터 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같은 것은 분명 안개가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아르사크는 공중에서 펄럭이는 깃발에 시선을 둔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뒤쪽으로 먼저 몸을 피해요.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활과 말을 꺼내 오세요. 당장.”

부족민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울음소리와 낮은 비명 소리, 욕지거리가 난무했다.

아르사크는 자신의 천막으로 달려 들어가 가죽으로 된 갑옷을 혼자 갖춰 입고 활과 화살집을 내려 어깨에 걸었다.

날을 벼려둔 검 두 자루를 허리에 차고, 가죽으로 된 끈을 이로 물어 단단하게 당긴 그녀는 마지막으로 머리를 틀어 올려 묶은 후 말에 올라탔다. 말들은 이를 드러낸 채 연신 푸르륵 거리며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병사들을 끌고 온 거야?”

“국경 병사들이겠지. 젠장, 여태까지 우리에겐 관심도 없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떠들고 있을 시간 없어! 빨리 말을 꺼내 와!”

아르사크가 소리치자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마구간으로 흩어졌다.

길게 뻗은 지평선을 따라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눈부신 금빛이 초원 위로 스멀스멀 몰려들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제국의 병사들은 햇빛을 등지고 걸어오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몰아 선두까지 달려 나갔다.

“족장님, 이대로는 무리예요. 해가 더 높이 뜨기 시작하면 저쪽이 훨씬 유리하다고요.”

“누가 그걸 몰라? 어떻게든…….”

“아르사크! 아이들을 전부 대피시켰어요!”

티리야가 말을 몰고 달려오며 외쳤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긴 활을 사선으로 걸머진 티리야는 아르사크만큼이나 격분한 표정으로 병사들이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십 년 전, 부모와 하나뿐인 여동생을 모두 잃어버린 전염병의 피해자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티리야가 말했다.

고삐를 움켜쥐고 있던 아르사크가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뒤따라 말을 몰았다.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토르갈의 특기가 기사(騎射)임을 알고 있는 테오도르는 긴장한 표정으로 병사들의 행군을 멈추게 했다.

그사이 해는 조금 더 높이 떠올랐다. 병사들의 머리 위까지 솟구친 햇빛이 토르갈의 시야에 정면으로 들이닥쳤다.

아르사크는 자신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고, 홀로 말을 몰아 앞쪽으로 좀 더 나섰다.

갑주를 씌운 말에 올라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테오도르와 아르사크의 눈빛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지? 카툴라의 에리히는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하여 전쟁을 치르는 겁쟁이인가?”

“말을 삼가십시오, 토르갈의 족장. 우리는 불필요한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족장께서 황제 폐하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아무런 피해 없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제국에는 쓸 만한 여자가 그렇게 없는가? 국경 밖으로까지 눈을 돌려 신부를 찾아야 할 만큼?”

“황후가 될 자질을 가진 여자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초조한 눈빛으로 아직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대치한 채 몇 시간이나 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끝내 버티겠다면?”

아르사크가 말했다. 테오도르의 표정에 잠시 난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희망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저는 황제 폐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 명령이 뭔지를 말해보라는 거야. 앵무새처럼 황제 폐하라고만 복창하지 말고.”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아르사크 님을 제외한 토르갈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될 것입니다.”

악물린 잇새에서 으드득 소리가 났다. 아르사크는 당장이라도 테오도르의 머리에 화살을 쏴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느라 희게 질린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만약 아르사크가 이대로 승산 없는 싸움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부족의 사람들은 모두 다 그녀를 따를 것이 분명했다.

옛날처럼 전장을 누비며 말을 달리는 삶과는 오랫동안 동떨어진 채 살아왔다 하더라도, 유목민들은 붙잡혀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아르사크가 생각했다.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토지와 가축과 부족의 번영을 위한 전쟁과 이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자신이 황제의 요구를 따르기만 한다면,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 따르는 척만 한다면 부족은 무사할 것이다. 적어도 거처를 옮길 수 있을 만한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부족의 존속을 책임져야 할 족장이다. 피를 뒤집어쓰고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명령하는 장군이 아니었다.

아르사크는 말머리를 돌려 부족민들의 대열로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말을 달릴 준비를 하고 활을 쥔 사람들을 바라보던 아르사크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입을 억지로 열었다.

“활을 내리고 물러나.”

“뭐라고요? 활을 내리라니, 무슨 말이에요?”

“물러나! 이대로 싸우면 부족은 몰살이야. 전부 다 죽이고 싶어?”

“차라리 죽고 말겠어요!”

티리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엄하게 질책하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들이 원하는 건 나 하나야. 이대로 싸운다고 하더라도 저들은 결코 난 죽이지 않을 거야. 나 하나 때문에 사람들을 전부 다 희생시킬 수는 없어, 티리야.”

“아르사크! 그건 말도 안 돼요. 저들은 우리를 배신했다고요! 저들 때문에 전부…….”

“알아. 어차피 황후는 한 사람밖에 될 수 없어. 그리고 아마 귀족 중에서 내정된 자가 있겠지. 정식 황후가 책봉되고 나면, 난 탈출해서 토르갈로 돌아올게. 그때까지 티리야, 네가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도록 해. 내 말 알겠지?”

아르사크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티리야는 말 위에서 거의 오열할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아르사크를 올려다보았다.

“걱정하지 마. 아무리 황제라도 날 마음대로 다루진 못 할 테니까.”

“족장님, 이건 말도…….”

“알린, 티리야를 도와서 오늘 당장 거처를 옮기도록 해. 동쪽으로 가. 되도록 국경에서 멀리 떨어지고, 당분간 이 부근으로는 오지 마. 어차피 다시 쓸 만한 초지가 되려면 일이 년은 걸릴 거야.”

아르사크는 혼란스럽게 웅성거리는 부족민을 뒤로 한 채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티리야가 비명을 지르듯 흐느끼며 아르사크를 불렀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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