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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2화 (2/191)

2화

“볼핀과 홀드빅에서 자기 딸들을 후보로 세우겠다면 다른 귀족들은 아마 눈치만 보면서 딸을 숨기기에 급급하겠지. 그렇게 되면 결국 나는 허수아비 노릇밖에 못 하는 거야.”

“그럼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후보가 두 사람뿐이라면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적어도 한 사람은 더 있어야 해. 뒷공작을 꾸미더라도 손발은 맞아야지.”

처음부터 뒷공작 꾸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테오도르는 에리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적당한 인물이 있으십니까?”

테오도르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에리히가 테오도르를 보며 말했다.

“좀 귀찮은 심부름을 해야겠다.”

* * *

유목 생활을 하는 토르갈은 카툴라 제국의 경계와 인접한 초원 지대를 돌며 살아가는 소수 부족이다.

공식적으로는 제국의 치하에 있지만, 아주 오래전에 카툴라를 다스렸던 황제가 토르갈의 부족장과 일종의 합의를 거침으로써 토르갈은 아주 적은 양의 세금을 제국에 상납하며 제국 내부로 침입하지 않는 대신,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 문화를 존중받을 수 있게 되었다.

유목민의 세력이 상당했을 무렵, 그리고 제국의 기반이 지금보다 허약했을 무렵에는 토르갈과 같이 싸움에 특화된 부족이 카툴라에 큰 위협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규모가 점점 더 강성해짐에 따라 국경 밖의 유목민들은 제국 내부로 흡수되거나 와해되어 아예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일이 대다수였다.

토르갈은 유목민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족이었고, 단합력이 좋고 폐쇄적인 특성상 여전히 초원 지대에 살아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십여 년 전 초원 지대 인근을 휩쓴 전염병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때 토르갈도 수많은 인구를 잃어 이제는 쇠락해 가는 단계에 접어든 지 오래였다.

먼 옛날에는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가축의 수만도 지평선에 다다를 정도로 많았다지만, 지금은 부족에 속한 인구수도 그만큼 많지 않았다.

“아르사크!”

아직 열 살이 미처 되지 않은 소년이 턱까지 들어찬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러자 말을 빗질하고 있던 수수한 차림의 여자가 부스스한 소년의 정수리를 말빗으로 툭 내리쳤다.

“아야!”

“족장님이라고 불러, 요 건방진 꼬맹이야.”

“족장님…….”

머리를 싸쥔 소년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띠며 말의 탄탄한 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불이라도 났어? 아니면 양들이 또 도망쳤어?”

“그게 아니야! 빨리 와! 지금 큰일이 났단 말이야! 저기, 카눌… 카튤라…….”

“카툴라야. 카툴라 제국. 왜? 불이라도 났대?”

“불같은 소리 하네! 카툴라에서 누가 왔단 말이야. 갑옷도 입고 말까지 타고 커다란 깃발도 들고 있어. 마을 어른들이 입구까지 나갔어. 아르사크도 빨리 와!”

연신 싱글거리던 아르사크의 표정이 매섭게 굳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빗질을 하느라 벗겨놓았던 안장을 얹을 새도 없이, 그녀는 나는 듯이 말의 등 위로 올라탔다.

“아르사크! 나도 태워줘!”

“안 돼, 넌 여기 있어.”

아르사크가 발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자, 말은 불만스럽게 푸르륵 대는 소리를 내면서도 곧장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순식간에 마을 입구에 도착한 아르사크는 높이 치켜든 제국의 깃발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카툴라의 사신이 갑작스레 무슨 일이지?”

아르사크가 말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외치는 여자를 보며 테오도르는 헛웃음을 쳤다.

“카툴라의 에리히 황제 폐하로부터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토르갈의 족장을 만나고자 하니 안내를 부탁합니다.”

“내가 바로 토르갈의 열두 번째 족장인 아르사크 하르슈다.”

아르사크가 다시 말했다.

테오도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어디로 보나 마구간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녀처럼 보이지, 도무지 족장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허술하고 허름했다.

‘게다가 머리까지 다 풀어 헤치고.’

폐하는 정말 저런 여자로 볼핀과 홀드빅의 딸들을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걸까.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에리히의 판단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그에게는 명령을 거부할 어떤 권한도 없었다.

“…저는 황제를 보좌하는 테오도르 운트겔입니다. 중요한 전언이니 부디…….”

“제국과는 오랫동안 사신 왕래가 없었는데 갑자기 전언이라니? 세금을 더 걷겠다는 용건이라면 돌아가서 불가능하다고 전하시오.”

“세금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 부디 면담을 허락해 주십시오.”

테오도르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테오도르와 주변의 병사들의 차림새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기본적인 무장은 갖추었지만 머릿수는 적었다. 절박한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말머리를 약간 돌렸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테오도르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사신과 호위병 두 사람까지만 허락하겠소. 그 이상은 무장을 해제하고 마을 밖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하시오.”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그대로 명령했다.

병사들은 경계심 가득한 부족민들을 보며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수 없이 상관의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아르사크는 곁에 서 있던 청년에게 무어라 지시한 뒤 가죽을 덮은 커다란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테오도르 역시 마을 입구에서 무장을 풀고, 호위 두 명을 대동한 채 안내를 받아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서 있는 부족민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외면하면서, 테오도르는 일이 잘 안 풀릴 것 같다는 예감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진짜 귀찮아지게 생겼군.’

테오도르는 푹신한 천 더미 위에 무척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내내 무릎을 굽히고 있노라니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감각이 사라져 간다는 생각이 들 때쯤, 드디어 입구를 가리고 있던 천이 걷히고 아르사크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금 전의 허름한 차림새는 온데간데없이, 새 옷을 차려입고 머리는 땋은 뒤 하나로 틀어 올린 그녀는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족장을 상징하는 문양이 수놓인 옷을 입고 가죽과 보석으로 장식된 허리띠를 두른 모습은 황제에 버금갈 만한 위엄이 넘쳐 보였다.

“용건을 말하시오.”

자리에 앉자마자 아르사크가 말했다.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테오도르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처럼 무릎을 세웠다. 그때 아르사크가 손을 들어 테오도르를 막았다.

“앉아서 해도 상관없소.”

“아, 예… 그럼. 흠, 다름이 아니라 올해 폐하께서 경사스럽게도…….”

“본론만. 말들을 빗질해 주러 가야 하니까. 성질이 까다롭거든.”

장황하게 시작하려던 말머리를 잘린 테오도르가 머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원래 말주변이 없는 그로서는 어떻게 해야 이 살기등등한 여족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하는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2장 대치와 요구

“올해 폐하께서 황후를 맞고자 하십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아르사크는 매서운 눈빛으로 사람들의 입을 막고는 짐짓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냈다.

“그래서? 혼례 장식을 양털로 할 테니 양이라도 잡아 오라 하던가?”

“아닙니다. 제국의 황후가 되기 위해서는 각 가문에서 자격 있는 미혼의 여성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후녀의 신분으로 궁에 머물며 심사를 거쳐야만 하는데, 이번에는 토르갈 족장의 따님께서도 이 과정에 참여하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아르사크는 물론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심상찮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테오도르는 아르사크의 눈빛이 형형한 빛을 띠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슬그머니 어깨와 등을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난 아직 결혼하지 않았소. 당연히 자식도 없지.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본데?”

“…예, 오늘 이렇게 와서 확인해보니… 그렇군요. 황제께서는 분명 선대의 족장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착각인 걸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시면 되겠군.”

“그럴 수 없습니다.”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아르사크는 험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미 족장의 자리에 오르셨다고는 해도, 당신은 황제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겁 없이 지껄이는군. 몸뚱이는 여기 두고, 목만 돌아가고 싶은가?”

“그것이 족장의 대답입니까?”

“그렇다. 황제에게 가서 전해. 나는 황후가 될 생각도, 황후 후보인지 뭔지가 될 생각도 없으니, 소꿉놀이는 사과나 깎을 줄 아는 나풀나풀한 아가씨랑 하라고.”

아르사크가 말했다.

턱 밑이 쭈글쭈글해질 만큼 거세게 입을 다물고 있던 테오도르는 절제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 아래로는 피가 통하지 않아 이미 감각이 없었지만, 그의 자세는 반듯하고 단정했다.

“잘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천막을 나섰다. 호위들이 절룩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병사들이 떠난 후, 부족은 발칵 뒤집혔다. 당장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다급한 발언에서부터, 족장을 싸데려가다시피 하는 미친 황제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욕지거리가 난무했다.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서 아르사크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카툴라의 에리히 클로츠는 성질이 불같다는 소문이 있어. 자칫 잘못하면 병사들을 끌고 쳐들어올 가능성도 있다고.”

누군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르사크의 곁에 서 있던 티리야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래서 족장님을 황궁으로 보내자는 말이야?”

“누가 그렇대? 그게 아니라 부족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거지!”

“황후로 들인대도 거절할 판에, 황후 후보라니 말이 돼?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티리야, 그렇게 화낼 것도 아냐. 동맹을 맺은 국가는 보통 혼인으로…….”

“이건 혼인이 아니잖아! 들어와서 시녀 노릇이나 하라는 소리지. 모르는 척하지 마, 알린! 공정한 경쟁일 리가 없잖아. 그리고 동맹이라니, 누가 누구랑!”

“그만들 해.”

아르사크가 말했다. 소리를 치던 티리야도, 웅성거리던 남자들도 다들 입을 다물었다.

기름 먹인 심지의 촛불이 일렁거렸다. 아르사크는 긴 한숨을 내쉬며 가죽으로 된 빗집을 매만지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가 무슨 의도로 나를 데려가려는지 모르지만, 체면이 있으니 거절을 당하고 두 번 오지는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아르사크,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난 족장이야, 알린. 모두가 있는 곳에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일은 삼가도록 해. 네가 아무리 내 소꿉친구라도 정도는 지켜야 하는 거야.”

알린이 뚱하니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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