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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화 (1/191)

1화

1장 귀찮은 일

아르사크는 어깨에 걸친 화살집의 무게를 감각하며 이를 꾹 깨물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번쩍이는 갑옷들을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대로 싸우면 승산이 없어.’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으로, 또 뒤로 늘어선 부족민들을 보았다. 아르사크와 같이 젊은 연령대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모두가 중년이거나 아니면 노인에 접어드는 나이였다.

말 위에 앉아 꼿꼿이 등을 세우고, 당장이라도 그녀의 명령만 떨어지면 활시위를 당길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철갑과 무기로 무장한 제국의 병사들을 이겨낼 가능성은 없었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서풍을 타고 제국의 깃발이 드높게 휘날렸다.

“활을 내려.”

아르사크가 말했다. 말에 올라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갈 준비만 하고 있던 부족민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족장님!”

“활을 내려. 이대로 싸우면 부족은 몰살이야. 전부 다 죽게 놔둘 수는 없어.”

“그럼 저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따르겠다고요? 그러느니 다 같이 죽고 말죠! 난데없이 황후도 아니고! ‘황후 후보’로 들어와서 심사를 받으라니! 우리를 뭐로 보고!”

아르사크의 옆에 있던, 그녀보다 몇 살쯤 어려 보이는 소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르사크의 태도는 단호했다.

“티리야, 내 말대로 해. 모두 다 활을 내려. 저들이 원하는 건 나 하나야. 내가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부족은 무사할 수 있어.”

“아르사크! 아니, 족장님! 족장님이 없으면 어차피 우리 부족은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저들이 우릴 가만히 두겠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

아르사크가 말했다.

분을 이기지 못해 눈물까지 글썽이던 남자는 웃음을 띤 아르사크의 입술이 화를 삭이느라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숨을 헐떡였다.

“절대로 황제의 뜻대로는 안 될 거야. 나를 믿어.”

다짐하듯 말한 그녀는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화살집을 풀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탄탄하게 엮은 가죽이 단단한 흙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리는 사이, 아르사크는 가지고 있던 활과 옆구리에 차고 있던 두 자루의 검도 연달아 풀어버린 뒤 맨몸으로 말을 몰고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며 외쳤다.

“나는 하르슈의 딸이자 토르갈의 족장인 아르사크다! 그대들의 요구에 응하겠다!”

아르사크가 외치자, 제국의 병사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이끌고 선두에 선 테오도르 운트겔은 굳은 표정을 한 채 아르사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르사크가 다시 말했다.

“단, 나의 부족민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그렇게 하면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황궁으로 갈 것이다.”

“제국의 명예를 걸고 분명히 약속하겠소.”

테오도르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는 아르사크의 눈빛이 새매처럼 매섭게 빛나는 것을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은 이게 최선이야. 하지만 절대로 네놈들 장단에 마냥 놀아나지는 않아.’

두꺼운 말고삐를 쥔 아르사크의 손이 무섭게 떨렸다. 그녀는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이를 갈며 잡아먹을 기세로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 * *

에리히 클로츠가 무척 기분이 나쁘다는 사실은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톡톡톡, 톡톡, 톡톡, 톡…….

집무실 책상의 나뭇결과 손톱이 부딪치던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다 천천히 느려졌다.

에리히로부터 딱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석상처럼 서 있던 테오도르는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지그시 눈을 감고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와장창.’

“테오.”

감았던 테오도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으레 성질을 못 이긴 에리히가 책상 위에 있는 오만 가지 물건들을 모조리 내던질 것이라 예상했던 테오도르는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뒤늦게야 등을 바로 세웠다.

“말씀하십시오.”

“귀족을 죽이면 무슨 벌을 받게 되지?”

에리히가 이마를 짚은 채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테오도르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다 고지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국법상, 귀족이나 평민에 관계없이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자는 공개적으로 처형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인 사람이 황제라면?”

“…왜 죽였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하지만 몰려드는 탄원서와 각 가문 수장들의 연합 성명이 잇따르겠지요. 최악의 경우에는 폐하께 반기를 드는 자가 나타날 불상사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좋아. 일단 볼핀을 죽인 다음 반란을 일으키려는 조짐이 보이면 그 핑계로 전부 목을 매달면 되겠군.”

에리히가 말했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답을 드디어 찾았다는 듯이 상쾌해 보이는 그에 비해, 이제는 테오도르의 안색이 무척 나빠져 있었다.

“폐하… 불가능합니다. 볼핀 후작은 폐하의 육촌이시기도 하므로…….”

“육촌이든 사촌이든 내가 알 바 아니야. 내 얼굴만 봤다 하면, 입만 열었다 하면 그놈의 황후, 황후 노래를 불러대는데 더는 못 참아.”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폐하, 독신을 고집하시려는 생각이십니까?”

테오도르의 질문에, 에리히는 매섭게 불이 튀는 듯하던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누가 독신으로 살겠다고 했나? 난 단지, 볼핀과 그 무리들의 뻔한 수작에 넘어갈 수 없다는 것뿐이야. 내가 당장 황후를 맞겠다고 하면 가장 강력한 후보가 누구일 것 같아? 볼핀과 홀드빅의 딸들이지. 그자들은 이미 소화도 못 할 정도의 권력을 쥐고 있어. 그런데 외척이 된다? 아예 나라를 통째로 볼핀이나 홀드빅 입에 쑤셔 넣고 양치기나 되는 게 낫지.”

“볼핀 후작과 홀드빅 자작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는 말씀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최종적으로 황후가 될 인물을 선택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 아닙니까. 반드시 그들의 딸 중 한 명이 선택될 것이라는 보장은…….”

“순진해 빠졌군.”

에리히가 일갈하듯 말했다. 테오도르는 입을 꾹 다문 채 무슨 소리냐는 듯이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신의 영역은 무슨 얼어 죽을 신의 영역이야? 지금 최고 신관의 자리에 있는 자는 볼핀의 옛 후견인이야. 너, 설마 그 휘황찬란한 빛이 진짜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라고 지금껏 믿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믿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얼른 시선을 돌렸으나 당황스러워 커진 눈동자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가짜라니. 축일이나 황실의 기념행사가 있을 때마다 종탑에서 솟구치던 아름다운 빛이 그럼 전부 가짜였다고?

“장작이랑 색유리 몇 장 가져와. 당장이라도 그 ‘신의 빛’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러면, 만약 볼핀 후작의 딸이 최종 후보에 오르게 된다면…….”

“당연히 ‘신의 빛’은 그 여자 머리로 가는 거지. 볼핀 후작은 그날부터 내 국구가 되는 거고. 그것뿐일까? 일단 그렇게만 되면 다음 황제는 볼핀의 성을 달고 이 자리에 앉을 거야. 황궁에 불을 질러버리고 말지, 그 꼴은 못 봐.”

에리히가 격해진 어조로 말했다. 테오도르는 그제야 왜 에리히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으며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끌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에리히 클로츠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올해로 오 년. 선대 황제였던 그의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사이 대리청정을 했던 기간까지 합친다면 그는 벌써 팔 년 가까이 나라를 다스려 나가고 있었다.

대리청정을 시작했던 열일곱 살 무렵부터 황태자비를 맞이하는 일에 대한 권고와 주청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에리히는 황제가 병중이라는 핑계로 항상 그 문제를 거절해 왔다.

황태자비나 황후가 될 인물을 고르는 일은 나라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고, 민간의 혼인처럼 ‘이 사람과 결혼하겠습니다.’는 한두 마디로 치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먼저 자격이 되는 귀족 가문에서 후보가 될 아가씨들, 약혼하지 않은 딸을 후보로 세워 황궁으로 보내면,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그들은 후녀라는 신분으로 궁에 머물면서 황태자비 또는 황후가 될 다양한 분야의 심사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후보가 몇 명이었든 상관없이 최종 단계까지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은 총 세 명으로, 마지막으로는 최고 신관의 집전 하에 치러지는 예식에서 ‘신의 빛’이 닿은 후보가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이 과정을 황제가 병들어 혼란한 시기에 치를 수 없다는 에리히의 주장은 일견 그럴싸했고, 결국 황태자비에 관한 문제는 유야무야 미뤄지게 되었다.

“볼핀 후작에게는 딸이 여러 명 있지 않습니까?”

테오도르가 말했다. 에리히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장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이미 결혼을 했으니 후보 자격이 없어. 하지만 둘째부터 넷째까지, 뒤로 딸이 셋이나 있지. 황태자비를 맞으라고 요구했을 때도 그는 장녀보다 차녀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거야. 최적의 혼기는 이미 조금 놓쳤다고 봐야 하는데, 아직까지 약혼도 시키지 않은 걸 보면 의도는 뻔하지.”

어금니를 깨문 것 같은 소리로 에리히가 뇌까렸다. 눈에 뻔히 보이는 작당질을 알면서도 좀처럼 손 쓸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수모나 마찬가지였다.

선대 황제가 서거한 후, 에리히는 장례를 치르자마자 곧장 대관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황제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첫 일 년은 나라 전체가 새로운 황제에게 적응해 나가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다음 해는 농경지 확장을 위해 평야 지대의 빈 땅을 개간하는 사업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다다음 해는 인접한 국가들과의 무역을 개선하는 데에 일 년을 다 보냈고, 마침내 에리히가 스물네 살의 나이에 접어들자 귀족들은 다시 혼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걸고넘어졌다.

점점 더 집요하고 기승스러운 요구가 이어지다 못해, 오늘은 아예 볼핀 후작이 딸의 초상화를 가져오는 지경에 이르자 무시로 일관하던 에리히의 약한 인내심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미루기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만…….”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늦든 빠르든 에리히는 혼인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황후 후보를 낼 수 있을 만한 위치의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볼핀 후작이나 홀드빅 자작의 권력에 빌붙어 있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황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아가씨라 하더라도 최종 간택까지 가게 된다면 결국에는 그놈의 ‘신의 빛’이 선택권을 쥐게 될 테고, 늙은 신관은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라도 볼핀 후작의 손을 들어줄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만약 볼핀 후작과 홀드빅 자작의 딸들이 황후 후보로 나설 경우, 경쟁 상대가 될 만한 다른 귀족들은 딸의 안위를 위해 결코 후보로 나서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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