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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34)화 (134/136)

134화

“집사님, 지금 멜슨 씨 도착해서 작업 중이세요.”

하녀의 말에 로제가 일지를 확인하며 미간을 좁혔다.

“아니, 오전 중으로 와달라니까 왜 이렇게 늦게 왔지?”

“그러게요. 하여튼 시간 약속을 지키는 법이 없다니까요.”

로제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창문 너머를 내다보았다.

정원사 멜슨은 시간도 잘 지키지 않고 입도 거칠었지만, 가지를 치고 시든 나무를 되살리는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끝나면 말해줘. 내가 확인할게.”

“네.”

“그리고 르휜 아가씨 방 커튼이랑 침구를 좀 바꿔야 할 것 같아.”

라비엘리가 저택을 나간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로제는 그녀의 방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원래 라비엘리가 쓰던 방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볕이 잘 들어오고 널찍한 곳을 라비엘리의 방으로 새로 꾸며놓았다.

로제의 말에 메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튼 싹 걷어놓을게요.”

“오늘은 꽃을 좀 봐야겠다.”

로제는 펜으로 제 볼을 한 번 톡톡 치더니 다시 말했다.

“예쁜 화병으로 세 개만 골라서 가져다줘.”

“화병이요?”

“응, 아가씨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소홀함이 없어야 해.”

“네, 알겠어요.”

메이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손을 맞잡고 우물거렸다.

“왜?”

“집사님, 저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요.”

“말해봐.”

“집사님께서는 르휜 아가씨와 후작님을…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사용인들 모두가 궁금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으리란 것도 예상했다.

‘그런데 메이지가 총대를 멜 줄은 몰랐네.’

제가 에몬 질의 여관에서 잡일을 했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데 그 일로 라비엘리의 이름에 흠결이 가는 건 안 되었다.

루시안과 부부 행세를 하며 여관에 머물렀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건 절대, 절대 안 돼.’

“메이지, 아가씨가 안 계신 자리에서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아.”

“아가씨의 수발 하녀였다고 했지?”

로제가 다부진 음성으로 묻자, 메이지가 침을 한 번 넘기더니 대답했다.

“네.”

“그럼, 말을 아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말이야.”

로제가 거기까지 말하자 메이지는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집사님. 제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그래, 그럼 이만 나가봐.”

“네.”

메이지는 고개를 꾸벅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휴.”

로제는 소리 나지 않게 입술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메이든이 물러나고 로제가 마이어 가의 집사가 되었다고 했을 때, 사용인들은 전부 그녀를 불신했다.

특히 하녀장 에레타를 중심으로 반발하는 분위기가 거셌다.

모두가 곧 집안이 엉망이 될 것으로 생각했으며 마이어 가도 내리막을 걸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메이든의 빈자리를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제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홀로 여관을 운영해온 경험이 있어 대저택을 관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심지어 여기선 직접 요리나 빨래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처음 로제와 힘겨루기를 하던 에레타도 루시안이 그녀에게 전권을 일임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선 꽤 얌전해졌다.

똑똑.

“들어와.”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사님, 후작님께 올라가실 시간이에요.”

“고마워, 마리.”

다른 건 몰라도 테아노에게 약을 먹이는 일만큼은 로제가 직접 챙기고 있었다.

로제는 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곧바로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상자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로 책상 가장 아래 칸을 열자, 루시안이 건넨 봉투가 들어 있었다.

‘집사도 사용인들도 전부 후작이 고용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집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어요.’

로제는 루시안이 지시한 일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집사가 되면서부턴 말수를 줄이려고도 노력했다.

‘약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봉투 안에는 소분된 약이 포장되어 있었다. 로제는 그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하루에 한 번, 같은 시각에 복용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 시간을 정해 잊지 말고 챙기세요.’

‘네, 후작님.’

‘사람을 부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로제에게… 아니, 클렌스 양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

‘다만 한 가지, 마이어 후작에게 약을 먹이는 일만큼은 결코 실수해서는 안 됩니다.’

‘네, 명심할게요.’

‘클렌스 양은 왜 이 약의 정체에 대해 묻지 않습니까?’

물론 알고 싶었다.

목 바로 아래까지 질문이 차올랐지만 로제는 참아냈다.

이유를 물었다간, 저도 모르게 쌓았던 신뢰를 잃을 거란 예감이 스쳐서였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루시안이 저택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얼핏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전부 테아노가 벌을 받은 거라 했다.

가여운 르휜 양을 못살게 군 죄라고 했다.

조각처럼 들려온 말을 한데 모으자, 로제는 루시안이 제게 건넨 약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묻지 않길 잘했어. 그리고 앞으로도… 이 약에 대해선 함구하자.’

똑똑.

대답이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로제는 손등을 세워 문을 두드렸다.

침묵을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서자 테아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후작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그의 작위는 이미 루시안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지만, 로제를 비롯한 마이어 가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후작이라고 불렀다.

물론 딱히 존중의 의미가 있다거나 별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부를 호칭이 필요했고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였다.

“이런.”

로제는 물과 약이 든 쟁반을 내려놓다 미간을 좁혔다.

“후작님, 이번엔 또 어느 아이 짓인가요.”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테아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테아노의 얼굴에 낙서를 해놓은 것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이마에 ‘나는 식충이입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로제는 앞치마 끝단에 물을 조금 묻혀선 테아노의 이마를 문질러 닦아주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그녀는 아래층에서 점잔을 빼느라 봉인했던 입을 풀고 떠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람이 미워도 그렇지, 이렇게 누워만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하냔 말이에요. 안 그래요?”

차라리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상대가 나았다.

“…그런데 모아놓고 물어봐도 전부 다 아니라고 하니. 이거 뭐 필체를 감별할 수도 없고 이리 와서 다시 써보라고 할 수도 없고 말예요. 저라고 뾰족한 수가 없네요. 그렇다고 후작님 얼굴에 누가 낙서하는지, 누가 장난치는지 감시하는 사람을 둘 수는 없잖아요. 그것만큼 인력 낭비가 어디 있겠어요?”

로제는 이마가 벌겋게 변할 때까지 박박 문지르며 계속 중얼거렸다.

“어차피 거울은 못 보시니 조금 참으세요. 자, 다 됐네요. 이제 약을 드릴게요.”

앞치마를 탈탈 턴 로제는 곧바로 컵에 물을 채웠다. 그런 다음 가루약을 꺼내 물에 잘 개었다.

“자, 이제 약 드실 시간이에요.”

테아노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데다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미음을 넘기거나 물을 넘길 수 있었다.

한때는 물도 미음도 전부 거부한 탓에, 지금은 얇은 관을 제작해 억지로 주입하고 있었다.

“다 됐어요, 후작님.”

로제는 수건으로 테아노의 입을 대충 닦아준 다음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편히 쉬세요.”

* * *

로제가 나간 뒤, 테아노의 침실은 다시 고요 속에 잠겼다.

테아노는 말 그대로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죽을 수도, 말이 나오지 않으니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 얼마나 더 살아야 할까.

차라리 총에 맞을걸, 왜 총구를 두려워했을까.

그는 반듯하게 누워 흘러가 버린 제 삶을 반추하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로제가 올라와 억지로 약을 먹이고 나면, 온몸은 뻣뻣하게 굳고 한 시간가량 불에 들어간 것처럼 뜨거워졌다.

가장 끔찍한 건 울고 싶은데 울 수 없고,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분노했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루시안 마이어가 제게 올라와 숨을 끊어주기만을 바랐다.

테아노는 그렇게 침대에 누운 채 남은 삶과 제 육신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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