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산파가 다녀간 뒤 저택은 몹시 분주해졌다.
공작에게 레브리안의 임신 소식을 전하러 간 사이, 하녀들은 신이 나서 아기방으로 쓰게 될 곳을 치우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레브리안 역시 뭐라도 먹어보겠다며 몸을 일으켰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웁.”
“마님, 괜찮으세요?”
“응, 그런데… 웁!”
“이건 아니다. 다음!”
하녀들은 그들의 주인이 넘길 수 있는 걸 찾아내려 끝없이 음식을 만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라비엘리와 루시안은 저택 밖으로 나와 한적한 벤치에 앉았다.
“당신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라비엘리의 질문에 루시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음식 냄새 맡는 걸 힘들어하고, 잠이 늘었다기에 느낌이 왔어요.”
“그렇구나.”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녜요.”
루시안은 정원 너머로 시선을 두며 말을 계속했다.
“생명을 잉태하는 일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처럼, 아기가 엄마에게 제 존재를 알리는 방법도 전부 다르거든요.”
“아기가 엄마에게 제 존재를 알리는… 방법.”
“배가 제법 부를 때까지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라비엘리가 의아한 눈으로 루시안을 쳐다보자, 그는 라비엘리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꾸 잊는 모양인데 나 의사예요.”
“맞다, 그랬죠.”
장난스레 대꾸하자 루시안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래 봬도 꽤 능력 있는 의사인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무시 안 했어요. 이따금 잊을 뿐이지.”
“아무튼 축하해요, 라비엘리.”
“?”
“당신에게 가족이 한 명 더 늘었네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의 가슴이 왠지 울렁였다.
“그렇네요. 내게… 조카가 생기네요.”
사랑하는 동생이 아기를 갖다니.
그녀가 엄마가 된다니.
내게 조카가 생긴다니.
“뭔가 이상해요.”
라비엘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레비가 엄마가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때마침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긴장과 흥분으로 들뜬 가슴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적당히 시원하고 온화한 바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일만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집안이 붕괴한 이후, 라비엘리는 요즈음만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그때 루시안이 라비엘리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좋은 날은 앞으로 더 많이 남았는걸.”
“그럴까요?”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실은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엘리는 제 발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곳 사람들이 전부 레비를 아껴주는 것 같아 다행이고, 마음이 놓여요.”
그녀는 레브리안의 지난 삶을 알지 못한다. 그저 술주정뱅이 아버지, 신전에서 잡일을 하던 과거로 얼마나 고단하게 살아왔는지를 가늠해볼 뿐.
이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몹시 감사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살피는 신이, 자매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의 보살핌 덕분이었을까.
다만 한 가지, 끝내 레브리안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공작님도 너무 좋은 분이시고요.”
“처음에는 좀 답답했지만.”
루시안을 한 번 힐긋거리던 라비엘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레비와 둘이 있을 때 몇 번 한 말인데.”
“네.”
“당신이 그때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한대요.”
루시안은 한 번 싱긋 웃더니 머리를 뒤로 넘겼다.
“시기만 당겼을 뿐, 공작께서는 결국 모든 걸 버리고 부인에게 갔을 겁니다.”
“모든 걸 버리고 사랑을 좇는다는 건… 어떤 걸까요.”
라비엘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루시안이 콧잔등을 구겼다.
“몰라서 물어요?”
“?”
“사람 옆에 두고 모른 척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제야 루시안의 말뜻을 알아차린 라비엘리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당신, 모든 걸… 버린 건 아니잖아요.”
“왜 아닙니까?”
루시안은 몸을 돌려 라비엘리를 마주 보았다.
“목숨보다 간절한 약속을, 신의를 버렸어. 당신 때문에.”
“…….”
“철벽과도 같이 단단하던 당신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바라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알고나 있습니까?”
루시안은 평소보다 흥분한 탓인지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쉿, 누가 듣겠어요.”
“들으라지. 공작님의 사랑만 위대하고 간절해 보이고 내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까?”
“루시안?”
당황한 라비엘리가 그의 팔을 붙들었지만 루시안은 멈추지 않았다.
“내 마음을 증명해야겠군요. 전부 다 버리고 빈털터리로 당신 앞에 서면 되겠습니까?”
루시안은 열을 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완전히 참지 못했다.
“그만 해요.”
“아니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까요?”
“아뇨, 이번에는 반대쪽 팔도 다치고 싶어서 그래요?”
라비엘리가 고개를 저으며 웃자 루시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는 다른 제법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비엘리, 우리 로튼으로 돌아가면.”
“…….”
“집을 보러 다닙시다.”
“집이요?”
“마이어 가에서 계속 살 수는 없잖아요. 당신을 그곳에 살고 싶게 하고 싶지도 않고.”
라비엘리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어물거리다 불쑥 말했다.
“루시안, 난 여기서 레비와 함께 있을 거예요.”
“여기 있겠다니.”
“레비가 아이를 가졌잖아요. 언니의 손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에 루시안이 두 손을 위로 들었다.
“동생이 아이를 가진 것과… 당신이 여기 머물러야 하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이죠?”
이번에는 라비엘리가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왜 상관이 없어요? 아까 레비 얼굴 봤잖아요.”
루시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라비엘리가 답답해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있어요. 얼굴 상한 것 좀 보세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텐데 의지할 수 있는 언니가 곁에 있어 줘야지요.”
“그럴 때 의지해야 할 사람은 언니가 아니라 클라인 이온 공작님이라고요.”
“…….”
“당신이 곁에 남아 수발을 들기를 자처하길 원치 않을 겁니다.”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랄 거예요.”
발끝을 내려다보던 라비엘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만큼이나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랄 겁니다.”
“루시안.”
“내 말이 틀렸습니까?”
“동생의 곁에 있어 주는 게 내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루시안은 고개를 돌리더니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냈다.
“이래도 나와 함께 로튼으로 가지 않겠다면, 공작님께 말씀드리는 수밖에.”
“공작님께 말씀을 드리다니?”
“열 달만 여기서 신세 지겠다고요.”
“진심은 아니죠?”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만 진심이에요.”
보드라운 갈색 머리, 그보다 더 따사로운 루시안의 시선. 라비엘리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불퉁히 대꾸했다.
“…당신 참 이상하네요.”
“뭐가?”
“집을 보러 다니자니. 누가 들으면 우리가 뭐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루시안은 눈을 두어 번 끔벅였지만, 이내 라비엘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알았어요. 집을 보러 다니는 하찮은 일은 내가 하지.”
“…….”
“당신 마음에 쏙 들만한 저택을 알아보죠. 그건 내 전문이니까.”
“그러시든지.”
“그리고 거대한 리본을 사서 통째로 포장한 다음.”
“?”
“그대에게 선물할게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얼굴이 붉어진 걸 감추기 위해 부러 헛기침도 한 번 했다.
“여기 더 머물지 말지는 일단 레비와 이야기해 볼게요.”
“그나저나 엘리, 당신 잊고 있는 게 있어요.”
“잊은 게 있다니?”
루시안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나 말고 한 명 더 있다는 것도 기억해줘요.”
라비엘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다 이내 무언가 생각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