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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32)화 (132/136)

132화

사랑하는 레비에게.

나는 지금 피카르디에 있어.

금방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네. 미안해.

이곳은 조용하고 평화로워. 너른 평지에 집들이 드문드문 있어서인지 무척 한적해. 생각을 정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 같아.

알릭스는 참 강하고 대견한 아이야. 그 어린아이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배우고 있어.

이렇게 귀한 아이를 잃을 뻔했다고 생각하면 오싹해지곤 해.

가혹했지만 힘겨웠던 시간은 전부 지나갔어. 앞으로는 좋은 날만 있을 거야.

알릭스와 루오 씨는 내년부터 포도 농사를 시작할 거래. 지금은 와인 제조법을 배우고 창고를 짓고 계셔.

두 사람은 아주 열정적이고 성실해서 훌륭한 와인을 만들어낼 거야.

몇 년 후에는 루오 씨의 와인이 제국 전역에서 아주 유명해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믿을 수 없겠지만 나도 여기서 꽤 쓸모가 있었단다.

얼마 전 오두막을 벗어나 새집으로 이사했는데 가구를 고르고 배치하는 걸 내가 맡았거든.

레비, 네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부족한 언니를 너그러이 이해하고 감싸줘서 고마워.

알릭스를 찾는데 공작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어.

며칠 내 인사를 드리러 루시안과 함께 이온으로 갈게.

아마 8일 저녁이나 9일 오전이 될 것 같아.

그럼 곧 만나자.

사랑을 담아, 라비엘리 르휜.

* * *

“마님, 아직도 몸이 좋지 않으셔요?”

하녀의 질문에 레브리안은 이불 속에서 고개만 끄덕였다.

“에구, 이를 어째. 따뜻한 수프라도 좀 내올까요?”

“…….”

“어제 오후부터 한 끼도 못 드셨잖아요.”

“괜찮아.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아.”

레브리안은 반쯤 감긴 눈으로 힘겹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흰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으며 뽀얗던 피부 역시 푸석해 보였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제대로 식사를 못 하고 있었다.

식사는커녕 음식 냄새를 맡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마님,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와야 할 것 같아요.”

“그냥 조금 쉬면 괜찮을 것 같아.”

하녀가 머뭇거리자 레브리안이 코 아래까지 이불을 내리며 다시 말했다.

“공작님께 절대 말씀드리면 안 돼.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정신없이 바쁘신데… 나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마님.”

클라인은 중요한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느라 황궁에 있었다.

“몰래 의사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면 안 돼.”

레브리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이불을 걷어냈다.

“젠, 오늘이 며칠이지?”

“9일이요.”

하녀의 말에 레브리안의 표정이 환해졌다.

“언니가 오는 날이야.”

“아가씨께서 오늘 오시는군요. 그럼 저도 내려가서 준비해야겠어요.”

레브리안은 처음보다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언니와 함께 오는 후작님이 의사거든. 그분이 오시면 진료를 부탁드려봐야겠어.”

“그래요, 그렇게라도 꼭 진료를 보시는 게 좋겠어요.”

하녀의 말에 레브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마님, 그럼 쉬셔요.”

하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곧바로 레브리안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날 저녁, 이온의 대저택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건 라비엘리와 루시안이었다.

“아가씨, 어서 오세요.”

라비엘리는 지쳐 있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하녀의 얼굴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젠, 무슨 일 있었어?”

젠은 레브리안의 수발 하녀였다.

“주인마님께서 많이 편찮으셔요.”

“레비가?”

라비엘리가 묻자 하녀가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으며 대답했다.

“네, 요 며칠 통 드시지를 못해요.”

하녀의 말에 라비엘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혹시 무슨 일이 있었니?”

“아뇨,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젠은 그간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클라인이 얼마 전부터 부재중인 상황과 그 직후 레브리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을 말이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그러셨어요. 너무 걱정돼요.”

“그럼 레비는 지금 위층에 있니?”

“네, 음식 냄새도 맡기 힘들어하셔요. 일 층에는 거의 안 내려오시고요. 차도 겨우 한두 모금만 드세요.”

그때 옆에 있던 루시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의사는 뭐라던가?”

젠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마님께서 괜찮으시다고만 하셔요. 의사를 부르면 주인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안 된다고.”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람.”

라비엘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오늘도 오전 내내 누워계셨어요.”

“지금 자고 있니?”

“아뇨, 일어나계셔요.”

“그럼 내가 올라가 볼게.”

라비엘리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위로 올라가려는데, 루시안은 싱긋 웃고 있었다.

레비가 아프다는데 왜 저렇게 즐거운 표정일까. 라비엘리는 마뜩잖은 눈으로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여행이 즐거우셨나 봐요.”

목소리를 낮추고 비꼬듯 말하자 루시안은 별말 없이 웃기만 했다.

“지금 그렇게 웃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라비엘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레비를 좀 봐줄 수 있겠어요?”

“그러죠.”

이어진 대답 역시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똑똑.

안으로 들어가자 우아하게 꾸며진 침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화로운 듯하지만 잔뜩 가라앉은 공기가 느껴졌다.

레브리안은 이불을 목 바로 아래까지 덮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레비.”

라비엘리의 음성에 누워있던 레브리안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여러 날 먹지 못했다더니 얼굴은 푸석했고 안색도 좋지 않았다.

라비엘리는 한달음에 동생에게로 달려갔다.

“맙소사, 레비.”

“언니.”

레브리안은 라비엘리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프면 의사를 불러야지.”

“언니가 보고 싶어서 입맛이 없었나 봐.”

하지만 라비엘리는 웃지 않았다. 다소 머쓱한 얼굴이 된 레브리안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아픈 건 아냐.”

“지금 네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라비엘리는 속이 상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아픈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레비.”

“정말. 딱히 어디가 아픈 건 아냐. 그냥 입맛이 없고, 기운도 좀 떨어질 뿐이야.”

“그게 아픈 거야.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굴어.”

“의사를 부를 정도는 아니야.”

“너 공작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그렇다면서.”

“요즘 무척 바쁘시거든. 세금 개편에 국경 문제에, 황제께선 계속 부르시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셔.”

그러는 사이 루시안은 커튼을 걷어내고 닫힌 창문도 활짝 열더니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루시안이 나른히 웃으며 말을 받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가 말하자 라비엘리가 도끼눈을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안.”

하지만 루시안은 라비엘리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기다려봐요.”

그러더니 레브리안을 내려다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진료 가방은 없지만 제가 부인의 상태를 좀 살펴도 괜찮을까요?”

“네, 그럼요.”

레브리안은 어딘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진료를 보겠다는 루시안은 그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는 질문을 던졌다.

“부인, 음식을 보면 속이 좋지 않고 거북하던가요?”

레브리안은 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낮에도 잠이 쏟아지고 몸에 힘도 없고요.”

“네, 계속 잠이 와요.”

“음식 냄새도 맡기 힘들고.”

“맞아요. 심지어 공기조차 역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거기까지 대답했을 때, 레브리안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심각한 병인가요?”

그저 소화가 안 된다고만 생각했다. 병에 걸렸다거나 몸에 이상이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저를 한 번 힐긋 쳐다보더니 증상을 줄줄 읊는 걸 보자 레브리안은 덜컥 겁이 났다.

“후작님, 말씀해주세요. 저… 큰 병에 걸린 건가요? 나을 수는 있어요?”

“진정하세요, 부인. 큰 병은 아니지만 조치는 필요할 것 같네요.”

그러더니 곁에 서 있던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어린 하녀는 어딘가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젠이라고 부르세요.”

“그래요, 젠. 지금 가서 산파를 불러와요.”

“…산파요?”

“네.”

라비엘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눈을 잘게 깜빡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우리 레비가.”

루시안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엘리는 멍한 눈으로 다시 레브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녀 역시 무언가 직감한 얼굴로 천천히 얼굴을 매만졌다.

“그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공작님께도 어서 소식을 전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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